21화
마인은 인류의 적이다.
마기를 받아들여 타락한 인간은 괴수와 달리 지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들은 괴수보다 더 위험하다.
평생을 동료의 사냥감이 되어 떠돌 가능성을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이 엽사의 삶.
“저 안개가, 마기란 건가?”
“그래, 구름악어가 뿜어내는 마기야. 경매 물품 중 하나인 모양인데…… 엿 됐네.”
그렇기에, 설화의 말은 가볍지 않았다.
말을 마친 그녀가 권총을 거둬들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구름악어면, 병급인가?”
“그중에서도 제일 성가신 놈이야. 저 안개 속 어딘가에 있을 본체를 찾지 못하면 토벌이 불가능하니까. 저 빌어먹을 안개가 시야를 가려 버리니 쉽게 찾을 수도 없고.”
말을 마친 설화가 안경에 손을 갖다 댔다.
파지직!
스파크가 튐과 동시에, 안경알 위로 수없이 많은 문자와 숫자들이 떠오른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설화가 입을 열었다.
“일단 이 아래는 놈에게 먹힌 것 같아.”
“여기도 곧 먹힐 예정이겠군.”
“그래, 본체를 찾지 못하면 말야.”
말을 마친 그녀가 자신의 발밑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조금 전 진혁과의 일은 까맣게 잊기라도 한 듯, 그녀의 표정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이 아래 어딘가에 마기 반응이 집중돼 있어. 정확히 몇 층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면, 이대로 기다리고 있으면 되겠군.”
“그 전에 우리가 마인이 되지 않는다면 말야.”
진혁의 대답에 설화는 냉소하며 손에 쥔 세총통을 들어 올렸다.
“사 품이면 어차피 오래 버티진 못하겠네. 도와줄까? 여기서 뛰어내리는 것보단 깔끔할 텐데.”
말과는 달리, 곰방대를 빨며 애써 웃는 그녀의 입술에 맺힌 핏기가 서서히 가신다.
‘이럴 줄 알았다면, 두정갑을 가져왔어야 하는 건데.’
그랬다면 이 빌딩에서 어떻게든 탈출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의 그녀는 맨 몸이다.
‘서울 한복판에 병급 괴수가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냐고.’
이미 아래에 있던 수많은 엽사들은 마기로부터 무사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엽사들을 집어삼킨 마기의 구름은 이제 그들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
진혁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여길 빠져나갈 거니까.”
“……미친 소리 하지 마. 삼 품인 나도 저 안개 속에선 한 시간을 버티기 힘들거든?”
“그럼, 창문으로 나가야겠지. 나갈 곳은 그곳뿐이니.”
“……그냥 내가 편하게 끝내 준다니까?”
황당한 표정을 지은 설화가 권총을 들어 보였다.
“여긴 23층이라고. 엽사는 뭐, 23층에서 떨어져도 살 것 같아?”
일 품에 이르러 육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지 않는 이상, 아무리 엽사라도 23층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자살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녀에게, 진혁의 말은 황당무계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하지만.
‘멜리나.’
―왜요?
진혁은 설화와 말싸움을 벌이는 대신 옆에 있던 망령, 멜리나를 불렀다.
‘분명, 마법을 다룰 줄 안다 했었지?
―네, 그래 봐야 중급 수준이지만요.
‘조금 이르긴 하지만, 네게 육체를 주마.’
―육……체요?
‘그래.’
―정말요?
그 말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뜨기 시작한다.
진혁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쪽의 컨테이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정확히는, 컨테이너 안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천둥비룡의 시체를 향해.
‘망령이여.’
두근! 두근!
검게 물든 진혁의 심장이 흑마력을 토해 낸다. 손끝에 뭉친 묵빛 기운이 천둥비룡의 눈으로 스며든다.
‘명계의 율법에 따라, 네 영혼을 그릇에 옮겨 담아라.’
―예이!
진혁의 언령이 발동됨과 동시에 멜리나가 기쁜 목소리로 날아간다. 흑마력의 유도를 받아 천둥비룡의 눈으로 파고든 망령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다.
‘뭐야, 서가에 저런 술법이 있었다고?’
이 모든 장면을 처음부터 지켜보던 설화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지는 그 순간.
“키이이…….”
컨테이너 속에 잠들어 있던 병급의 괴수.
천둥비룡이 눈을 떴다.
* * *
올림픽대로.
한강의 남쪽을 따라 이어진 대로 위를, 검은색 장갑차가 달리고 있었다.
반마기 코팅이 된 증가장갑을 덕지덕지 붙인 장갑차의 옆면에 새겨진 것은, 서가와 세한그룹을 상징하는 북두칠성의 문양.
다름 아닌, 세한보안의 엽사 수송 차량이었다.
쿠르르릉!
거친 엔진소리를 내며 대로를 질주하는 장갑차의 목적지는, 한강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여의도.
끼이익!
여의도의 수많은 빌딩 중 유독 검게 칠해진 빌딩 앞에 멈춰 선 장갑차의 문이 열렸다.
그곳에서 줄지어 내리는 것은, 세한보안의 엽사팀 중에서도 요인의 호위를 주 업무로 하는 호위 3팀의 엽사들.
“빨리 움직여! 갑호 상황이다!”
“상대는 병급이야! 장비 똑바로 챙겨!”
마기를 막을 수 있는 방호구와 보구를 주렁주렁 걸친 엽사들이 부산하게 움직인다.
“서진혁 님을 구해야 한다! 빨리 움직여!”
그것은, 그들의 팀장인 신주연 역시 마찬가지.
정장 위에 마정석이 달린 액세서리 몇 개와 무기들을 걸친 그녀의 입술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시간이 없어, 빨리 움직여야 해.’
병급의 괴수가 뿜어내는 마기를 견뎌 낼 수 있는 것은, 게이트 너머에서도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삼 품 이상의 엽사들뿐.
그 잠재력이 높긴 하지만, 이제야 간신히 엽사의 자격을 얻은 진혁이 아르카나를 집어삼킨 안개 속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팀장님, 돌입 준비 완료했습니다!”
“좋아. 그럼, 바로…….”
부팀장의 보고를 듣자마자, 주연은 곧장 출동 명령을 내리려 했다.
하지만.
“멈추시오.”
그들의 앞길을 막는 자가 있었다.
검이나 창 따위로 무장한 세한의 엽사들과는 달리, 오얏꽃이 새겨진 총과 위장복 위로 두꺼운 조끼를 겹쳐 입고 검은 헬멧과 고글로 머리를 가린 사람들.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주연은 잘 알고 있었다.
“착호갑사들이 여긴 무슨 일입니까?”
강북의 주인, 이가.
과거 조선의 정예들이 쓰던 이름을 물려받은, 이가의 엽사 집단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자들.
그들의 장으로 보이는 자가 무뚝뚝한 투로 입을 열었다.
“여의도 협약에 따라, 이곳은 우리 착호대의 영역이오. 그대들이 나설 곳이 아니지.”
파직! 파지직!
말을 마친 남자의 전신에서 뇌전의 특징인 푸른 스파크가 보란 듯이 튀어올랐다.
그 기세로 볼 때, 상대의 실력은 최소한 삼 품에 이르렀을 터.
“분명, 그 조약에는 예외 조항이 있을 텐데요.”
“예외?”
“각 가문의 혈육에게 위해가 갈 경우, 해당 가문에서는 엽사를 투입할 수 있다.”
말을 마친 주연은 빌딩을 휘감은 검은 연기를 가리켰다.
“서가의 장남인 서진혁 님께서 저 안에 계십니다.”
그러니, 너희는 우릴 막을 자격이 없다.
말을 마친 그녀의 눈빛이 남자에게로 향했다.
피식.
허나 남자는 웃을 뿐이었다.
“우리가 조사한 대로라면, 아르카나 내에 서가의 인물은 없었소.”
“……믿지 못하겠습니다. 증거라도 보여 주시죠”
“우리가 보여 줘야 할 이유는 없을 것 같소만.”
말을 마친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곧 착호대가 안으로 돌입해서 괴수를 토벌할 예정이니, 귀하들은 이만 돌아가 주시오. 혹시라도 귀 가문의 사람이 발견된다면 구해 주도록 하지, 아직 마인이 되지 않았다면 말이야.”
말을 마친 남자는 입술을 비틀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뻔했다. 주연의 어금니에 힘이 들어갔다.
“……이건 협약위반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위반은 서가에서 먼저 한 것이오. 있지도 않은 서가의 장남을 핑계 삼아 엽사들을 몰고 여의도까지 오다니, 이건 마치…….”
도중에 말을 끊은 갑사의 눈이 가라앉았다.
“전쟁이라도 바라고 온 것 같잖소?”
“전쟁이라니, 그게 무슨……!”
전쟁이라는 말에 주연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분노로 거칠게 뛰는 심장과는 반대로 그녀의 머릿속은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두 번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 이상 시간을 낭비하게 만들어서, 혹시나 진혁 님의 몸에 문제라도 생긴다면…….”
스릉!
그녀의 등에서 기다란 장검이 뽑혀 나온다. 장검의 끝이 그녀의 앞에 선 갑사를 겨눈다.
“그 모든 책임은, 당신들과 이가가 져야 할 겁니다.”
“무례한!”
스릉! 철컥!
남자의 외침을 신호 삼아 두 가문이 서로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둘 사이의 한 걸음 남짓한 공간을 터질 것 같은 긴장이 가득 채운다.
누군가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는 순간, 대치는 곧장 전쟁으로 넘어가리라.
‘나와 비슷한 수준이라면, 지금 기습하는 게 유리하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한 것은 근접전을 펼쳐야 하는 서가다.
‘빠르게 제압하고, 아르카나로 들어가서 진혁 님을 구출한다.’
이 일이 설사 전쟁의 불씨가 될지라도, 미래의 가주가 될 잠재력을 지닌 진혁을 구하는 것이 옳다.
상대와 자신의 실력을 가늠하던 마음이, 조금씩 선공으로 기울어져 갔다.
그때였다.
쨍그랑!
그녀의 귓가에,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스쳐 지나간 것은.
‘뭐지?’
분명, 아르카나 방향에서 들려온 소리.
갑사들을 살피던 그녀의 시선이 남자의 뒤에 자리한 검은 빌딩, 경매장 아르카나로 향했다.
그리고.
‘저, 저건…….’
무언가를 발견한 그녀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키에에에!”
천둥비룡.
머리 위에 달린 두 개의 뿔에서 번개를 내뿜는, 병급의 괴수.
‘병급의 괴수가 둘이라니.’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그녀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최대한 빨리 진혁을 구출해야 하는 그녀와 호위 3팀의 입장에선 새로운 장애물이 등장한 셈.
“처, 천둥비룡?”
“모두 요격을 준비해라!”
철컥!
뒤늦게 발견한 이가의 착호갑사들이 양손에 쥔 마나 소총을 들어 올렸다.
승자총통(勝字銃筒)이라 불리는, 이가 엽사들의 표준 무장.
허나.
“잠깐, 멈춰!”
우우웅!
마나가 담긴 주연의 목소리가 퍼져 나간 순간.
“모, 몸이…….”
“뭐, 뭐야?”
사격을 준비하던 갑사들의 몸이, 마치 얼어붙기라도 한 듯 굳어 버렸다.
철컥.
“……무슨 짓이오?”
얼굴을 싸늘하게 굳힌 착호갑사들의 장이 주연에게 총구를 들이밀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먼저, 저길 보시죠.”
주연을 노려보던 남자의 시선이, 그녀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체내의 마나를 끌어 올리며 눈에 힘을 주자, 천둥비룡의 형체가 점점 확대된다.
그리고.
“사람……?”
천둥비룡의 등에 탄 사람을 발견한 그의 입이 쩍 벌어졌다.
* * *
“……너, 서가 아니지.”
“날 모욕하는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
진혁이 낮은 목소리로 묻자, 함께 천둥비룡의 등 뒤에 올라탄 설화는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서가에서 괴수 테이밍을 한단 소리는 못 들었단 말야! 그것도 이미 죽은 괴수를…….”
가장 앞에서 적과 맞서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것이 서가, 세한이 아니던가.
그 장남이 자신 대신 괴수를 앞세운다는 건, 그녀의 상식과는 어긋나는 일이었으니까.
“쓸데없는 말을 할 때는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진혁은 대답하는 대신, 손가락으로 빌딩을 가리켰다.
“저 괴수, 그대로 내버려 둘 생각인가?”
“……그럴 리가.”
설화는 고개를 젓고는, 한쪽 무릎을 꿇고 오른손을 천둥비룡의 등에 갖다 댔다.
빌딩 밖으로 탈출하기 전, 진혁과 함께 세웠던 계획.
파지지직!
이제, 그 계획을 실행할 시간이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어도, 혼자 할 수 있었단 말이에요!
번개의 마나를 끌어 올린 설화를 바라보던 진혁의 머릿속에 천둥비룡, 멜리나의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회는 넘치도록 충분할 것이다. 계획에 집중하도록.’
―칫, 알았다고요.
멜리나와 대화를 끝낸 진혁은 설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위치는?”
“8층. 서서히 위로 올라오고 있어.”
“준비는?”
“충분해.”
파지직!
입에 문 곰방대를 죽 빨아들인 그녀가 푸른 연기를 내뿜으며 미소를 짓는다.
“그럼, 시작하지.”
쐐애애액!
진혁의 대답과 동시에, 천둥비룡의 몸뚱이가 아래로 내리꽂혔다.
일반인이라면 당장에 허공으로 튕겨 나갔을 속도였지만, 이미 엽사인 그들의 움직임을 흔들 수는 없다.
이윽고, 지면을 향해 쏘아져 나가는 천둥비룡의 몸뚱이가 아르카나의 9층을 지나치는 순간.
“지금.”
진혁의 신호가 떨어졌다.
파지지직!
설화의 몸에 흐르는 뇌전의 마나가 천둥비룡의 등가죽을 뚫어 낸다.
그 아래에 자리한 것은, 뇌전의 마나를 증폭시켜 주는 천둥비룡의 등뼈.
마치 거대한 전선과도 같은 척추를 따라, 푸른 번개가 노도처럼 쏟아져 나간다.
그 여정의 끝에 자리한 것은, 천둥비룡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두 개의 황금 뿔.
두 뿔의 꼭짓점에 마나로 이루어진 푸른 번개가 맺힌 그 순간.
콰르르릉!
번개의 창이, 탑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