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여의도의 검은 등대, 아르카나.
이름답게 외벽이 온통 검게 칠해진 고층빌딩의 지하에는 경매 물품을 보관하기 위한 수장고가 마련되어 있다.
괴수, 괴수의 부산물, 미술품, 보석, 마정석, 보구.
게이트 너머에서 흘러들어 온 온갖 종류의 물건들이 주인을 기다리는 수장고의 한구석에서.
우웅!
보라색으로 빛나는 괴수의 알이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경매장의 수장고로 들어오는 괴수의 부산물 중에서도, 괴수의 알은 특히나 위험한 존재.
그렇기에, 아르카나에서는 알이 부화를 멈추도록 온갖 마법적 처리를 가한다.
부화는커녕, 움직일 수도 없어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건만.
쩌적! 쩌저적!
알을 감싼 수많은 결계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부르르 떨던 알의 표면에 하나둘 금이 가기 시작했다.
분명, 부화가 일어난다는 증거였다.
쩌저저적!
미세한 실금이 거미줄처럼 퍼져 나가면서 알의 형체가 무너져 내린다.
누군가 이 사실을 알아챘다면 곧장 경보를 울리고 손님들을 대피시켰겠지만.
“아니, 진짜라니까. 글쎄…….”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럴 리가 있어? 하여간…….”
수장고를 관리하고 있어야 할 경비들은 초소에서 잡담을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파삭!
셀 수 없이 많은 실금이 간 알의 표면이 가루처럼 부서지면서, 알 속에 잠들어 있던 괴수의 새끼가 모습을 드러냈다.
“구우우…….”
괴수의 생김새는 특이했다.
주먹 두 개만 한 크기의 보라색 공처럼 생긴, 몸뚱이에 박혀 있는 것은 붉게 빛나는 두 개의 눈.
생명체보다는 공의 형태에 가까운,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아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구우우우…….”
그것은 알에서 성장하기 위한 형태일 뿐이다.
쉬이익!
공처럼 생긴 괴수의 몸에서 보라색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순식간에 괴수의 주변을 가득 채워 버린 증기는 서서히 수장고 전체로 퍼져 나갔다.
“야, 저게 뭐야?”
“연기? 불이라도 난 거 아냐?”
“아씨, 하필 내 타임 때!”
그제야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증기를 발견한 경비들이 허둥지둥 움직였지만.
쉬이이익!
그들의 몸을 보라색 증기가 덮친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뭐, 뭐야!”
“콜록, 콜록…… 끄윽…….”
비명과 신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곧, 보라색 증기가 지하 전체를 가득 메우고도 모자라 빌딩 위로 뻗어 나갔을 때.
“구우우…….”
보랏빛 증기 사이에서.
병급 괴수, 구름 악어의 눈이 붉게 빛났다.
* * *
“우리, 이야기 좀 하지?”
진혁을 만난 이설화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미모는 빛이 바래기는커녕 더욱 돋보였지만, 악귀처럼 살기를 뿜어내는 그녀의 눈빛을 함부로 마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
진혁을 제외하면.
‘오랜만이군.’
진혁이 그녀와 마지막으로 말을 섞은 것은 십삼 년 전.
‘미안하지만, 꿈 깨. 난 결혼할 생각 따윈 없으니까.’
약혼식이 끝나고, 단둘이 만났던 자리에서 앳된 그녀가 꺼낸 말.
‘그 뒤론 볼 일이 없었지.’
초렵식을 준비하고, 사고를 당하고, 식물인간이 되어 병상에 누워 지낸 지 십 년.
그렇기에, 깨어난 진혁은 파혼 소식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은 일이지.’
십 년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진혁에겐 결혼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까.
피식.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진혁의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웃어?”
진혁이 웃음소리를 내자 설화의 새하얀 미간이 일그러졌다.
“아무것도 아니다. 왜 찾아온 거지?”
그 말에, 설화는 손가락으로 진혁의 등 뒤에 자리한 컨테이너를 가리켰다.
“너, 저 천둥비룡이 어떤 건진 알고 입찰한 거야?”
“잘 알고 있다. 설마, 내가 백억이나 주고 쓰레기를 살 사람으로 보였던 건가?”
“뇌전의 힘도 쓰지 않는 서가에서, 천둥비룡이 필요하다고?”
진혁은 피식 웃었다.
“내가 그걸 말해 줘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그 말을 들은 그녀의 이마에 주름 하나가 더 새겨졌다.
“……너, 좀 재수 없어졌다.”
“할 말은 끝났나?”
“아니.”
말을 마친 설화는 안주머니에서 한 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진혁의 것처럼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지만, 서가의 것과는 달리 그녀가 꺼내 든 카드엔 하얀 오얏꽃이 새겨져 있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제안을 하나 하겠어.”
“제안?”
“내가 필요한 건 천둥비룡의 등뼈뿐이야. 나머지는 구워 먹건 삶아 먹건 내 알 바 아니고.”
진혁이 되묻자, 설화는 컨테이너 안에 가지런히 엎드려 있는 천둥비룡의 시체를 가리켰다.
“오십억. 등뼈만 넘겨주면 오십억을 줄게. 시세의 세 배 이상이란 건 너도 알겠지?”
말을 마친 그녀의 눈이 차갑게 번뜩였다.
‘이만하면 알아들었겠지.’
설사 알아듣지 못했다 해도 상관없었다.
이제 삼 품에 이르러, 이가의 엽사 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닌 그녀에겐 진혁을 압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니까.
‘저 약해빠진 놈이, 내 말을 무시할 수 있을 리 없어.’
결론은 이미 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그녀의 눈에, 금방이라도 천둥비룡의 등뼈가 잡힐 것처럼 어른거렸다.
허나.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뭐?”
진혁의 답은 그녀의 예상을 벗어났다. 설화의 곧은 눈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아니….. 시세보다 더 쳐주겠다니까?”
“그래서?”
“나한테 팔면 너도 이득, 나도 이득이잖아! 그냥 그 등뼈만 넘기면 된다고!”
대화를 이어 가던 그녀는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진혁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이건 내가 경매에서 정당하게 얻은 내 물건이다. 얼마를 더 쳐주든,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지.”
망자를 만들고자 하는 진혁에게 필요한 것은 천둥비룡의 온전한 시체.
비늘 하나도 아쉬울 판국에, 육체의 핵심인 등뼈를 내어 줄 리 없다.
“할 얘기는 끝났나? 그럼 이만 돌아가 줬으면 좋겠는데.”
뿌득!
순간, 설화가 이를 갈았다. 그녀의 새하얀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너, 진짜 이런 식으로 나올 거야? 내가 모를 것 같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나 엿 먹으라고 일부러 입찰한 거, 내가 모를 거 같냐고.”
그래, 틀림없다.
이 자식은 분명 내게 앙심을 품은 거야.
분노로 가득한 그녀의 눈엔 이미 진혁의 음습한 속내가 다 읽히는 것만 같았다.
“적당히 해, 서가에서 천둥비룡이 필요하다는 헛소리도 그만하고. 뭐, 사과라도 원하는 거야? 원한다면 얼마든지 해 줄 테니까, 이쯤에서 그만하자고.”
설화는 그만큼 절박했다.
‘지금 못 구하면, 언제 구할 수 있을지 몰라.’
병급의 괴수, 그중에서도 천둥비룡은 그만큼 희귀한 존재.
만약 오늘 천둥비룡의 등뼈를 얻지 못한다면.
‘가문을 벗어나는 게 늦어져 버려.’
그것만은 바라지 않았다.
사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릎이라도 꿇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지.”
진혁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이건 내가 낙찰받은 물건이고, 내가 네게 넘겨줘야 할 이유는 없다.”
할 말이 없다면, 이만 가 보지.
말을 마친 진혁은 몸을 돌려 천둥비룡을 향해 다가갔다.
그가 부른 세한의 수송팀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중에 곤란할 텐데?”
그녀, 설화가 입을 연 것은 그때였다.
“무슨 의미지?”
“말 그대로, 곤란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단 얘기지. 너건, 서가에게건.”
생기지 않겠다면, 생기게 만들어 주겠다는 의미.
누가 보더라도 분명한 협박이다.
‘어차피 저 녀석은 날 건들 수 없어. 서른이 다 되어서야 엽사가 된 머저리를 서가가 보호해 줄 리도 없고.’
내 제안을 거부할 거라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지.
생각을 마친 설화의 눈이 번뜩였다. 그녀의 눈에서 쏘아져 나가는 강력한 살기가 진혁의 피부를 찔러댔다.
“한심하군.”
진혁이 입술을 뒤틀기 전까지는.
“……뭐라고?”
“한심하다고 했다.”
조소하는 진혁의 혀가 신랄하게 움직였다.
“아직도, 내가 십 년 전의 그 머저리로 보이는 모양인데.”
스으으!
말을 마친 진혁의 눈에 귀기가 서렸다. 그의 동공에서 쏟아져 나오는 싸늘한 기운에 설화가 몸을 움찔했다.
“그러니 아직도 가문에 얽매여 있는 것이겠지. 십 년이 지났는데도 변한 게 없군.”
그 말을 들은 순간.
“이 개자식이……!”
설화의 머릿속에 가늘게 남아 있던 이성의 끈이, 뚝 하고 끊어져 버렸다.
철컥!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를 권총이, 어느새 진혁의 이마를 겨누었다.
“어디 한번, 똑같이 지껄여 봐.”
분노한 그녀의 눈이 붉게 타올랐음에도, 권총을 쥔 손은 조금의 움직임도 하지 않았다.
‘세총통인가.’
진혁은 자신을 겨눈 권총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뇌전을 다루는 이가의 상징, 마공학 병기 중 하나.
이가의 수많은 병기 중에선 약한 축에 속하지만, 무능력자의 머리통 정도는 가볍게 날려 버릴 수 있다.
“손님, 건물 내에서의 폭력 행위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말다툼을 지켜보던 직원이 놀라 소리쳤지만, 설화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왜 아무 말도 없어? 이제 좀 정신이 드나 봐?”
진혁이 아무 말 없이 서 있자, 설화는 비웃었다.
척!
진혁이 세총통의 총신을 손으로 쥔 것은 그때였다.
“쏴라.”
오른손으로 총신을 붙잡은 채, 진혁은 총구를 자신의 이마에 들이밀었다.
“감당할 수 있다면.”
또박또박 내뱉는 진혁의 눈에 푸른빛이 번뜩였다.
“……뭐?”
“이가의 운명을 네 손으로 끝내고 싶다면, 얼마든지 쏴도 좋다. 원하는 것 아니었나?”
말을 마친 진혁은 설화를 쏘아보며 입술을 뒤틀었다.
‘이 자식이…….’
순간, 방아쇠울에 걸린 그녀의 검지가 꿈틀댔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저 재수 없는 자식의 머리통에 바람 구멍을 내 줄 수 있으리라.
그럼에도 설화는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전쟁.’
그 두 글자가, 분노로 가득 차 있던 그녀의 머릿속에 이성을 불어넣었다.
그녀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서가와 이가는 전쟁에 돌입할 것이다.
오 대 엽사 가문 중 가장 강력한 둘의 전쟁.
불과 피, 재와 살점이 서울과 한국을 뒤덮으리라.
‘……빌어먹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녀가, 쉽사리 방아쇠를 당길 수 있을 리 없었다.
“…….”
침묵이 감돈다.
권총을 사이에 둔 채, 두 사람의 눈이 말없이 서로를 노려본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긴장이 주변을 가득 채워 나가던 그 순간.
“저, 저게 뭐야?”
직원의 당황한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노려보던 둘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저건 대체…… 설마?”
보라색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한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파직! 파지직!
그녀의 전신에서 푸른색 스파크가 튀어 오른다.
이가의 일원들이 다루는 번개의 마나가 가진 특징.
마나를 잔뜩 끌어 올린 설화는 진혁을 바라봤다.
“마나를 끌어 올려. 마인이 되기 싫으면.”
마인.
그 단어가 설화의 입에서 나오자, 진혁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