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19화 (19/174)

19화

이설화.

그녀와의 관계는 처음부터 썩 좋지 않았다.

서로가 원한 게 아닌, 가문의 의지에 따라 결정된 정략혼.

바라서 시작한 게 아니었으니, 친밀한 감정이 들 이유도 없다.

‘지금은 아무 사이도 아니지만.’

아니, 그보다 못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십 년 전 진혁이 쓰러졌을 때, 이설화의 가문인 이가에서는 일방적으로 파혼을 선언했으니까.

그 이후로 수도권을 양분하는 두 가문의 사이가 더욱 나빠졌다는 사실은, 그리 큰 비밀도 아니었다.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지.’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식물인간과 약혼을 유지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으리라.

식물인간이 아니었다 한들, 나약했던 진혁을 경멸하던 그녀가 약혼을 유지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고.

“……흥.”

그녀도 진혁과 마찬가지 생각일까.

진혁을 알아본 설화는 그대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그것은 진혁 또한 마찬가지.

‘상관없다.’

그가 굳이 여의도까지 온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까.

‘아마, 여기에 있겠지.’

진혁은 조금 전 받아 둔 카탈로그를 펼쳐 들었다.

고미술품과 희귀한 약재, 광물과 보석, 괴수의 부산물에 보구까지.

던전이나 게이트에서 발견된 것 중 돈이 되는 온갖 물건들이, 마법으로 만들어진 종이 위에 실시간으로 갱신된다.

진혁은 카탈로그의 [괴수] 부분을 펼쳤다.

[서리거인의 만년빙]

[장갑비룡의 비늘]

[바위하늘소의 뿔]

……

부산물을 포함해, 괴수와 관련된 온갖 진기한 물건들의 목록과 경매 정보가 종이 위를 빼곡하게 수놓았다.

하지만, 진혁이 찾는 것은 고작 부산물 따위가 아니었다.

‘온전한 시체가 필요하다.’

망자를 되살리기 위해선 영혼과 그릇이 필요하다.

영혼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으니, 남은 것은 영혼의 그릇이 되어 줄 육체를 구하는 것뿐.

‘비행형 괴수가 좋겠지.’

자신을 지켜 줄 가디언은 손에 넣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신과 망자로 이루어진 친위대를 가장 빠르게 나를 수 있는, 수송의 역할을 맡아 줄 괴수가 필요했다.

언제까지 성준을 트레일러에 꽁꽁 묶어서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다만, 여기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매물이 없군.’

카탈로그를 뒤적이던 진혁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턱을 긁적였다.

‘괴수의 온전한 시체가 그리 흔할 리 없긴 하지.’

던전이나 에피로나에서 괴수의 시체를 통째로 운반하는 것은, 시간과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괴수의 시체에서 돈이 될 만한 부분만 따로 추리고, 나머지는 그대로 버리는 것이 대부분.

‘정 어렵다면, 어보미네이션이라도 만들어야겠지만…….’

서로 다른 시체를 모아 만든 어보미네이션보다는, 온전한 시체를 사용하는 것이 좀 더 효율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진혁은 원하는 매물이 나타날 때까지 카탈로그를 끊임없이 뒤적거렸다.

다행히.

‘찾았다.’

한참 동안 카탈로그를 바라보던 진혁은, 원하는 매물을 발견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경매장소: 제2317호실]

[경매시간: 21:20]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진혁의 발걸음이 빠르게 움직였다.

고속승강기에 올라탄 진혁의 몸이 순식간에 빌딩의 위층으로 향했다.

[2317]

‘여기군.’

23층에 위치한 2317호실.

목적지를 발견한 진혁은 경매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제법 널찍한 경매장의 내부에는 여러 개의 테이블과 의자가 띄엄띄엄 놓여 있었다.

경매가 시작하기 직전이기 때문인지, 자리 대부분은 이미 차 있는 상태.

몇 남지 않은 빈자리 중 하나에 앉아 경매장을 천천히 둘러보던 진혁은.

‘……음?’

건너편에 앉은 검은 머리의 여성을 발견하곤 눈에 이채를 띄었다.

검은 머리를 땋아 옥빛 비녀를 꽂고, 입에는 담배를 문 한복차림의 여성.

이설화, 그녀였다.

‘설마, 같은 물건을 노리는 건 아니겠지.’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다.

이곳 2317호실에서만 스무 개가 넘는 물건들이 경매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진혁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그때.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경매장의 정면에 세워진 단상 위로 정장 차림의 남자가 올라왔다.

경매를 진행할 경매사였다.

“지금부터, 경매를 시작하겠습니다.”

그의 말과 함께, 경매가 시작되었다.

*    *    *

이설화.

한국을 대표하는 오 대 엽사 가문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가의 장녀.

‘후.’

그녀가 여의도에서 가장 거대한 엽사 경매장, 아르카나에 온 이유는 단 하나였다.

‘드디어, 천둥비룡의 등뼈를…….’

병급의 괴수, 천둥비룡의 등뼈는 금보다 높은 전도율을 지닌 데다 주입한 마나를 증폭시킨다.

얼마 전 삼 품에 올라 새로운 보구가 필요했던 그녀에게, 천둥비룡의 등뼈는 완벽한 재료.

하지만 던전은커녕, 게이트 너머 에피로나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천둥비룡의 등뼈를 얻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매물만 있었으면, 굳이 통으로 살 필요도 없었을 텐데.’

그녀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허나,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음 기회는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른다.

‘가문의 손에서 벗어나려면, 게이트 밖으로 나가야 해.’

자신이 처한 상황이 떠오르자, 설화의 눈썹이 찌푸려진다. 저도 모르게 입에 문 곰방대를 잘근잘근 씹어댄다. 그제야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다.

그때.

“다음은 경매번호 제2317―726번, 천둥비룡의 온전한 사체입니다. 시작가는 십억 원, 호가는 오천만 원입니다.”

‘드디어.’

애타게 기다리던 물품이 경매에 오르자 설화의 눈에 힘이 들어간다.

“십억 오천, 십억 오천 나왔습니다. 십일 억 없으십니까? 십일 억, 십이 억…….”

천둥비룡을 노리는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는지, 경매에 참석한 엽사들이 손을 들어 올릴 때마다 금액이 가파르게 올라간다.

입찰가가 순식간에 이십억을 넘어 삼십억에 다다를 때 즈음.

‘지금이야.’

그녀, 이설화는 조용히 손가락 다섯 개를 들어 보였다.

“오십억, 오십억 나왔습니다.”

순간.

미친 듯이 올라가던 입찰가가 뚝, 하고 멈춰 버렸다.

그 사이에서, 오십억을 부른 설화의 입가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천둥비룡의 사체는 사십오억 정도가 적정가거든.’

이날을 위해 모아 둔 돈이다.

천둥비룡의 등뼈로, 그녀를 위한 보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게이트 너머에서 활동하기엔 충분해.’

그것으로, 그녀의 꿈은 이루어진다.

“오십 억, 오십 억. 더 없으십니까? 하나, 둘…….”

‘됐어.’

낙찰을 확신한 설화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은 채, 그녀는 경매사의 입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32번 고객님께서 오십일억!”

하지만, 경매사의 입에서 나온 것은 낙찰 선언이 아니었다.

“……뭐라고?”

순간, 설화는 입에 문 곰방대를 떨어트릴 뻔했다. 놀란 그녀의 눈이 토끼처럼 커졌다.

‘어떤 자식이야?’

그러면서도, 그녀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올린다.

“17번 손님, 오십이억 나왔습니다!”

경매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설화는 몸을 돌려 자신의 경쟁자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곧.

“32번 손님께서 오십삼억! 오십삼억 나왔습니다!”

“아니…….”

손을 번쩍 들어 올린 서진혁을 발견한 설화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저 자식이 왜?’

이가도 아닌 주제에, 천둥비룡은 왜?

‘뭘 노리는 거야?’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이대로 눈 뜨고 천둥비룡을 뺏길 수는 없는 일.

“17번에서 오십사억!”

“32번에서 오십오억!”

경매사의 흥겨운 목소리와 함께 입찰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장내에 자리한 엽사들의 뜨거운 시선이 쉴 새 없이 호가를 부르는 둘 사이를 오간다.

하지만, 끝을 모르고 이어지던 입찰 경쟁은 서서히 끝을 고하고 있었다.

‘젠장, 이제 슬슬 한계란 말야.’

설화가 지금까지 모아 둔 돈의 액수는 백억 원.

물론, 정말로 천둥비룡의 시체를 백억이나 주고 살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보구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는 천둥비룡의 시체 말고도 많았으니까.

이미, 경매는 그녀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설마 저 자식, 나 엿 먹이려고 일부러?’

자신과 진혁의 사이는 썩 좋지 않다.

아니, 그냥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유로운 삶을 원하는 그녀에게, 서가의 나약한 장남은 발목에 채워진 족쇄일 뿐이었으니까.

‘그래, 어디 죽어 보자.’

결국,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

“백억! 17번 손님께서 백억을 부르셨습니다!”

이제, 더는 무리다.

이미 적정가의 두 배를 넘어선 가격.

여기서 더 큰 지출을 하려면 가문의 힘을 빌려야 한다.

‘빌어먹을.’

쓰린 속을 억지로 달래며, 설화는 진혁을 노려봤다.

이미 삼 품의 엽사인 그녀의 살기 담긴 눈빛을 정면으로 받고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더 올리면 가만 안 둔다, 진짜.’

“백일억, 백일억 없으십니까?”

그녀가 백억을 부르자, 더 이상의 입찰은 없었다.

경매장의 분위기는 이미 달궈질 대로 달궈진 상태.

분위기에 취한 경매사의 눈과 입이 바쁘게 움직인다.

“하나, 둘…….”

‘그래, 그대로 가만히 있어.’

그녀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이대로 경매가 끝나고, 천둥비룡을 낙찰받는 것.

설화의 눈빛이 진혁을 위협하듯 날카롭게 번쩍였다.

진혁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린 것은 그때였다.

그녀의 살기 어린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 낸 채.

씨익.

진혁은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지금, 비웃었어?’

그 의미를 깨달은 설화가 분노를 터뜨리기도 전.

“백일억, 백일억 나왔습니다! 32번 손님께서 백일억!”

손을 들어 올린 진혁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제법 많이 썼군.’

고작 괴수 시체 한 구에 백일억이라니.

경매가 이렇게까지 치열하게 진행될 거라곤, 진혁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이설화와 경쟁하게 될 줄이야.’

다행히 낙찰받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못했다면 진혁은 아르카나에 한 번 더 찾아와야 했으리라.

―소인, 처자의 눈빛을 봤소. 눈에 살기가 가득한 것이 심상치 않았소.

―분명히 나중에 해코지하러 올 거라니까요? 빨리 나가요.

자신을 따라온 두 망령, 자이츠와 멜리나가 호들갑을 떨었다.

진혁은 그들의 말에 동의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천둥비룡의 시체는 그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얻을 가치가 있었다.

‘시체를 인수한 다음, 칠성원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

“서진혁 님, 물건을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자신을 안내해 준 직원의 말에, 진혁은 사색을 멈추고 앞에 놓인 거대한 컨테이너의 내부를 바라봤다.

‘천둥비룡.’

총 길이 십이 미터의, 푸른 비늘로 전신을 감싼 병급의 괴수.

녀석의 시체가, 컨테이너 안에서 자는 듯이 엎드려 있었다.

“들어가도 되나?”

“물론입니다.”

직원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그는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가 천둥비룡의 시체를 살폈다.

‘상처가 좀 많은 편이긴 하지만, 장기와 뼈는 멀쩡하다.’

시체의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망자로 부활시키는 데 문제는 없으리라.

“확인이 끝나셨다면, 대금을 지불해 주시겠습니까?”

진혁은 직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갑에서 검은색 카드를 꺼내 들었다.

세한카드에서 발급된, 서가의 직계가족에게만 주어지는 한도 무제한의 블랙카드.

물론, 진혁의 것은 아니었다.

‘액수를 보면 놀라 자빠지겠군.’

결제문자를 보고 길길이 날뛸 동생의 모습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야, 서진혁.”

등 뒤에서 누군가가 진혁을 부른 것은 그때였다.

‘이건.’

익숙한 목소리.

진혁은 카드를 건네주려다 말고, 몸을 돌려 자신을 부른 상대를 바라봤다.

“우리, 이야기 좀 하지?”

곰방대를 입에 문 채 눈가를 일그러뜨린 그녀가, 진혁을 싸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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