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세한빌딩의 93층, 회장실.
오직 회장의 허락을 받아야만 발을 들일 수 있는 이곳에, 한 명의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그녀의 전신은 어두운 색의 정장으로 꽁꽁 싸매여 있었지만, 뿜어져 나오는 날카로운 기세를 감추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당당한 걸음으로 회장실의 한복판을 가로지른 그녀는 곧장 자신을 부른 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찾으셨습니까, 회장님.”
서강진.
세한그룹, 그리고 서가의 정점에 선 자.
“그래. 오랜만이야, 신 팀장. 근 한 달 만인가?”
“사십팔 일 지났습니다.”
“……딱딱하기는, 쯔쯔.”
주연의 말에 강진은 작게 혀를 차고는,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래, 진혁이 놈은 어떻게 지내나?”
“현재 성인식 준비를 위해 세한금속 제1 공장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경호에 문제가 생길 우려가 있어 본가로 돌아오시는 것을 권유했습니다만, 거절했습니다.”
“아니, 그런 거 말고. 거기서 뭘 하고 있냔 말일세.”
“……자세한 사항은 저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만, 탐욕고에서 획득한 식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식귀라.”
“공장 안에서 식귀와 진혁 님이 함께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주연의 설명은 일목요연했지만, 강진에겐 그다지 만족스런 대답이 아니었다.
“서가의 장손이란 놈이 괴수 등 뒤에 숨어 있다니, 쯧.”
애당초, 강진은 진혁이 탐욕고에서 다른 보구가 아닌 괴수를 택했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구보다 선봉에서 싸워 온 서가의 핏줄이 누군가의 등 뒤에 숨는다는 것 자체가,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작업에 글리펜 사장이 함께한다고 합니다.”
“……어르신이?”
이어지는 주연의 말에, 강진은 조금 흥미가 동했다.
“진혁 님께서 머문 뒤 해체했던 마법 고로 설비를 다시 설치했다고 합니다. 그 뒤에도 함께 활동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흠.”
보고를 들은 세한의 회장은 생각에 잠겼다.
수백 살 먹은 노괴물을 끌어들일 만한 무언가가, 자신의 장남에게 있었던가?
‘……모르겠군.’
십 년 동안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 그의 아들은 대체 무엇을 얻은 것일까.
그건 알 수 없었지만.
“나름 준비를 하는 듯하니, 조금은 도와줄 필요가 있겠어.”
강진은 하나의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이번 초렵식은 외부에 공개한다. 진혁이 놈에겐 그렇게 전해.”
“……본래는 비공개이지 않습니까?”
“마음이 바뀌었다.”
정말로 그만한 잠재력이 있다면, 시험해 봐도 문제가 되진 않을 터.
‘멍석 정도는 깔아 주마.’
보여 줄 게 있다면 어디, 세상에 보여 봐라.
장남을 떠올린 중년의 입꼬리가, 날카롭게 솟아올랐다.
* * *
진혁의 초렵식은 하남의 대형 쇼핑몰 인근에서 치러졌다.
사흘 전 생성된 게이트로 인해 쇼핑몰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지 오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이트가 열린 강변의 공원 주변은 수많은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당연히, 이 자리에 모인 자들 모두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화랑에 프레스티지, 한울……수도권에서 이름난 길드는 다 모인 모양인데.”
인천에서 작은 길드를 운영하는 사 품의 엽사, 주강민은 주변을 둘러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의 동료 박범진이 손을 저었다.
“수도권뿐만이 아니에요. 부산이랑 전주 애들에…… 저건 윤가 아닌가? 오 대 가문 쪽에서도 왔어요.”
“하긴, 십 년 만에 공개하는 서가의 초렵식이니 몸이 달아 있을 만도 하지.”
“거기다, 오늘 초렵식을 치르는 사람이 소문의 그 사람이잖습니까. 궁금할 만도 하죠.”
“뭐, 우리도 그래서 온 거긴 하지만.”
동료의 말에 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식물인간이 되었다 십 년 만에 깨어난 서가의 장남이, 다시 성인식에 도전한다.
그것도 공개 행사로.
자연히 궁금증이 일 수밖에 없었다.
“십 년 동안 누워 지냈으면, 실력은 좀 떨어지겠어.”
“뭐, 큰 기대는 하면 안 되죠. 준비 기간이 두 달밖에 안 됐다던데요?”
“그럼 우리한테 별 도움은 안 되겠는데. 안면이나 터 볼까 했더니.”
“에이, 그건 모르는 일이죠. 혹시 압니까? 나중에 저 장남이 회장이 될지?”
“서른 다 돼서 초렵식을 치르는데 회장은 무슨. 가문에서 퇴출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지.”
강민은 범진의 말에 콧방귀를 뀌고는, 자리를 채운 엽사들의 면면을 살폈다.
이미 안면이 있는 사람도 있었고 없는 사람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수도권의 절반을 관할하는 가문의 행사니,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운이 좋아 서가의 인물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다면, 인천 구석에 간신히 자리를 잡은 자신들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생길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강민은 두 눈으로 주변 엽사들의 면면을 쉴 새 없이 살폈다.
그러던 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저건 웬 트레일러야?”
부르르릉!
게이트를 향해 달려오는 거대한 트레일러.
“뭐, 뭐야?”
“조심해!”
우렁찬 엔진 소리와 함께 달려오는 화물차를 발견한 엽사들은 황급히 좌우로 몸을 피했다.
구경꾼의 한가운데를 쌩하니 지나친 트레일러의 종착지는, 거대한 게이트의 바로 앞.
그리고.
“……뭐야, 저게?”
강민을 포함한 엽사들은, 정지한 트레일러 뒤에서 몸을 일으키는 거인을 보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발목에는 두 자루의 단검을, 등에는 장검과 방패를. 허리춤에는 채찍을 찬 검은 거인.
머리에 은색의 투구를 쓰고, 두 손은 금속 건틀렛처럼 검게 빛나는 모습이 마치 갑옷을 차려입은 중세기사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거인의 정체를 눈치챈 엽사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식귀가 왜…….”
중무장한 채 낮게 으르렁대는 정급의 괴수.
식귀의 등장과 함께, 소란스럽던 군중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딸깍!
트레일러를 뒤따라온 검은 세단에서 누군가가 내린 것은 그때였다.
“십 년 만인가.”
오늘의 주인공, 서진혁이었다.
* * *
“무급 던전, 확인했습니다.”
게이트에 측정기를 들이댄 직원의 말에, 진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를 돌아봤다.
자신보다 족히 몇 배는 거대한 덩치를 지닌 식귀 너머로, 초렵식을 참관하러 온 수많은 엽사들과 세한보안의 직원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선 이.
‘아버지.’
진혁은 세한의 회장, 서강진과 눈을 마주쳤다.
‘여전하시군.’
아버지의 무미건조한 눈빛을 잠시 응시하던 그는, 다시 몸을 돌려 게이트를 바라봤다.
우웅―!
어지간한 건물보다 거대한 크기를 지닌 차원의 틈.
던전의 입구가 반투명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정말, 멀리 돌아왔군.’
십 년 만의 던전 토벌이었지만, 진혁의 표정엔 일말의 긴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령술사의 정점에서 수많은 망자들을 부려 왔던 그에게, 성인식 따위는 한낱 통과 의례일 뿐.
‘가지.’
―예, 진혁 님.
쿵! 쿵!
장비를 갖춘 진혁이 앞서 나가자, 그 뒤를 식귀, 성준이 따라나섰다.
곧.
풍덩!
둘의 몸이 게이트를 넘어선 순간.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조금 전과는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시작이군.”
진혁은 주변을 둘러봤다.
드넓은 공원과 그 앞을 흐르는 한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회색 절벽 사이로 난 골짜기만이 그의 앞을 가리고 있었다.
―이제야, 던전에 들어왔군요……. 죽어서야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뒤이어 모습을 드러낸 식귀, 성준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감격에 찬 표정을 지었다.
“진짜는 이다음이다.”
그 모습을 본 진혁이 핀잔을 놓고는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그의 앞에 선 계곡을 막고 있는 것은, 허리께에나 올 만한 작은 관목들.
물론, 평범한 나무는 아니었다.
‘나무 걸음.’
작은 나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나무와는 달리 뿌리를 다리처럼 이용해 걸어다닐 수 있는 무급의 괴수.
―드디어…… 괴수 놈들을…….
은빛 투구를 쓴 식귀, 성준의 눈빛이 바뀌었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던 식귀는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
스으으―!
전신으로 새어 나오는 살기와 함께, 괴수의 전신에 들어찬 근육과 흑마력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꾸득! 꾸드득!
마치 과수원처럼 줄지어 늘어서 있던 나무 걸음의 뿌리와 가지가 기괴한 소리와 함께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
뿌리를 밖으로 드러낸 수십 그루의 나무들이, 둘을 향해 천천히 다가온다.
가장 약한 무급의 괴수라지만, 다수의 적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
하지만 진혁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성준, 약속한 날이 되었다.”
진혁의 손가락이, 저 멀리서 가까워져 오는 나무들을 가리켰다.
“맘껏 날뛰어라.”
―……뜻대로.
스릉!
주인의 명령에, 발목에서 두 자루의 단검을 뽑아 든 식귀가 앞으로 나섰다.
* * *
진혁이 토벌을 시작한 지 정확히 삼십 분.
‘십 년 전과는 다르겠지.’
시계를 확인한 주연은 여전히 반투명하게 일렁이는 게이트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무급 던전을 수호하는 수호 괴수는 정급.
정급 중에서도 강력한 편에 속하는 식귀가 함께 들어갔으니, 토벌에는 문제가 없으리라.
다만.
‘얼마나 걸리느냐……인가.’
초렵식을 치르는 던전은 모두 무급으로 동일하다.
여기에서, 초렵식을 치르는 엽사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다름 아닌 토벌 시간.
‘지금까지의 최고 기록은 서강진 회장님의 53분 32초.’
던전은 일종의 아공간.
그 내부는 숲일 수도, 바다일 수도, 산일 수도 있지만 공통적으로 상당한 넓이를 자랑한다.
그 안에 가득 들어차 있는 괴수들을 한 호흡에 토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간중간 휴식과 재정비를 거쳐, 짧게는 반나절에서 길게는 하루 종일도 걸리는 것이 던전 토벌.
그렇기에, 세한의 현 회장이 세운 기록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은 불멸의 기록이다.
‘식귀가 있으니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기록을 깰 순 없겠지.’
그녀뿐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리라.
‘기다릴 동안 호위 계획이나 짜 둬야겠는걸.’
그렇기에, 주연은 게이트에서 잠시 시선을 거두고는 손에 쥔 태블릿PC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녀가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도 전.
와아아아아―!
‘뭐지? 설마…….’
귓가를 가득 채운 군중들의 환호성에, 주연은 숙였던 고개를 다시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말도 안 돼.”
던전으로 통하는 게이트를 바라본 그녀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크아아아!”
허공에서 일렁이던 거대한 차원 문은 사라진 지 오래.
던전으로 향하는 게이트가 있던 자리에 대신 남은 것은, 한 사람과 한 괴수뿐이었다.
거대한 식귀의 손에 들린, 던전을 지탱하는 결계석의 조각과 괴수의 부산물을 담아 둔 거대한 자루.
그 사실이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토벌이 끝났다고? 벌써?’
순간, 주연의 시선이 오른쪽에 선 남자에게로 향했다.
“바, 박 대리!”
“네, 팀장님.”
“토벌 시간, 재 놨지? 몇 초야?”
평소답지 않게 당황한 주연이었지만, 그녀 못지않게 당황한 박 대리는 그 사실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적어 둔 토벌 시간을 몇 번이고 확인한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토, 토벌까지 43분 12초……입니다.”
“……맙소사.”
신기록.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주연은 한동안 말을 이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