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게이트가 열린 지 약 일백 년.
게이트 너머의 이계가 일상으로 받아들여진 지도 수십 년이 지났지만, 괴수는 여전히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다.
순수한 파괴로 가득한 본능, 그리고 그 본능을 실행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괴수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
하지만.
“크으으으.”
요 며칠 사이, 세한금속의 사람들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을 마주하고 있었다.
“아니, 저걸 저렇게 나른다고?”
“식귀가 힘으로는 병급하고도 비벼 볼 수 있다잖여. 무슨 크레인 따위랑 비교가 되겠어?”
“살면서 괴수가 짐 나르는 걸 볼 줄이야…….”
묵묵히 무거운 철강이나 기계 따위를 나르는 검은 피부의 목 없는 괴수란, 그 자체로 신기한 구경거리일 수밖에 없다.
그 모습이 얼마나 신기한지, 수없이 많은 괴수들과 싸워 온 엽사들도 눈을 흘깃거리며 괴수의 행동을 훔쳐볼 정도.
―진혁 님, 대체 언제까지 짐만 날라야 하는 겁니까?
물론 짐을 나르는 식귀, 성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제가 원한 건 괴수들과 싸우는 것이지, 짐꾼이 아닙니다.
졸지에 세한금속의 짐꾼이 되어 버린 성준의 한숨이 진혁의 머릿속으로 전해졌다.
‘육체에 빠르게 적응하려면 필요한 훈련이다.’
―……이 짐꾼 일이 말입니까?
‘인간과 식귀의 육체는 움직임부터가 다르다. 거기에 마기를 사용하던 육체가 흑마력을 사용하도록 바뀌었으니 힘을 다루는 법도 다를 테고. 이런 걸 배우는 데 일상적인 활동만큼 도움되는 게 없지.’
진혁에겐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스칸의 망령군주, 파슬란 역시 이와 마찬가지 일을 해 왔으니까.
생전과 전혀 다른 육체를 사용하게 된 망령들이 빠르게 적응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보상도 나쁘지는 않다만.’
약간의 노동력을 빌려주는 대가로, 진혁은 글리펜에게 세한금속에서의 숙박을 포함한 몇 가지 혜택을 얻어 낼 수 있었다.
물론, 성준에겐 비밀이었지만.
‘식귀 내부의 흑마력을 적절히 운용하는 것도 잊지 마라. 나중에 괴수와 싸울 때 도움이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크으으.
긴가민가한 말투로 철근을 나르는 식귀.
녀석을 잠시 바라보던 진혁은, 발걸음을 돌려 공장 입구로 향했다.
그곳에서 있는 것은, 한 대의 세단과 한 명의 사람이었다.
“진혁 님.”
진혁의 호위를 맡은 호위 3팀의 팀장, 신주연이었다.
검은 정장을 곱게 차려입은 그녀의 눈에, 어떤 결의가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당분간 찾아올 필요는 없다고 했을 텐데.”
진혁은 돌아가란 말을 돌려서 했지만, 주연은 고개를 저었다.
“이만 칠성원으로 돌아가십시오.”
그것이, 그녀가 찾아온 이유였다.
“세한그룹의 장자인 진혁 님을 노리는 사람들은 두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본가 안에서라면 어떻게든 진혁 님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만, 이곳에선 어렵습니다.”
‘아무리 후계자 후보가 아니라고 해도.’라는 앞말은 굳이 붙이지 않았다.
진혁뿐만 아니라 수많은 서가의 식솔들을 호위해야 하는 3팀의 팀장으로서, 최중요 인물인 그가 외부에 나와 있는 것은 썩 좋은 일이 아니었다.
“흠.”
하지만 진혁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진혁을 향해, 주연은 다시 한번 설득을 시작했다.
“진혁 님께서 어떤……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아직 초렵식도 치르지 못하신 것 역시 사실이지 않습니까.”
탐욕고의 삼 층을 통과한 서가의 장남이지만, 아직 초렵식을 통과하지 못한 엽사 후보생.
서가의 적들이 보이게, 진혁은 슬쩍 찔러만 봐도 서가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취약점이었다.
그녀가 보기에, 진혁의 존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존재.
한시라도 빨리 본가로 데려가서 보호해야 했다.
“세한과 가문을 위해서라도, 부디 본가로…….”
“웬 놈이 우리 진혁이를 건드려?”
진혁을 설득하려는 그녀의 말을 끊은 것은, 진혁을 쫄래쫄래 따라온 난쟁이, 글리펜이었다.
“사장님.”
“왜, 강진이 놈이 데려오라 그래?”
“그건 아닙니다. 걱정하고는 계십니다만…….”
세한의 회장을 이놈 저놈 하며 부르는 난쟁이의 정체를 잘 알고 있는 주연은 급히 고개를 숙였다. 주연의 대답에 글리펜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진이 놈에겐 진혁이가 나랑 잠깐 있어야 한다고 전해. 중요한 일이 있다고.”
“중요한…… 일 말입니까?”
“그래.”
중요한 일이라니.
세한의 장비를 책임지는 장인이자 독립전쟁의 영웅인 글리펜이 중요하다고 칭할 만한 일이, 대체 뭐란 말인가.
‘그리고, 그걸 진혁 님과 한다고?’
단순히 진혁을 본가로 데려올 생각뿐이었던 그녀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진혁 님의 안전이…….”
물론, 그렇다 해서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지만.
“왜, 내가 못 미덥기라도 해? 세한금속에서 녀석이 다치기라도 할까 봐?”
“……그건 아닙니다.”
독립전쟁의 영웅을 의심할 수는 없는 노릇.
“그러면, 그 일을 마치고 나면 모시러 오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주연은 소득 없이 빈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마침 곤란하던 참이었는데,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멀어져 가는 자동차에서 시선을 뗀 진혁이 글리펜을 향해 슬쩍 고개를 숙였다. 글리펜은 어깨를 으쓱했다.
“밥값 정도만 해 주는 거야. 그리고, 그 일도 해야 하니까.”
말을 마친 난쟁이가 두 손을 싹싹 비볐다. 그의 몸은 조금 전과 달리 기대감으로 한껏 달아올랐다.
“준비는 얼마나 진행된 겁니까?”
“아다만티움을 녹이려면 특수하게 설계된 마법고로가 필요한데, 요 근래 쓸 일이 없어서 철거했었거든. 늦어도 내일이면 설비를 다시 설치할 수 있을 거야.”
“내일이라면, 얼마 남지 않았군요.”
글리펜의 대답에, 진혁 역시 만족스런 표정을 얼굴에 띄웠다.
이 작업은, 그가 굳이 본가로 돌아가지 않고 세한금속에서 머물고 있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으니까.
“그래, 근데 진혁이 너…….”
“네.”
“정말 할 수 있겠냐?”
난쟁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찝찝한 표정을 짓자, 진혁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르신. 방법은 이미 숙지하고 있으니까요. 지난번에도 설명드리지 않았습니까.”
“뭐, 그건 그렇지.”
진혁의 말에, 이미 그 방법을 상세히 전해 들었던 글리펜은 고개를 끄덕였다.
‘십 년 동안 누워만 있던 놈이 어디서 그런 술법을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면 분명…….’
굉장한 일이 될 거야.
성공했을 때의 결과를 떠올린 그의 입가가, 저도 모르게 씰룩였다.
“그럼, 내일 고로를 설치하는 것까지만 좀 도와 달라고. 뭐, 진혁이 네가 직접 하는 건 아니지만.”
“물론입니다.”
“크으으으.”
말을 마친 둘의 고개가 한 묶음의 철근을 가볍게 나르고 있는 식귀에게로 향했다.
그러면서도.
‘흠.’
진혁의 시선은 공장의 담장 너머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 * *
달빛이 차갑게 내리쬐는 새벽.
본래는 24시간 3교대로 돌아가는 공장이지만, 오늘의 세한금속은 다음날의 설비공사를 위해 잠시 문을 닫은 상태.
타탓!
정체불명의 사내가 공장의 담벼락을 넘어온 것은, 자정을 지나 일출이 가까워 올 때였다.
전신을 검은색의 침투복으로 가린 남자는 담장을 넘자마자 소리 없이 앞으로 내달렸다.
그것은 분명, 무음보(無音步)라는 이름의 기술.
평범한 엽사들이 익히는 종류의 기술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발소리 하나 없이 공장 안까지 뛰어 들어온 그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잠겨 있는 공장의 문 앞에 도달했다.
사내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낸 것은 그때였다.
주먹만 한 크기에 온갖 기하학적 문양이 새겨져 있는, 수정으로 이루어진 정육면체.
툭.
검은 옷의 남자는 조심스럽게 바닥에 정육면체를 내려놓은 다음, 자신의 몸에서 마나를 끌어 올렸다.
순간, 어떤 징조도 없이 공장 내부의 보안을 책임지는 마법 결계의 동작이 끊어졌다.
‘됐어.’
마법 결계가 멈췄다는 것을 확인하기 무섭게, 사내는 곧장 품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 휘둘렀다.
서걱!
공장의 정문을 칭칭 감아 놓은, 역시나 강력한 보호 마법이 걸려 있었던 쇠사슬이 무 베듯 잘려 나간다.
침입자는 바닥으로 쏟아지는 쇠사슬을 소리가 나지 않게 받아 들고는, 오러가 서린 단도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로 문을 잘라 내고는 공장 안으로 들어섰다.
‘저기 있군.’
공장에 들어선 침입자가 눈을 빛냈다.
공장 한 편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마치 흑진주처럼 생긴 금속 구체.
‘초금속, 아다만티움.’
분명, 그가 오늘 목표한 물건이 틀림없었다.
‘아다만티움을 이렇게 방치해 둘 줄이야.’
분명 공장의 보안상태를 믿고 대충 아무렇게나 놓아 둔 것이 분명했지만.
‘경비도 없는 걸 보니, 이런 상황을 생각도 못 한 모양인데.’
프레이야의 눈물.
발동한 순간 반경 내의 모든 마법진을 무력화시키는 무(戊)급의 보구.
그 시간이 채 일 분도 되지 않는 데다 일회용이라는 단점이 있었지만, 한달음에 수십 미터를 넘을 수 있는 그에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럼, 이제 저걸 챙기기만 하면…….’
앞으로 사십 초도 남지 않았다.
단숨에 아다만티움을 챙겨 달아나기 위해, 그의 마나홀에 모여 있던 마나가 두 다리로 향했다.
두 번의 도약이면, 모든 것이 끝나리라.
그는 마나를 가득 모은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아니, 주려고 했다.
‘무슨…….’
두 다리가 그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젠장, 갑자기 왜 이래?’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발바닥을 본드로 붙여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두 다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거기다,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정체불명의 한기는 대체 뭐란 말인가.
‘이제 삼십 초도 남지 않았어. 빨리…….’
시간이 얼마 없었다.
당황한 그는 어떻게든 움직이려 애를 썼지만, 다리는 여전히 요지부동.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크으으으.”
쿵! 쿵!
누군가의 으르렁대는 소리와 함께, 지축을 울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이윽고.
“……식귀?”
그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어째서, 괴수가 공장에?’
그럴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온몸이 시커먼 식귀가 자신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왔다.
‘아, 안 돼.’
평소라면 손쉽게 제압했을 상대지만, 발이 완전히 묶여 버린 지금은 다르다.
힘만큼은 병급의 괴수와도 견줄 수 있는 괴수를, 어떻게 정면에서 상대한단 말인가.
콰직!
그의 눈앞에, 식귀의 거대한 주먹이 자신을 찌부러트리는 모습이 환상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 아아…….’
그것이, 남자가 본 마지막 모습이었다.
* * *
―진혁 님, 침입자가 기절했습니다.
“생각보다 겁이 많군.”
홀로 겁에 질려 쓰러진 침입자.
그리고 침입자의 발목을 붙잡은 두 망령을 내려다보며,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