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뭐야, 싸움이야? 하여간, 문휘 놈 핏줄 아니랄까 봐, 쯔쯔.”
진혁과 상혁. 두 형제의 말다툼을 지켜보던 글리펜이 혀를 찼다.
“어르신.”
고개를 젓던 그에게 먼저 말을 건넨 것은 진혁이었다.
“왜?”
“증인이 되어 주시죠. 어르신께서도 저희 가문의 규율에 대해 아시지 않습니까.”
“나보고 증인을 서라고?”
“어르신 정도라면 자격은 충분한 것 같습니다만, 그렇지 않나?”
“어르신이라면 저도 믿을 수 있습니다.”
진혁이 고개를 돌려 묻자 상혁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가의 초대 가주 서문휘의 동료이자, 이제는 몇 남지 않은 독립전쟁의 생존자 중 하나.
서가의 역사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그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찾기 힘들 것이다.
“흠…….”
“내키지 않으시면 다른 사람을 알아보겠습니다.”
“아냐, 아냐. 마침 심심했는데 잘됐어.”
진혁의 말에 글리펜은 고개를 저으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책상과 비슷한 키의 난쟁이가 뒤뚱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그럼, 장소는 공장 앞마당으로 하지. 거기라면 딱히 걸리적거릴 건 없을 테니까. 따라오게.”
그 말과 함께 난쟁이는 사장실 문을 나섰다. 진혁과 상혁, 두 형제가 뒤를 따랐다.
―진혁 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진혁의 뒤를 쫓던 성준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진혁이 되물었다.
‘뭐가 괜찮냐는 거지?’
―아시겠지만, 서상혁 전무는 삼 품의 엽사입니다.
삼 품의 엽사는 스스로가 원정대를 꾸려 게이트 너머로 나설 수 있는 존재.
게이트 너머의 세계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생각해 본다면, 그의 강함은 의심의 여지 없는 진짜였다.
아직 초렵식조차 치르지 못한 진혁과는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였으니, 성준이 걱정하는 것도 당연한 일.
하지만 진혁은 피식 웃었다.
‘설마, 나를 의심하는 것인가?’
―죄송합니다. 그럴 의도는…….
주인의 말에 성준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진혁의 주변을 빙빙 맴돌았다. 그 모습을 보던 진혁은 가볍게 한마디를 던졌다.
‘내가 직접 나서지는 않을 거다. 이 몸으로 삼 품의 엽사를 직접 상대할 수는 없으니까.’
―그, 그럼…….
대체, 누가 삼 품의 엽사와 맞붙는단 말인가.
주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성준이 말들 더듬었다.
‘이번 결투에선, 대전사를 내보낼 거다.’
―대전사…… 말입니까?
―그래.
진혁의 시선이 성준에게로 향했다.
‘성준, 네가 내 대전사다.’
―……네?
한동안, 망령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 *
글리펜의 말대로, 공장의 앞마당은 제법 널찍한 편이었다.
평소라면 공장에서 생산되는 상품을 실어 나르기 위해 수많은 트럭들이 앞마당을 드나들었겠지만, 지금은 사장인 글리펜의 지시에 의해 중단된 상태.
세한그룹을 지배하는 서가의 규율 앞에선 자회사인 세한금속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어때, 이만하면 쌈박질하기엔 충분하지?”
멀찍이서 스마트폰을 꺼내 든 글리펜이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쌈박질이 아니라 결투입니다.”
“그거나, 그거나. 둘이서 한바탕하는 건 똑같잖아?”
진혁이 그의 말을 정정해 주었지만, 글리펜은 콧방귀를 뀌며 스마트폰을 앞으로 내밀었다. 동영상이라도 찍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진혁은 세 번을 공격하고, 상혁은 세 번을 막는다. 상혁이 한 발짝이라도 뒤로 물러나면 진혁의 승리, 그렇지 않으면 상혁의 승리. 자, 이제 잔말 말고 붙기나 해!”
삑!
대결의 규칙을 간단히 설명한 난쟁이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녹화 버튼을 눌렀다.
“형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괜히 몸 상하기 전에 포기하시죠.”
대결의 시작과 함께 진혁의 반대편에 선 동생, 상혁이 자신만만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의 전신을 뒤덮고 있는 근육이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꿈틀댔다.
“내 몸이 상할 일은 없을 것 같다만.”
동생의 도발에, 진혁은 짧게 답했다. 상혁은 콧방귀를 뀌었다.
“형님, 설마 십 년 동안 누워 있으면서 칠성무를 잊어버리기라도 한 겁니까?”
말을 마친 상혁의 눈빛이 변한다.
그를 중심으로 공기의 흐름이 뒤틀린다.
정확히는, 그의 마나홀을 중심으로.
고오오오―.
꿈틀거리는 근육에 맞추어 주변의 대기가 진동한다.
이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상혁의 마나홀을 가득 채운 초에너지, 마나.
이윽고.
우웅!
상혁의 구릿빛 피부 위로, 투명한 빛을 내뿜는 막 하나가 덧띄워졌다.
동생의 몸을 감싼 정체 모를 장막의 정체가 무엇인지, 칠성무를 수련했던 진혁은 잘 알고 있었다.
‘반탄벽.’
적의 공격을 피해 없이 막아 낼 뿐 아니라, 일부를 되돌려 공격한 적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공방 일체의 기술.
칠성무가 상급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부터 사용할 수 있는 고급의 기술이다.
동생이 아직 초렵식도 치르지 못한 자신의 앞에서 굳이 칠성무의 상급 기술을 펼친 이유는 분명했다.
‘시작하기 전에 기를 죽여 놓겠단 건가.’
진혁의 눈에는, 자신을 업신여기는 동생의 속내가 뻔히 보였다.
“자, 형님. 어서 공격해 보십시오. 이 반탄벽을 상대로 두 번이나 공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반탄벽을 전신에 펼친 채, 상혁은 맏형을 향해 이죽거렸다.
“형님, 왜 가만히 있는 겁니까? 설마, 겁이라도 먹은 건 아니겠죠? 이 막내에게?”
큰 형이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는 것을 겁먹었기 때문이라 생각한 상혁은 손을 까딱이며 도발했다.
“말했을 텐데.”
하지만 진혁은 도발에 넘어가는 대신.
“내 몸이 상할 일은 없을 거라고.”
조용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오른손에서, 보이지 않는 흑마력의 덩어리가 바깥으로 퍼져 나갔다.
그 순간.
끼기기긱.
공장의 담벼락 바깥에서 기분 나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금속이 맞물려 비틀리는 소름 끼치는 소리에, 상혁과 글리펜의 시선이 담벼락 바깥으로 향했다.
그리고.
“저, 저건…….”
담벼락 너머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형체에, 난쟁이는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식귀였다.
비록 머리 없이 몸뚱이뿐인 데다 온몸이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지만, 그 거대한 크기와 근육으로 가득 찬 몸뚱이는 분명 정급의 괴수인 식귀가 틀림없었다.
쿵! 쿵!
몸을 일으키면서 자신의 육체를 감싸고 있던 쇠밧줄을 끊어 낸 식귀는, 한달음에 공장의 담벼락을 넘고는 진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래, 저 녀석이 바로 소문의 주인공이었군!”
“치수를 새로 재야 할까 싶어서 데려왔습니다.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만.”
감탄하는 표정으로 식귀에게 스마트폰을 들이대는 글리펜을 잠시 바라보던 진혁은,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상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저 식귀는 내가 탐욕고에서 얻은 것이니, 내 힘이나 마찬가지다.”
“형님이 아니라, 저 식귀가 나선다는 말입니까?”
“그래.”
동생의 물음에 진혁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뭘 믿고 자신만만했나 했더니…… 겨우 식귀라니.”
그 말을 들은 상혁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식귀의 힘이 아무리 강력하다지만, 그래 봐야 정급.
뒤에서 두 번째 등급의 괴수일 뿐이다.
게이트 너머에서 셀 수 없이 많은 괴수들을 상대로 생사의 고비를 넘겨 온 그에게, 식귀 한 마리 따위는 지나가는 들개만도 못한 존재였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선 건진 모르겠지만…… 형님, 실수한 겁니다.”
이제는 허탈함을 넘어 무관심에 가까운 표정.
반탄벽을 유지한 채 짝다리를 짚고 삐딱하게 서 있는 상혁의 모습은, 누가 봐도 대결 상대를 마주한 것으론 보이지 않았다.
‘역시.’
허나, 이런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던 진혁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옆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망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성준, 이제 네 차례다.’
―제 차례라면…….
‘이제, 네게 한 약속을 지킬 것이다.’
영문을 알 수 없어 하는 성준을 향해, 진혁은 미소를 지었다.
‘괴수를 원 없이 처 죽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이야기를 마친 진혁은 자신의 뒤에서 기립하고 있는 식귀를 바라봤다.
그 의미는 분명했다.
‘네게, 괴수를 처 죽일 육체를 내어주마.’
두근! 두근!
진혁의 검은 심장이, 끈적한 흑마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 * *
‘뭐야, 괜히 쫄았네.’
진혁의 앞에 나타난 머리 없는 식귀를 마주한 상혁은, 말 그대로 어이가 없었다.
본사 로비에서 만났을 때 벌어졌던 괴이한 일 때문에, 일부러 마나를 쥐어짜 반탄벽까지 발동했건만.
‘고작 정급외 괴수 따위로, 날 어떻게 해 보겠다고? 십 년 동안 어디 판타지 세계라도 갔다 왔나?’
식귀라면 던전에서, 게이트 너머에서 셀 수 없이 토벌했던 괴수다.
당연히, 상혁은 식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힘은 제법 쓸 만하지만, 무리(武利)라고는 하나도 담겨 있지 않은 주먹질일 뿐이야.’
아무리 방패를 들지 않아 반탄벽의 위력이 반감되었다곤 하지만, 오러도 실려 있지 않은 주먹질이 칠성무의 반탄벽을 뚫어 내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
그렇기에, 상혁은 거대한 괴수가 자신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오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이다음이었다.
‘이 자리에서, 형님과 나의 차이를 확실하게 새겨 줘야겠어.’
세한보안의 전무이자 토벌대의 대장, 그리고 삼 품의 엽사이자 세한그룹의 차기 회장 후보.
그 모든 칭호가 서상혁,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영광된 길에, 십 년 동안 잠이나 퍼질러 자다 온 형 따위가 끼어 있을 자리는 없었다.
‘이제 현실을 깨달으십쇼, 형님.’
자신에게 주먹을 들어 올리는 검은 식귀를 향해, 상혁은 때려 볼 테면 때려 보라는 듯 가슴을 쭉 내밀었다.
식귀가 무언갈 보여 줄 거란 기대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쿵!
주먹을 들어 올린 식귀가 난데없이 오른발로 진각을 밟기 전까지는.
‘뭐?’
생각지도 못한 식귀의 행동에, 상혁은 순간 당황했다.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괴수는, 무(武)의 묘리를 따라 할 수 없다.
마나와 유사한 마기라는 힘으로 초상 능력과 유사한 힘을 펼칠 수는 있지만, 지성체가 발전시켜 온 것에 비하면 하찮은 수준.
그것은 모든 엽사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이었지만.
‘저건, 대체.’
지금, 상혁의 눈앞에서 그 상식이 처참히 부서지고 있었다.
심지어.
‘서, 설마…….’
머리 없는 식귀가 취하는 자세는, 그에게도 너무나 익숙했다.
이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수천, 수만 번이고 반복했던 자세가 아니던가.
우우웅!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거대한 주먹 앞에서, 상혁은 너무나 익숙한 이름을 떠올렸다.
‘칠성무, 일성.’
파산권(破山拳).
콰아아앙!
거인의 주먹이, 천지를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