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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명가 초월급 네크로맨서-12화 (12/174)

12화

사흘이 지났다.

진혁의 초렵식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삼 주.

운명의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지만, 진혁의 일과는 변함이 없었다.

“후우.”

오늘도 달리기를 마친 진혁은 가빠 오는 숨을 가다듬었다.

‘아직 모자라다.’

조금만 움직여도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던 처음과 비교하면 많이 좋아졌지만, 진혁의 마음엔 차지 않았다.

‘새롭게 얻은 망령들을 다루려면, 흑마력이 더 필요해.’

그러기 위해선, 그에 걸맞는 육체를 얻어야 했다.

허나 진혁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거기까지 도달할 수 있겠지.’

이미 도달해 본 적이 있는 경지.

시간의 문제일 뿐, 진혁이 다시 사령술의 정점에 도달하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숨을 고른 진혁은 입구에 놓인 세정용 보구로 땀을 날려 버린 다음, 옷을 갈아입었다.

―진혁 님, 오늘은 훈련을 일찍 마치셨군요.

“할 일이 있어서.”

―할 일이라면…….

“던전에 들어가려면, 장비가 필요하지.”

―아…….

서가의 엽사들은 누구나 탐욕고에서 보구를 하나씩 가지고 나오지만, 그것만으로 던전에 들어가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다.

온갖 괴수들로 가득한 던전에서 무사히 살아남기 위해선, 그에 맞는 방어구와 무기가 필요한 법.

‘내가 직접 전투할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자신을 보조할 장비는 필요했다.

―역시, 빈틈이 없으시군요. 망령들만으로도 충분할 거라 생각한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당연한 소릴.”

아부 섞인 성준의 말을 진혁은 대강 받아넘기곤, 얇은 점퍼를 하나 걸치며 훈련장을 나섰다.

아니, 나서려 했다.

“성준.”

―네?

발걸음을 멈춘 진혁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성준은 순간 움찔했다.

그리고.

“칠성무는 어디까지 익혔지?”

―……칠성무 말입니까?

성준은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당황했다.

*    *    *

엽사들은 자신의 능력만큼이나 장비를 중요시한다.

가문마다 중요시하는 분야와 초상 능력이 다르니, 솜씨 있는 장인과 시설을 갖춰서 가문의 능력을 보조할 장비를 제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그것은 서가, 세한그룹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가의 장남이라, 거의 십 년 만인 것 같은데?”

구로로 향한 진혁이 마주한 것은 세한그룹 산하의 자회사 중 하나, 세한금속의 사장.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땅딸막한 키의 난쟁이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글리펜 어르신.”

스마트폰에 얼굴을 파묻다시피 한 난쟁이 사장을 향해, 진혁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헹, 오랜만은 무슨. 벌벌 떨면서 기어 들어오던 게 아직도 생각나는구만. 기껏 만들어 준 물건도 다 부숴 먹고 드러눕더니, 용케 살아 돌아왔어.”

글리펜은 십 년 전의 일을 꺼내며 코웃음 치더니 손으로 스마트폰의 화면을 두들겼다. 시선을 내린 진혁의 눈에, 스마트폰 속 게임 캐릭터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보였다.

한창 광고로 유명한 최신게임이었다.

‘어르신도 할 줄은 몰랐는데.’

속으로 혀를 차며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옛날 이야기일 뿐입니다.”

“옛날 같은 소리! 내 나이가 벌써 사백예순두 살이야, 네 고조할아버지 시절쯤은 돼야 옛날이지. 그때가 어땠냐면…….”

“초대 가주님의 이야기는 십 년 전에도 실컷 들었습니다.”

“호오.”

진혁이 글리펜의 말을 단숨에 잘라 버리자, 난쟁이는 제법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 누워 있다 오더니 확실히 달라지기는 했구나. 예전 같았으면 찍소리도 못 했을 텐데.”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래, 뭐가 필요해서 왔지? 여기까지 온 이유야 뻔하긴 하다만.”

“초렵식에 쓸 장비가 필요합니다.”

“그런 거라면 그냥 공장에서 한 세트 들고 가면 될 거 아냐? 아직 초렵식도 못 치른 놈이 보구를 만들러 온 건 아닐 거고, 바쁘니까 아래 애들한테 말해서 알아서 들고 가.”

진혁의 말에 난쟁이는 한 손으로 화면을 터치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일 층을 가리켰다.

세한금속은 한국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엽사용 장비 생산업체.

그중 상급 라인의 제품이라면, 진혁의 초렵식에 쓰기에 차고도 넘치리라.

“제가 원하는 건 기성품이 아닙니다.”

허나 진혁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흠!”

스마트폰만 쳐다보던 글리펜이 고개를 슬쩍 들어 진혁을 바라봤다.

진혁은 대답 대신, 준비해 온 서류 가방에서 녹색 서류 봉투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렸다.

“우선 한 번 읽어 보시죠.”

서류 봉투를 가리킨 진혁의 표정은 평온했다.

잠시 진혁의 낯빛을 살피던 글리펜은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잠시 치우고는, 반신반의한 얼굴로 서류 봉투에서 몇 장의 종이를 꺼내 들었다.

“도면이군.”

서류봉투 속 내용물을 확인한 난쟁이의 눈이 진지하게 변했다. 그의 작달막하지만 단단한 손이 도면을 빠르게 넘겼다.

하지만.

“뭐야, 이게.”

그의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이거, 그냥 칠성무 세트 아냐?”

서가의 고유한 무술, 칠성무에 사용되는 여섯 종류의 무기와 방패 하나.

진혁이 내민 도면을 살핀 글리펜은 인상을 구겼다.

“이런 건 그냥 내려가서 하나 주워 가라니까? 모자라면 두 개 주워 가든가. 지금 공성전 중인 거 안 보여?”

휙!

글리펜은 짜증을 내며 도면을 책상에 집어던지고는, 스마트폰에 다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진혁은 책상 위에 흩뿌려진 도면을 모으곤 난쟁이에게 다시 내밀었다.

“자세히 보시죠.”

“아니, 나 지금 바쁘다니까! 내가 여기다 얼마를 질렀는지 알아?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도면이 스마트폰 화면을 가리자 글리펜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허나 그것도 잠시.

“……뭐야?”

어쩔 수 없이 도면을 자세히 살피던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거…….”

처음에는 평범한 무구의 설계도라 생각했다.

공장에서 하루에 수십, 많으면 수백 개씩 찍어 내는 양산품과 하등 다를 게 없는 물건.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치수가 왜 이래? 잘못 적은 거 아냐?”

도면에 쓰여진 수치를 확인한 글리펜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 적힌 게 맞다면…….

“인간이 휘두를 만한 건 아닌데?”

하나하나가, 인간이 사용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했다.

단검 정도라면 모를까, 그 이상의 무기를 휘두르는 건 마나의 힘을 빌리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이리라.

당연히, 세한금속에선 인간이 쓰지 못할 물건을 만들지 않는다.

진혁은 당연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제가 쓸 게 아니니까요.”

“그럼 대체 누가 쓴다는…… 아!”

순간, 글리펜은 요 며칠 동안 들려왔던 소문을 떠올렸다.

서가의 장남이 식귀를 길들였다는 소문.

“개소린 줄 알았더니, 그 소문이 사실이었다고?”

“해 주실 겁니까?”

진혁은 대답 대신 난쟁이를 향해 되물었다. 글리펜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도면을 살폈다.

“재료가 제법 들어가긴 하겠어. 기계로 만들기엔 너무 크기도 하고…… 젠장, 그럼 내가 직접 만들어야 하잖아!”

사람이 쓰는 무구를 만드는 곳에서 난데없이 괴수의 무구를 만든다니.

기계를 쓸 수도 없으니, 순수하게 수작업만으로 만들어야 할 판이다.

그것도, 사장인 글리펜 자신의 손으로.

그렇기에.

“……재밌겠는데?”

무료함으로 가득하던 글리펜의 눈이 총기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끄아악!

―패배하셨습니다.

도면 아래에 깔린 스마트폰에서 비통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이 자리에서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초렵식이 삼 주 뒤였나? 우선 일주일 뒤에 찾아와. 그때 시제품을 확인하고, 개선사항을 살펴보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도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글리펜을 향해, 진혁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끼익!

누군가가 사장실의 문을 열어젖힌 것은 그때였다.

“어르신?”

진혁의 막내 동생, 서상혁이었다.

문을 벌컥 밀고 들어온 그의 눈이 진혁과 마주치고는 찌푸려졌다.

“아니, 형님은 왜…….”

지난번 본사에서의 일을 떠올렸는지 재수 없게 굴지는 않았지만, 영 못마땅해하는 게 진혁의 눈엔 똑똑히 보였다.

“아, 왜 이렇게 늦었어? 동생이란 놈이 형만도 못하네. 에잉, 쯔쯔.”

뒤늦게 상혁의 얼굴을 확인한 글리펜이 혀를 찼다. 상혁의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

“그,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의뢰드릴 보구의 재료가 늦게 배송돼서…….”

그 말과 함께, 상혁은 손에 든 작은 상자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렸다.

쿵!

묵직한 소리가 책상으로 울려 퍼진 순간, 글리펜은 재료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다만티움이군. 직접 보는 건 오 년 만인 것 같은데.”

다이아몬드를 상회하는 강도와 그에 걸맞는 질량을 지닌, 게이트 너머의 초금속.

그 말을 들은 상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어르신은 다르시군요. 예, 아다만티움입니다. 이놈으로 단검을 하나 만들 생각입니다만.”

“이걸로? 하긴, 그 근육질 몸이면 아다만티움 단검도 문제없이 휘두르겠어.”

“그럼 이번 주 안으로 가능할까요, 어르신. 원정이 얼마 남지 않아서…….”

글리펜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상혁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난쟁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어렵겠는데.”

“네?”

“이미 의뢰를 받은 상태거든.”

말을 마친 글리펜의 짧은 손가락이 진혁에게로 향했다.

“내 원칙 알지? 자네 건 빨라도 한 달이야.”

“그, 그건 너무 늦습니다. 당장 이 주 뒤가 토벌인데…….”

“그럼 둘이 알아서 해결을 보든가.”

말을 마친 난쟁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푹신한 가죽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상혁의 시선이 형, 진혁에게로 향했다.

“형님, 그냥 양보하시죠. 초렵식은 아직 한 달이나 남았잖습니까.”

말은 제법 공손했지만,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동생의 싸늘한 눈빛 앞에서, 진혁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한 달이 아니라 삼 주지. 나 역시 시간이 모자란 건 마찬가지다.”

“형님, 정말 이러실 겁니까?”

진혁의 명백한 거절에 동생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럼, 가문의 규율대로 하시죠.”

“규율?”

“승자독식.”

상혁은 씹어뱉듯 답했다.

승자독식.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분명했다.

“지금 나랑 결투라도 해 보겠단 거냐, 동생아. 마나홀도 없는 무능력자를 상대로? 서가의 엽사들이 웃겠어.”

“당연히 전력을 다할 생각은 없습니다.”

진혁의 말에 담긴 진한 조롱을 눈치챈 상혁은 잠시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할 말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럼?”

“제가 형님의 공격을 세 번 막아 내는 것으로 하죠. 절 뒤로 밀어낸다면 형님께서 이긴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제가 이긴 겁니다.”

동생의 제안을 들은 진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세 번의 공격 기회를 준다지만, 동생은 삼 품에 다다른 엽사.

어중간한 공격으로는 방어를 뚫어 내기 쉽지 않다.

그 상대가 마나를 쓸 수 없는 진혁이라면 더더욱.

그럼에도.

“좋아.”

진혁은 승낙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로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상혁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허나.

“내가 이기면, 저건 받아 가지.”

그의 손가락이 글리펜의 책상으로 향했다.

주먹만 한 크기의 작은 상자.

초금속, 아다만티움이 담겨 있는 상자였다.

“형님, 지금 그걸 말이라고……!”

어처구니없는 진혁의 제안에 상혁은 버럭 소리를 지르려 했다.

“호오.”

하지만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설마 겁이라도 먹은 것인가? 이 무능력자 형에게?”

자신을 비웃는 것 같은 맏형의 표정을 마주한 순간.

으드득.

“……그래, 어디 한번 해봅시다.”

상혁은 그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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