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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200화 (외전 완결) (200/200)

◈ 200화 외전 (20)

안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사삭-

그의 손등에 기이한 문장이 새겨져 간다.

‘이건…….’

[그 문양은 나와 계약자가 이어졌음을 증명하는 맹약의 증표. 이로써 우리는 오롯이 하나가 됐다.]

“하나…….”

‘설마 내가 정말로 정령과 계약을 하게 될 줄이야.’

본래 정령은 드루이드와 엘프만이 다룰 수 있는 산물이다.

그렇기에 안톤은 지금의 상황이 더 남다르게 느껴졌다.

‘저 빛의 정령과 함께 힘을 키워 나간다면… 나의 숙명을 이루는 게 가능할까?’

눈앞의 빛의 정령이 얼마나 강대한 힘을 갖고 있는지는 모른다.

하나 녀석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무형의 기운은 성카데미의 교수들이 내뿜던 것 그 이상이었다.

‘어쩌면 이 혼돈의 시대를 내 손으로 종식시키는 게 가능할지도…….’

안톤이 한껏 희망에 부풀어 오르던 그때.

빛의 정령이 그를 보며 말한다.

[지금의 계약자로선 불가능한 일이다.]

“…뭐?”

[이 정도의 힘으로는 흑마법사들을 토벌할 수 없다.]

‘…내 생각을 읽었어?’

안톤이 굳은 표정으로 빛의 정령을 노려보자.

그는 무심한 목소리로 말한다.

[우리는 계약 아래에 하나가 됐다. 계약자의 생각을 알게 된 것 또한 계약에 따른 것일 뿐, 단지 그뿐이다.]

“…그런 거였나. 근데 흑마법사들을 토벌할 수 없다는 게 무슨 말이야?”

안톤의 질문에 빛의 정령에게서 무심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나는 빛. 형체를 갖추기 전까진 세상을 표류하며 세상 전역을 떠돌아다녔다. 그리고 사람들을 비롯하여 계약자가 생각했던 흑마법사들 또한 지켜봤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지금의 계약자는 나약하다.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선 힘을 키워야만 한다.]

‘그런 건 나도 알고 있다고!’

그가 상대해야 하는 건 흑마법사이자 그들이 지배하는 대륙 전역이라고 봐야 할 터.

그런 놈들에게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힘이 필요하다는 건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나도 당장 놈들과 싸울 생각은 없어. 그 정도 판단도 못 할 정도로 어리석진 않아.”

[계약자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선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도 알고 있어. 하지만 너무 시간을 끌 수는 없어.”

그가 강해지고자 하는 시간 동안.

흑마법사들 또한 점점 대륙에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계약자의 말이 맞다. 그렇기에 나는 계약자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제안?”

[다른 세계로 넘어가 그 세계에서 힘을 키우고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다른 세계로… 넘어간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다른 세계로 넘어가 있는 동안 이 세상의 시간은 멈춘 것처럼 흐를 것이다. 그사이 다른 세계에서 계약자가 힘을 키운 뒤 돌아온다면, 계약자가 우려하는 시간적인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다.]

“아니, 잠깐 기다려 봐.”

너무도 갑작스러운 말에 안톤은 혼란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세계로 넘어가 있는 동안에는 내가 살던 세상의 시간이 거의 흐르지 않으니까 이세계에서 충분히 힘을 기르고 다시 내 세상으로 넘어오자는 말인가?’

[정확히 이해했다.]

안톤의 심리를 읽은 빛의 정령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여전히 안톤은 납득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솔직히 나쁜 생각은 아니야.’

어찌 보면 다른 놈들이 강해질 시간은 얼려 둔 채.

그만이 이세계에서 강해진다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정령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거지? 아니, 그보다 이세계로 넘어가는 게 말이 돼? 애당초 다른 세계가 존재하긴 하는 건가?’

수많은 의문이 꼬리를 물고 따라왔으나.

이렇다 할 결론은 나오질 않았다.

[계약자가 혼란스러워하는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나는 빛이자 세계의 근원 중 하나. 계약자가 불가능하다 생각하는 걸 가능케 하는 세계의 이치이기도 하다.]

“…….”

자신 있게 말하는 빛의 정령을 한참이고 응시하는 안톤.

“…좋아. 네 말이 전부 사실이라고 쳐. 하지만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이세계로 넘어가는 게 가능한 거야?”

[계약자가 원한다면 단 한 번, 나의 힘을 상당 부분 소진하여 문을 열 수 있다.]

‘대가는 빛의 정령이 지불한다는 건 납득했어. 하지만… 다시 돌아오려면 또 엄청난 힘을 필요로 한다는 거잖아?’

이세계로 넘어가면 다시 돌아오는 게 가능하긴 한 걸까?

아니, 이세계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가는 게 맞는 걸까?

[계약자가 하는 걱정들은 지극히 합리적인 것이다. 그러나 선택은 계약자의 몫이다.]

“나는… 나는…….”

안톤이 주먹만 꽉 쥔 채 망설이던 그때.

“저쪽이다! 분명 저쪽에서 엄청난 빛의 파장이 일었다고!”

“꽤 소탕한 것 같은데 아직도 레바논의 잔당들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지.”

어둠 사이로 수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아무래도 정령과의 계약 의식이 누군가의 눈에 들어갔던 모양이다.

타다다다닥-

‘발소리만 해도 최소 몇백 명…….’

안톤은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에 가만히 있으면 분명 잡히고 말 거야.’

만약 흑마법사들의 손에 잡히게 된다면.

그의 염원을 이루지 못하는 건 물론 저들의 질 좋은 실험체가 될 터.

‘설령 어떻게 추격을 뿌리친다고 해도…….’

그의 신원은 대륙 곳곳에 퍼져 나가 정상적인 활동을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이었다.

‘망할…….’

피가 새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악다문 안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산속 같은 곳에서 계약을 하는 거였는데…….’

안일했다.

안일해도 너무 안일했다.

‘아니. 애당초 일반적인 정령의 계약과는 달랐던 것부터가 내 예상 밖이었어.’

모든 것이 그의 생각을 벗어난 상황들뿐이잖은가?

[계약자는 안일하지 않았다. 다만 나의 존재가 계약자의 상정을 뛰어넘었을 뿐.]

빛의 정령이 위로 아닌 위로를 해 왔으나.

지금은 그마저도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성카데미에서 많은 것들을 배웠지만.

적들의 포위망에서 무사히 벗어나는 것 같은 건 배우지 않았다.

[나는 선택지를 제시할 뿐, 선택은 계약자의 몫이다.]

“나는…….”

“저기 누가 있다! 레바논의 잔당이 분명해!”

이미 목소리는 어둠을 찢고 그의 지척에까지 도달한 상황.

이제 망설일 시간 같은 건 없다.

“날 다른 세계로 보내!”

[그리하지.]

빛의 정령이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빛에 감긴 거신이 두 손을 번쩍 쳐들더니 합장하듯 손을 모은다.

콰아아아아아앙-

맞닿은 두 손에서 벼락 같은 소리가 일며.

대지가 찢어질 듯 요동친다.

“우와아아악!”

“놈들이 수작을 부리려 한다! 지팡이를 들어라!”

사사사사사삭-

어둠 사이로 수백 개가 넘는 붉은 마법진들이 생성되어 가던 그때.

[세계의 의지가 명한다. 이곳에… 그 의지를 증명하라.]

빛에 감긴 거신이 합장했던 두 손을 좌우로 힘껏 뻗자.

화아아악-

그의 두 손 사이로 빛에 휘감긴 문이 드러난다.

‘저건…….’

[이 문은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전능의 문이다. 계약자여, 준비됐나?]

“나는…….”

더 이상의 망설임은 사치일 뿐.

‘그곳이 이세계가 됐건 어디가 됐건 강해질 수만 있다면… 그걸로 족해!’

눈에서 망설임이 완전히 사라진 안톤이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근데 이세계로 가도 넌 내 옆에 있는 거지?”

[나는 계약자의 숨이 멎는 그날까지 계약자의 옆에 있을 것이다.]

“…그래. 그거면 됐어.”

안톤은 희미한 미소를 짓곤 문으로 발을 내디디려 했다.

바로 그때.

삭-

“…….”

돌연 세상이 정지한 것처럼 주변에 있던 모든 것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바람도, 완성되어 가던 마법진도 그리고 안톤까지 말이다.

쩌저저저저저저적-

그 와중 멈춘 세상 사이로 커다란 균열이 생기더니.

[흠…….]

열두 장의 날개를 가진 여인을 대동한 남자가 균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호오…….]

남자는 빛의 문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씨익 미소를 짓는다.

[제법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설마 바로 문을 열 줄이야. 그렇잖아?]

[그렇긴 하지만… 정말 넘어가실 건가요? 이 문이 이세계로 넘어갈 수 있는 문인지도 확실치 않은데…….]

펠기누스가 말꼬리를 흐리자.

랄프는 피식 미소를 짓는다.

[안톤이 계약한 정령은 단순한 빛의 정령이 아니야.]

남자는 거신의 팔을 툭툭 건들며 말을 이어 간다.

[이건 과거, 마신이었던 베논의 의지를 삼킨 세상의 이치 같은 거지. 그게 눈으로 볼 수 있게 구현된 것뿐이고.]

[그럼 제거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위험할 것 같은데…….]

[이미 베논은 사라진 지 오래야. 다만 놈이 이세계로 넘어가고자 했던 사념 정도만이 섞여 들어갔을 뿐이지.]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채 빛의 문을 응시하는 랄프.

[안톤이 힘에 눈을 뜰 때까지 10년 정도는 걸릴 거라 생각했지만, 뭐, 됐다.]

[하지만 주신님이 다른 세계로 넘어가시면… 이 세상은 누가 관리하죠?]

[당연히 네가 해야지. 내가 괜히 네게 모든 업무를 가르친 줄 알아?]

펠기누스가 뜨악한 표정을 지었으나 랄프는 아랑곳 않았다.

[너도 잘 알잖아? 내가 이 문을 알아내느라 얼마나 개고생을 했는지.]

[하지만 주신님이 직접 만드는 방법도 있었는데…….]

[이런 방법이 있는데 내가 왜 개입하는 부담을 감수할까.]

랄프의 대답에 펠기누스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래도… 저로서는 한계가 있을 것 같은데요……. 레바논이 주신님의 부재를 알게 되면 분명 또 수작질을 부릴 거라고요.]

[그래서 계속 널 훈련한 거야. 지금의 너는 레바논도 어쩌지 못할 텐데?]

[그건 그렇지만…….]

펠기누스가 계속 그를 붙잡으려 하자.

랄프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곤 그녀를 보며 말한다.

[어차피 저쪽 세계와 이쪽 세계에서 흐르는 시간의 흐름은 달라. 어쩌면 네가 눈 한 번 깜빡일 때쯤 돌아올지도 모르지.]

[그래도…….]

[됐다. 거기까지. 더 이상의 반박은 받지 않는다.]

펠기누스의 말을 딱 잘라 버린 랄프.

항상 무료한 감정만이 맴돌던 그의 눈에 흥미라는 감정이 돌기 시작한다.

‘어떤 세상으로 가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재미있겠지.’

그 생각을 끝으로 랄프는 빛의 문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이윽고 그의 몸이 빛에 휘감길 무렵.

[저, 저도 가겠어요!]

펠기누스가 그의 뒤를 쫓아 문 안으로 뛰어들었고.

그와 동시에 멎었던 시간이 다시금 흐르기 시작했다.

* * *

빵빵-

수많은 차들이 오가는 도심 속.

“흐음…….”

한 남자가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커피의 향기를 음미하며.

핸드폰을 훑는다.

“재미있네.”

“이 세상은… 너무 혼잡하네요.”

맞은편에 앉아 있던 가녀린 여인의 말에 남자는 찻잔을 내려놓곤.

그녀를 째려본다.

“분명 내가 따라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죄송해요.”

“됐다. 그 책임은 돌아가거든 묻지.”

랄프의 말에 펠기누스는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네! 근데 어떤 게 재미있다고 하시는 건가요?”

“글쎄… 이곳은 내가 전에 살았던 세상과는 좀 다른 것 같아서 말이야.”

언뜻 이 세상은 그가 환생하기 전에 살던 세상과 엇비슷했으나.

한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설마 이곳에도 마수들이 있을 줄이야.’

심지어 던전이라는 형태의 엇비슷한 공간을 비롯하여.

모험가와 비슷한 직업인 헌터라는 것이 이 세상엔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근데 주신님… 저희가 다시 이전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물론이지. 이미 이 세상에는 안톤도 넘어와 있다. 돌아가려거든 다시 그를 이용하면 될 뿐이야.”

“그렇군요. 근데… 이곳의 신과 싸울 생각이신가요?”

펠기누스의 물음에 피식 미소를 흘리는 랄프.

“굳이 지루한 자리를 강탈할 필요는 없겠지. 그보단 일단 이 세상을 만끽하는 게 우선이다.”

그는 들고 있던 핸드폰을 옆자리의 남자 앞에 놓곤.

천천히 카페를 나섰다.

“엇… 음? 어어… 내가 뭘 하고 있었지?”

굳은 듯 멍하니 있던 남자가 어리둥절해하며 주변을 살필 무렵.

밖으로 나간 랄프는 도심지를 보며 나지막이 말한다.

“일단 신분증을 구하지. 그리고 그 뒤에는 헌터 관리 센터로 이동한다.”

“헌터… 요?”

“그래.”

펠기누스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주, 주신님! 같이 가요!”

앞서 걷는 랄프의 뒤를 쫓아 뛰어간다.

에피소드 이세계를 달리는 주신 (완)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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