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화 외전 (19)
“…….”
십 분, 이십 분…….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안톤은 생각했다.
‘실패한 건가. 그렇겠지…….’
겨우 정령석을 삼키는 것 정도로 두 힘이 결합된다면.
엘프들이나 리치가 왜 실험을 실패했겠는가?
‘역시 이런 단순한 방법으로는 안 되는 건가.’
안톤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스쳐 간다.
‘아냐. 실패할 가능성이 높을 거란 건 어느 정도 예상했잖아? 이대로 포기할 순 없어.’
그러나 지금 그에게 정령석 외에 별다른 방법이 있던가?
‘책에는 신관의 신성력을 빼내서 흑마법사에게 주는 실험을 했다고 했었지.’
그 말인즉슨, 마법사나 정령사의 힘을 착취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일 터.
‘아냐! 그런 방법을 쓰면 내가 흑마법사 따위랑 다를 게 뭔데?!’
하나 안톤은 결코 그런 악의적인 방법만큼은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달리 좋은 방법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안톤의 시선에 아직 남아 있던 정령석들이 보였다.
‘정말 내 이론이 틀렸던 걸까? 아니면… 내가 섭취한 정령석이 터무니없이 부족해서 실험이 실패한 건 아닐까?’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후… 좋아. 이 방법마저 실패하면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게슴츠레한 눈으로 정령석을 바라보는 안톤.
그는 자그마한 정령석들을 하나하나 집어 입에 넣고 삼키기를 반복했다.
‘계속 물로 넘기고 있다지만 이것도 쉽지 않네.’
단단한 정령석이 목을 타고 넘어가며 자꾸 구토를 유발해 온 탓일까.
“우욱…….”
안톤이 애써 입을 막고 헛구역질을 참아 내던 그때.
화아아아악-
돌연 그의 몸 안에서 푸른 광채가 발현되기 시작했다.
‘이, 이건……. 설마 성공한 건가?’
몸을 뚫고 흘러나오는 빛을 멍하니 바라보는 안톤.
그러나 안식의 시간은 잠시뿐이었다.
콰드드드득-
‘으으으윽…….’
갑자기 전신의 뼈가 비틀리는 듯한 고통에 안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게… 대체…….’
이것이 일개 인간의 몸으로 정령석을 삼킨 대가인 걸까.
투드드득-
몸 곳곳에서 튀어 오른 핏줄이 터져 나가고.
살점이 후드득 떨어지자 안톤은 고통에 몸서리치면서도 생각했다.
‘이, 이대로 있다간 죽겠어…….’
혼신의 힘을 다해 신성력으로 제 몸을 치유해 보고자 했으나.
어째서인지 몸이 말을 듣질 않았다.
‘이렇게… 죽는다고?’
동료들의 복수도, 레바논 왕국을 재건한다는 사명도.
그 무엇 하나 이루지 못한 채, 이 빌어먹을 흑카데미에서 죽어야 하는 걸까?
‘죽을 수 없어……. 난 아직 죽어선 안 된다고!’
처억-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봇짐에서 검 한 자루를 꺼낸 안톤.
“커흑…….”
그는 피를 토하는 와중에도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네가… 정말, 정말 성검 발칸이라면… 생명을 살리는 검이라면… 나도 살려 봐!”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꾸로 검을 잡은 안톤이 제 심장 부근을 향해 힘껏 검을 찌른다.
푸욱-
검이 가슴을 뚫고 등을 비집고 튀어 나오던 그때.
웅웅웅웅웅-
갑자기 발칸의 검신에서 백색의 온화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 기운은…….’
발칸에서 흘러나온 기운은 만신창이가 된 안톤의 몸을 복구해 나갔으나.
퍼억-
정령석을 과다 섭취 한 탓인지 복구된 곳에서 다시 피가 터져 나온다.
웅웅웅, 퍼억-
‘으으으으…….’
끝없이 이어지는 소생과 파괴의 작업을 견디지 못한 걸까.
결국 안톤은 정신 줄을 놓고야 말았으나.
그의 정신과는 상관없이 소생과 파괴는 끝없이 진행되었다.
웅웅웅, 퍼억-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웅웅웅웅웅-
마침내 안톤의 몸을 파괴하던 정령의 힘이 잦아들기라도 한 걸까.
살점이 떨어져 나갔던 부위에 새살이 돋기 시작했고.
터져 나간 안구 부근에는 기이한 힘이 자리해 갔다.
스스스스슥-
이윽고 훼손됐던 안톤의 몸이 모두 복구되자.
그의 가슴 언저리에서 맴돌던 백색 빛은 가슴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고.
뎅그랑-
가슴에 박혀 있던 성검 발칸은 어느새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 * *
한편, 같은 시각.
[흠…….]
공중에서 무심히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던 랄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계획대로군.]
[계획대로라니요?]
옆에 있던 펠기누스의 물음에 랄프는 무심히 입을 뗀다.
[왜 내가 그에게 성검을 줬다고 생각하지?]
[그야… 전쟁을 관전하려고 그의 힘을 키우시려 한 게 아닌가요?]
벌써 신의 생활에 지루함을 느끼고 있던 주신이었기에.
안톤은 그의 무료함을 해결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할 터였다.
[그건 부차원적인 결과다.]
[부차원적인 결과라 하심은… 그에게 따로 원하는 게 있으시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녀의 물음에 랄프는 조용히 미소 짓는다.
[그래. 언제고 안톤은 이차원을 잇는 문이 될 거다.]
[…네? 문이요?]
이차원을 잇는 문이라니?
도대체 주신께선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거란 말인가?
[그래, 문.]
하나 더 이상 대답할 생각이 없었던 걸까.
그저 주신은 미소만을 지을 뿐.
더 이상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다.
* * *
그날 저녁.
흑카데미의 소각장 내부.
“똑바로 끌어! 내용물이 흘러나오면 또 청소해야 된다고!”
“알았다니까!”
두 남자가 커다란 가죽 자루들이 담긴 수레를 끌며 소각장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하아… 오늘은 이걸로 끝이지?”
“그래. 당분간 시체를 이용한 실습도 없으니까 좀 편해지겠어.”
“근데 안톤 이놈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일 좀 가르치려 했더니 벌써 농땡이를 피우고 말이야.”
수레를 끌던 남자가 구시렁거리자.
뒤에서 수레를 밀던 남자가 픽 웃는다.
“삼 개월 정도 됐으면 슬슬 편안해질 시기이긴 하지.”
“안 되겠어. 또 기강을 잡든가 해야… 허? 얼씨구?”
“왜? 뭔데?”
“저것 좀 봐라.”
동료의 말에 뒤에서 수레를 끌던 남자가 옆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다.
“이야…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이런 곳에서 낮잠이나 자고 있었어?”
남자가 바닥에 누워 있는 안톤을 보곤 피식 미소를 흘리자.
그의 동료가 넌지시 말한다.
“꼭 예전의 네 녀석을 보는 것 같은데?”
“내가 저랬다고? 난 반년 정도는 열심히 했다고!”
“근데 검술을 연습한 건가? 저 검은 또 뭐야?”
하인들은 끌던 수레를 내려놓곤.
안톤에게 다가가 그의 뺨을 툭툭 쳤다.
“야, 안톤! 안톤!”
“으으으으…….”
혼절했던 안톤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오자.
하인들은 더욱 열심히 그의 뺨을 건드렸다.
“이야, 독하다, 독해. 이래도 안 일어나나 보…….”
남자가 힘껏 팔을 쳐올리던 그때.
“으으… 허억!”
죽은 듯 누워 있던 안톤이 벌떡 몸을 일으킨다.
“아이고, 안톤 하인장님. 일어나셨습니까?”
“여긴…….”
안톤은 눈앞의 두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비로소 작금의 사태를 인지할 수 있었다.
“죄, 죄송해요!”
“얼씨구? 죄송한 줄은 아네? 애당초 죄송할 짓은 하지 말았어야지.”
“야, 얼른 일어나. 저녁 먹을 시간이다.”
남자들이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이자.
안톤은 재차 허리를 숙여 보였다.
“다음부턴 절대 이런 일 없도록 할 게요.”
“됐어. 일하다 보면 하루쯤은 도망치고 싶은 날도 생기는 법이니까. 대신 다음에 내가 하루 안 보이는 날에는 내 몫까지 일해. 알겠어?”
“물론이… 으윽…….”
갑자기 안톤이 눈 부근을 쥔 채 신음을 흘리자.
당황한 두 하인이 얼른 그의 곁으로 다가간다.
“야, 왜 그래? 어디 아프냐?”
“넌 왜 아픈 녀석한테 지랄이야, 지랄은!”
“지, 지랄?! 내가 녀석이 아픈 줄 어떻게 알아!”
하인들이 서로에게 면박을 주는 사이.
눈을 감싸 쥔 안톤은 고통에 신음하며 생각했다.
‘…뭐지? 뭔가… 이상해.’
몸 안을 맴도는 청량한 기운들도, 눈에서 느껴지는 묘한 이물감도.
모두 전에는 느껴 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설마… 실험에 성공한 건가?’
실험에 성공한 건지 실패한 건지 아직 결과는 모른다.
하나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건…….
‘아직 난 살아 있어…….’
그 고통을 이겨 내고 그는 살아남았다.
‘다음부터 그런 미친 짓은 자제해야겠어.’
복수도, 레바논의 재건도 결국 그의 목숨이 건재해야만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후우… 눈의 격통도 아까보단 잦아든 것 같네.’
안톤은 눈에서 손을 뗀 뒤 천천히 고개를 쳐들었다.
“방금까지는 좀 불편했는데 지금은 괜찮아졌…….”
안톤이 하인들에게 자신의 건재함을 알리려던 찰나.
‘이, 이건 뭐야…….’
안톤은 눈앞의 상황에 돌처럼 굳어 입만 뻐끔거렸다.
제임스
나이: 25세
성별: 남
성격: 비교적 냉정한 편이나 하인들에게는 꽤 관대한 편이다.
특이 사항: 굉장히 돈을 좋아한다.
‘이게 대체…….’
어째선지 두 하인의 앞에는 정보가 적힌 글자들이 둥실거리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두 하인에 대한 정보라고밖에 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 * *
그날 밤.
안톤은 낡은 침대에 누운 채로 깊은 고찰에 잠겨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뭔가 실험이 잘못된 건가?’
누군가에게 고견을 묻고 싶었으나 그럴 수도 없다.
‘내가 이런 힘을 갖고 있다는 게 알려지는 것도 문제겠지만…….’
무엇보다 실험을 성공한 이가 존재할 리가 없는 탓이었다.
‘만약 나도 성검이 없었다면…….’
그 또한 핏덩이가 되어 이 세상과 결별했을 터.
‘하아… 이해할 수 없는 일들만 벌어지는구나.’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타인의 정보를 볼 수 있다는 것.
그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신성력과 정령의 힘을 합치면 이런 결과가 생기는구나.’
실제로 지금 그의 몸 안에는 신성력과 정령의 힘.
두 개의 힘이 공존하고 있었고, 안톤 또한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단 건… 나도 정령을 부릴 수 있는 걸까?’
정령.
자연 그 자체이자 자연을 구성하는 존재들.
그렇기에 그들을 다룰 수 있는 건 선택받은 극소수만이 가능했다.
‘어떻게 보면 나도 정령석을 삼켰으니까 반쯤은 엘프가 된 게 아닐까?’
물론 그의 귀가 뾰족하진 않았으나.
적어도 몸만큼은 엘프와 가까워졌을지도 모른다.
‘한번 실험을 해 볼까.’
안톤은 슬며시 침대에서 나가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별빛만이 감도는 길을 걷던 그가 도착한 곳은 적막한 공터였다.
‘이곳이라면 괜찮겠지.’
주변에 나무도 있어 은밀히 뭔가를 하기에 제격인 곳이었다.
‘후우… 좋아.’
가지고 나온 보따리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든 안톤.
‘여기에 적힌 대로 따라 그리면 되겠지?’
도서관에서 가지고 나온 책을 보며.
그는 바닥에 기이한 도형을 그리기 시작했다.
‘다 됐다.’
이윽고 도형이 완성되자.
안톤은 남아 있던 정령석을 꺼내어 도형의 중심에 놔두었다.
‘이제 여기에다가 내 힘을 불어넣으면 되는 건가.’
책에 적힌 순서를 착실하게 이행하는 안톤.
웅웅웅웅-
신성력도, 그렇다고 정령의 힘도 아닌 기이한 힘이 도형의 주변을 잠식해 가자.
안톤은 불현듯 불안감을 느꼈다.
‘설마 낮에 있었던 일처럼 엄청난 고통이 몰려온다거나 하진 않겠지?’
안톤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던 그때.
화아아아아아악-
갑자기 원형진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건… 무슨 냄새지?’
뿐만 아니라 어딘가 청량하면서도 달콤한 냄새가 그의 코끝을 자극해 오던 중.
까르르르르륵-
‘맙소사…….’
원형진 위로 수많은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안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저게 전부 다… 정령이라고?’
수백 마리는 족히 넘는 불새들이 그에게 날갯짓을 해 왔으며.
물색의 여인들이 수줍어하며 그에게 손짓을 해 왔다.
‘가까이 오라는 걸까?’
너무도 이질적인 광경에서 안톤이 눈을 떼지 못하던 그때.
쿠구구구궁-
돌연 빛에 감긴 커다란 망치가 원형진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 탓일까.
푸더더더덕-
그를 유혹하던 불새들과 물색의 여인들 그리고 멋들어진 수염을 기른 난쟁이들까지 화들짝 놀랐는지 자취를 감춰 버렸다.
‘방금 건 대체…….’
안톤이 멍하니 원형진 중심에 박혀 있는 망치를 바라보던 중.
[하급 정령들 따위가 감히 내 계약자를 건들려 하다니…….]
원형진 위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거대한 갑옷을 두른 채 밝은 빛에 둘러싸여 있는 존재.
그건 마치 갑옷을 입은 골렘 같기도 했다.
‘골렘이라고 하기엔 좀 많이 미안하지만… 지금은 그 표현 말고는 떠올릴 수 있는 게 없어.’
안톤이 멍하니 거대한 병기를 바라보던 중.
골렘 같은 존재에게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나는 빛이다. 난 태고부터 존재했으나 실체를 갖지 못했다. 하나 그대의 존재로 인해 난 비로소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 때문에 생겨난 정령이라고?’
[정령의 눈을 가진 존재여, 그대는 나와 계약하겠는가?]
‘정령의 눈? 설마…….’
사람들의 정보가 보였던 게 정령의 눈이라는 것 때문이었던 걸까?
‘그건 차후에 물어봐도 될 일이야. 일단 눈앞의 상황에 집중해.’
고민을 이어 가는 안톤.
‘모르긴 해도 하급 정령이나 중급 정령들이 겁을 집어먹고 도망갔어. 그렇단 건 눈앞의 저 골렘은 그 이상의 힘을 갖고 있다는 거야.’
그 말인즉슨, 녀석과 계약을 한다면 그는 지금 이상의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일 터.
마침내 결단을 내린 안톤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 안톤, 그대와 계약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