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98화 (198/200)

◈ 198화 외전 (18)

시험관의 물음에 안톤은 침묵했다.

‘끙… 설마 그걸 물고 넘어질 줄이야…….’

안톤이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할지 갈등하던 그때.

시험관이 피식 웃으며 말한다.

“내 나름대로 몇 가지 가정을 해 봤는데… 네 녀석… 설마 기사 출신은 아니겠지?”

“그건…….”

잠시 침묵하던 안톤이 천천히 입을 뗀다.

“그랬던 적도 있습니다.”

“그랬던 적이 있었다?”

“예. 전 원래 기사의 종자였으니까요.”

안톤의 대답에 남자의 얼굴에 이채로운 빛이 걸린다.

“그런데 어째서 기사를 포기하고 하인이 되려고 하는 거지?”

“그야…….”

씁쓸한 미소를 연기하는 안톤.

“제게 검의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달아서요.”

“흠…….”

안톤의 대답이 나름 진실성이 있다고 느낀 걸까.

남자는 곧 피식 웃으며 말한다.

“뭐, 사실 네 출신 따위는 상관없다. 그저 개인적인 호기심이었을 뿐이니까. 어쨌건 넌 출중한 성적으로 시험을 통과했다. 과거야 어떻건 이제 하인으로서의 일을 해 주면 된다.”

“…알겠습니다.”

“일단 이동할까.”

남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안톤은 그런 그를 보며 묻는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어디로 가긴? 네게 할 일을 알려 줄 거다.”

“아…….”

* * *

세 달 뒤.

‘끙…….’

일을 끝마치고 돌아온 안톤이 침대에 벌러덩 몸을 누인다.

‘하인의 삶이라는 건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구나.’

요 세 달간 정말 많은 일들을 배웠다.

흑카데미를 청소하고 학생들의 수발을 드는 것은 물론이오.

죄수들의 식사를 관리하는 것과 매점의 물건을 운반하고 흑카지노를 관리하는 일까지.

정말이지 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처음에는 구역질을 참지 못해서 힘들었지.’

흑마법사들을 수발든다는 생각에 구토감이 치밀어 올랐던 것도 일주일 남짓.

하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하였던가.

결국 그는 이 상황에 적응했다.

‘그보다, 이래서 언제 도서관에 들어가 볼 수 있을지…….’

하인이 되거든 금방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그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도서관을 지키는 언데드들이야 그렇다 쳐도, 출입증이 없으면 들어가지조차 못 하니…….’

오직 출입증을 갖고 있는 학생들만이 도서관의 출입이 가능했다.

‘힘을 사용해서 억지로 들어가려면 가능할 것 같긴 한데…….’

성마법을 발현했다간 그는 즉시 이곳의 교수들에게 붙잡혀.

학생들의 실험체로 전락하고 말 것이었다.

‘하아… 이렇게 시간만 낭비하고 있을 수는 없는데.’

최후의 안식처였던 성카데미는 이미 무너졌다.

레바논을 섬기고 빛을 따르는 자들은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게 작금의 현실.

‘어떻게든 무너진 레바논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야 말겠어. 어떻게든…….’

설사 그것이 신원 미상의 존재, 프랄 교수의 조언을 따르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연구 일지를 분석하는 것도 정체됐고… 결국 도서관에 가긴 해야 하는데.’

그래도 이 세 달간 아주 수확이 없었던 건 아니다.

‘흑카데미의 내부 구조랑 학생들의 수업 시간을 알게 된 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이니까.’

그뿐인가?

이제는 제법 다른 하인들과 친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도서관에 들어갈 수 없어. 하아…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누구의 눈에도 걸리지 않고 도서관에 들어갈 방법.’

“…….”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이렇다 할 계획이 떠오르지 않던 중.

‘스켈레톤들은 내가 처리할 수 있고, 필요한 건 학생증뿐이니까…….’

불현듯 한 가지 방법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간다.

‘흑카데미 안에 불을 질러서 사람들의 이목을 끈 다음에 몰래 교실에 들어가서 학생증을 훔쳐 갖고 나오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이곳은 악의 새싹을 키우는 흑마법사들의 농장이다.

놈들의 농장에 불을 좀 지른다고 하여 죄책감 따위를 느낄 그가 아니었다.

‘그래. 그 편이 가장 나을…….’

안톤이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을 빛내던 그때.

“어이, 안톤! 무슨 고민을 그렇게 심각하게 해?!”

눈에 상흔을 갖고 있는 남자가 그의 옆에 털썩 앉는다.

“아, 포트 하인장님.”

“벌써 고민거리가 생긴 모양이지? 괴롭히는 학생이라도 생겼나?”

그의 물음에 안톤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다들 생각 이상으로 잘 대해 주셔서요.”

안톤의 대답에 피식 미소를 흘리는 포트 하인장.

“뭐, 그야 그렇겠지. 예전이었다면 모를까, 지금은 함부로 하인을 다루기 어려운 세상이 됐으니.”

“…네?”

“뭐야. 몰랐어? 기사의 종자로 살았다더니 검 외에는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구만.”

포트 하인장은 껄껄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흑마법사들이 섬기는 신이 누구지?”

“그야 주신 랄프죠.”

“잘 알고 있군. 그럼 그가 하인 출신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겠네.”

‘알고는 있지만 그게 무슨 상관… 아…….’

안톤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자.

포트 하인장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전의 하인들은 학생들의 공작에 이용되는 것은 물론이고, 실험 재료나 학생들의 치료제로 사용됐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도 그런 것 같나?”

“…아니요.”

실험 재료로 사용되긴커녕.

정당한 봉급과 휴식을 받으며 인간다운 대접을 받고 있었다.

“크하하하하! 그게 다 모두 주신 랄프 님의 덕이지. 그러니 나도 용병 생활을 때려치우고 하인 선발 시험을 본 거고.”

“그렇군요.”

“그건 그렇고, 학생들이 괴롭힌 게 아니라면… 설마 다른 놈들이 면박을 준 건 아니겠지?”

포트 하인장의 부릅뜬 눈이 카드를 치고 있는 하인들에게 향하자.

안톤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뇨. 그건 아니고요. 다만…….”

‘어쩐다. 도서관을 이용하고 싶다고 슬쩍 말을 꺼내 볼까?’

포트 하인장은 흑카데미에서 몇 년을 보낸 베테랑이다.

어쩌면 그가 나름의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인장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전 기사의 종자였어요. 검술을 연습하고 기사님의 말을 보살피는 게 제 일과였죠. 하지만… 전 무엇보다 기사님의 서고에서 책을 읽는 걸 좋아했어요.”

아무렇지 않게 술술 거짓말을 늘어놓는 안톤을 보며.

포트 하인장은 지그시 그를 바라본다.

“그러니까… 책을 읽고 싶다는 말이군. 뭐, 너 같은 녀석이 없는 건 아냐. 실제로 저기 제임스나 닐슨 같은 녀석들은 흑마법사가 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여기까지 온 놈들이니까.”

“…그렇군요.”

“하지만 책이 있는 곳이라 봐야 도서관밖에 없긴 한데…….”

포트 하인장이 낮게 침음하다가 슬쩍 안톤을 바라본다.

“너, 그렇게 흑마법사가 되고 싶냐?”

‘뭐? 미쳤어?’

“…네? 아, 네.”

마음에도 없는 대답을 한 안톤의 얼굴을 쓱 훑는 포트 하인장.

“후…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널 도서관에 출입할 수 있게 해 주마.”

“네?!”

‘뭐야. 그게 가능한 일이야?’

어안이 벙벙해하는 안톤의 모습에 포트 하인장은 피식 미소를 짓는다.

“하인장이 갖고 있는 권리 중 하나이니 그렇게 놀랄 것 없다.”

“하지만 어째서……?”

“어차피 난 글을 잘 못 읽거든. 그러니 이렇게 하자고. 네가 다음 달 받을 봉급의 반을 내게 줘라. 그러면 네가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해 두마.”

‘봉급의 반을 달라고?’

너무도 어이없는 제안에 안톤은 새어 나오려는 미소를 애써 숨겨야만 했다.

‘반이 뭐야? 다 달라고 했어도 줬을 텐데.’

“정말인가요?!”

“그래. 정말이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거듭 허리를 숙이는 안톤의 모습에 괜히 부끄러움을 느끼기라도 한 건지.

포트 하인장은 손을 까딱이며 고개를 저었다.

“됐고, 내일 날이 밝거든 한번 가 보든가 해. 알았어?”

“네!”

* * *

다음 날, 점심.

흑카데미 3층의 중앙 복도로 올라온 안톤.

그는 다른 문보다 유독 커다란 문짝을 바라봤다.

‘드디어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는 건가.’

덜그럭-

‘정말 포트의 말대로네.’

이미 포트가 사전에 조치를 취해 둔 것인지.

도서관 앞을 지키고 있던 스켈레톤들이 그를 보곤 슬며시 자리를 비킨다.

‘드디어…….’

안톤은 애써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천천히 문을 열었다.

마침내 도서관으로 들어서자.

무언가 쿰쿰한 냄새가 그의 코끝을 자극해 왔다.

‘이게 흑카데미의 도서관……. 성카데미 도서관보다 몇 배는 더 큰 것 같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방대한 양의 책들을 보며.

안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던 그때.

덜그럭-

좌측 사서의 자리에서 낯선 소리가 울리더니.

너저분한 차림을 한 스켈레톤이 몸을 일으킨다.

[찾는 책이 있나?]

‘…어? 뭐야, 스켈레톤이 어떻게 말을……?’

말하는 스켈레톤을 생전 처음 본 탓일까.

안톤이 멍하니 입을 뻐끔거리던 중 스켈레톤이 다시금 말을 걸어온다.

[너, 포트 애송이가 보낸 것 아니냐?]

“마, 맞아요.”

[그래. 대충 이야기는 들었다. 책을 읽고 싶다고? 널린 게 책이니까 알아서 읽든가 해.]

말하는 스켈레톤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적거리자.

안톤은 얼른 그를 붙잡았다.

“잠깐만요!”

‘이 많은 책들 중에서 언제 내가 원하는 책을 찾아? 어떻게든 그의 도움을 받아야 돼.’

[엉? 또 뭔데?]

“찾고 싶은 책이 있어요.”

안톤은 스켈레톤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얼른 말을 이어 갔다.

“혹시 이곳에 신성력과 관련된 책이 있나요?”

[…….]

안톤의 물음에 먼지떨이로 책의 먼지를 털던 스켈레톤이 움직임을 멈춘다.

[…왜 그런 책을 찾는 거지?]

“그야… 필요하니까요.”

[…….]

갑자기 스켈레톤이 고개를 쭉 내빼어 그의 얼굴을 응시하자.

안톤은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뭐, 뭐죠?”

[…아니. 그저 옛날 생각이 좀 떠올라서 말이다. 네 녀석과 똑같은 말을 한 녀석이 있었거든.]

‘나랑 똑같은 소리를 했었다고? 설마 프랄 교수를 말하는 건가?’

프랄 교수 또한 흑마법사이니 이곳을 졸업했어도 전혀 이상하지는 않을 터.

“혹시 프랄 흑마법사인가요?”

[…프랄? 그건 또 누구야? 아무튼 그런 녀석이 있었다. 어쨌건… 따라와라.]

스켈레톤은 여러 개의 책장을 지나.

한 책장의 앞으로 그를 안내했다.

[이곳에 네가 원하는 게 있길 바라마.]

“아. 네… 감사합니다.”

[거참… 희한하군.]

그 말을 끝으로 일말의 미련도 없이 등을 돌리는 스켈레톤.

안톤은 그런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책장으로 눈을 돌렸다.

‘이것도 아니야. 이것도 아니고…….’

그가 한참이고 책들을 꺼냈다가 넣기를 반복하던 중.

[신성력을 흑마력으로 바꾸는 법]

‘정말이었어. 정말로 있었어…….’

안톤은 먼지가 쌓인 책을 지그시 내려다봤다.

‘정말 프랄 교수의 말대로야.’

하나 감동도 잠시뿐.

한 가지 의문이 그의 머릿속을 메아리쳤다.

‘근데… 왜 이렇게 먼지가 덮인 거지?’

엘프들도 리치도 모두 이와 연관된 연구로 혈안이 돼 있었다.

한데 어째선지 이 책은 아무도 보지 않았는지 먼지가 가득 덮여 있다.

‘극히 일부만 알고 있던 정보였던 걸까? 놈들도 이 책을 손에 넣고 싶어 했지만 흑카데미 안에 있어서 실패했다면… 에이씨,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일단 얼른 내용을 보자.’

조심스럽게 책장을 열고 내용을 읽어 내리기 시작하는 안톤.

‘흐음……’

한참 책을 읽던 안톤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이거… 엘프랑 리치의 연구 일지에 적힌 내용이랑 흡사한 것 같은데.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저 막무가내로 두 힘을 융합하려 했던 그들과 달리.

책에는 한 가지 방법이 기술되어 있었다.

‘두 힘을 융합하려면 먼저 두 힘을 담을 매개체가 있어야 한다라…… 이게 가능하긴 해?’

서로 다른 두 힘을 융합하는 것 자체도 불가능한 일에 가깝건만.

두 매개체가 있어야 한다니?

‘사람의 몸은 하나야. 그런데 어떻게 두 힘을 한 몸에 담을 수 있다는 건데?’

아무리 봐도 불가능하다고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설마 프랄 교수… 날 물 먹이려고 이런 짓을 한 건가?’

곧 고개를 젓는 안톤.

‘아니야. 일개 성기사 지망생일 뿐인 나에게 놈이 왜 그런 수고를 들이겠어?’

하지만 그가 말했던 책이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아… 난 도대체 왜 이곳까지 온 거지. 고작 이딴 쓸모없는 책이나 찾으러 그 위험을 무릅쓰고 온 게 아닌데……’

안톤은 씁쓸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제 뒤통수를 벅벅 긁적였다.

그러던 그때.

‘잠깐……’

불현듯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드는 안톤.

스륵-

그가 꺼낸 것은 엘프들의 창고를 털었을 당시 얻었던 정령석이었다.

‘매개체라는 건 결국 힘을 담아 둔 무언가야. 그렇단 건… 이 정령석도 매개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정령과의 계약에 사용되는 정령석.

그 안에는 정령이 좋아할 만한 힘이 가득할 터.

‘그럼 만약 내가 이걸 삼킨다면 난 내 몸과 정령석이라는 두 개의 매개체를 갖게 되는 게 아닐까?’

물론 이 가정들은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었다.

거기다가 정령석을 직접 섭취했다는 말은 그 어디에서도 들어 보지 못했다.

‘솔직히 미친 짓이라고밖에 생각되진 않지만… 이대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갈 순 없어! 없다고!’

이 빌어먹을 흑카데미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기에.

안톤은 될 대로 되어라라는 심정으로 손마디만 한 정령석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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