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화 외전 (15)
‘어떻게 저 남자가 여기에 남아 있는 거지?’
성카데미의 모든 관계자들이 모두 끌려간 상황에서 생각할 수 있는 가정은 하나뿐이었다.
“당신이 흑기사들과 내통한 거였어. 그래… 그런 거였어.”
“내통? 하하, 내통이라…….”
하나 어째선지 프랄 교수는 쓴 미소를 지어 보인다.
“뭐, 그렇게 생각할 만하지. 하지만 난 흑마법사들에게 이곳의 위치를 판 적이 없단다.”
“거짓말하지 마! 당신이 아니고서야 이곳의 위치를 알릴 사람이 누가 있겠어!”
“안톤, 잘 생각해 보려무나. 이곳에선 전서구를 날리는 것도 허락을 맡아야 하고, 무엇보다 난 다른 교수들의 감시하에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곳의 위치를 누설했을까?”
프랄 교수의 차분한 질문에 안톤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뭔가 허점이 있었겠지. 넌 그 허점을 이용해서 교수님들을 속인 거고.”
“하하하, 그래. 네 말대로 내가 허점을 이용했다고 치자꾸나. 그럼 왜 밀고자인 내가 흑기사들과 함께 돌아가지 않은 걸까? 이곳에는 더 볼일도 없을 텐데 말이지.”
“…….”
프랄 교수의 대답은 꽤나 이치에 맞는 것이었기에.
안톤은 곧장 반박을 할 수 없었다.
“…내게 준 성검을 회수하려고?”
“뭐? 푸하하하하하하!”
안톤의 대답이 그리도 재밌었던 걸까.
프랄 교수가 한참을 크게 웃다가 정색하듯 그를 바라본다.
“성검은 네게 준 작은 선물이야. 준 선물을 다시 뺏어 갈 정도로 난 야박하지 않단다.”
‘그럼 도대체 이곳에 남은 이유가 뭔데?’
안톤이 도무지 프랄 교수의 저의를 짐작하지 못하던 중.
프랄 교수는 그가 들고 있던 양피지를 가리키며 말한다.
“그건 마르코 교수의 연구 일지일 거다. 그렇지?”
“…….”
‘설마 이걸 뺏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안톤은 들고 있던 양피지 더미를 잽싸게 주머니에 욱여넣곤.
성검 발칸을 빼내어 프랄 교수에게 겨눈다.
“내가 이 자리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건 못 넘겨!”
“그래, 그건 네 거다.”
‘뭐?’
어깨를 으쓱이는 프랄 교수를 보며.
안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연구 일지를 원하는 게 아니었어?’
그의 목숨도, 연구 일지도, 성검도 원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그는 왜 이제껏 이곳에 남아 있던 것이란 말인가?
“네게 발칸을 줄 때 내가 뭐라고 했었지?”
“…레바논을 다시 부흥시키라고…….”
“그래. 넌 지금처럼 살아남아 무너진 레바논을 일으켜 세우면 된다.”
프랄 교수는 싱긋 웃으며 계속 말을 이어 간다.
“이번 외출로 넌 여러 가지 가능성을 얻었다. 그 가능성들을 이용한다면 레바논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도 그리 어렵진 않겠지.”
‘여러 가지 가능성? 설마… 내가 얻은 연구 일지를 말하는 건가?’
꼭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 같은 그의 발언에 안톤은 의구심을 감추지 못했다.
“당신… 정체가 뭐죠?”
“흑마법 방어학을 가르쳤던 교수일 뿐이지. 지금은 성카데미가 이 꼴이 된 탓에 무직 상태지만.”
“거짓말하지 마요! 어떻게 일개 교수가 성검을 갖고 있고, 또 흑기사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겠어요!”
안톤이 소리치자 프랄 교수는 그를 보며 빙긋 미소를 짓는다.
“내 말을 믿건 믿지 않건 그 모든 건 네 선택이란다.”
“…….”
안톤이 침묵하던 그때.
툭-
그의 발치에 무언가를 던지는 프랄 교수.
“이건…….”
“약간의 여비를 넣어 놨다. 그 정도 돈이면 몇 달은 생활하는 데 지장 없겠지.”
안톤이 슬쩍 주머니를 여니.
주머니 안에는 그의 말대로 금화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대체 왜 이렇게까지 날 도와주는 거지? 정말 그의 시험을 통과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도와준다고?’
그의 정체를 비롯하여 행동들 하나하나 모든 게 의문스러웠으나.
질문한들 프랄 교수가 대답해 줄 것 같진 않았다.
“…주신 돈은 감사하게 받죠.”
“그래. 끝까지 살아남아 발버둥 쳐 보려무나. 있는 힘껏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프랄 교수가 등을 돌리려 하자.
안톤은 그의 등에 대고 소리친다.
“어디로 가시는 거죠?!”
“발 닿는 곳 그 어디든.”
프랄 교수가 빙긋 웃으며 작별을 고하려던 찰나.
갑자기 그는 깜빡한 게 있기라도 했던 건지 손뼉을 친다.
“아 참, 그리고 한 가지 더. 흑카데미에 있는 ‘흑마력과 신성력의 결합법’이라는 책을 찾아. 분명 네게 도움이 될 거다.”
“…뭐라고요?”
흑카데미로 가라니?
지금 이 미친 흑마법사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란 말인가?
“그게 무슨…….”
“내 이야기는 거기까지다. 네 운명에 건투를 비마.”
“잠깐만요! 그게 무슨……!”
안톤이 화급히 프랄 교수를 붙잡아 보려 했으나.
휘이이이이잉-
“으윽…….”
돌연 그들 사이로 불어닥친 돌풍 탓에 안톤은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했다.
‘갑자기 웬 바람이…….’
이윽고 바람이 가시자 안톤은 천천히 눈을 떴으나.
프랄 교수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디로 사라진 거지? 흑마법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지만 아무리 고민한들 프랄 교수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도리가 없었기에.
안톤은 그가 남기고 간 말을 떠올렸다.
‘흑카데미로 가라…….’
한때 검은 대지에 있었던 흑카데미.
하나 지금은 레바논의 영토에 버젓이 자리를 잡고 운영 중인, 악랄한 흑마법사들을 키워 내는 마의 소굴과도 같은 곳이었다.
‘나보고 그런 곳에 가라고?’
솔직히 미친 자의 헛소리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프랄 교수… 분명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어.’
그가 흑마력과 신성력의 결합법이라는 책을 추천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터.
‘설마 내가 갖고 있는 연구 일지들이랑 뭔가 연관이 있는 걸까.’
흑마력과 신성력의 결합법.
그리고 리치와 엘프들이 연구하던 마력과 흑마력의 결합. 그리고 정령과 흑마력의 결합.
이 셋은 묘한 상관관계가 있었다.
‘그래. 그래서 나한테 그런 책을 알려 준 거겠지. 하지만…….’
어떻게 프랄 교수가 그가 획득한 연구 일지에 대해 알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성검도 그렇고, 진짜 정체를 알 수 없는 인간이야. 그보다 후… 어쩐다.’
프랄 교수의 조언대로 흑카데미를 가야 할지.
아니면 그의 말을 무시해야 할지 고민에 잠기는 안톤.
‘모르겠다……. 일단 성카데미를 수습하고 나서 생각하자.’
* * *
다음 날, 점심.
‘…레바논 님의 무릎 아래서 편히 쉬세요.’
둥근 무덤들을 보던 안톤은 기도를 끝마치곤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얼추 다 수습한 건가.’
성카데미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수습하여 매장하고.
쓸 만한 무기나 장비 따위가 없는지 찾아보는 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도적놈들이 흑기사가 된 건가? 어떻게 이렇게 알뜰하게 털어 갔지?’
하나 흑기사들이 휩쓸고 지나간 성카데미에서 건진 것이라곤.
먼지 묻은 빵 몇 덩이가 전부였다.
‘후우… 그보다 이제 어쩐다.’
성카데미를 수습하느라 미뤄 뒀던 고민거리가 다시금 그의 골치를 아프게 했다.
‘정말 흑카데미로 가야 하나?’
솔직히 성카데미가 잿더미로 변한 지금.
갈 곳이 마땅찮은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내가 무슨 수로 그 안에 들어갈 수 있겠어?’
기본적으로 흑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흑마법에 소질이 있는 자뿐.
하물며 성기사를 지망하는 그가 흑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전무했다.
‘하아…….’
무덤을 내려다보며 고민에 잠기는 안톤.
‘별수 없나. 일단 가 보기라도 하는 수밖에…….’
프랄 교수의 말을 따르는 게 좀 꺼림칙하긴 했으나.
지금의 그로선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래. 가서 그 책을 찾아보자. 만약 그 책이 정말 연구 일지와 관련이 있다면 뭔가 내게 도움이 될지도 몰라.’
어쩌면 이제껏 리치와 엘프들이 실패했던 연구를 그가 성공할지도 모른다.
‘좋아.’
땅을 딛고 일어난 안톤의 시선이 북쪽으로 향한다.
‘가 보자, 흑카데미로.’
* * *
한 달 뒤.
‘와…….’
흑마법사들이 새로이 이름 지은 왕도, 랄프성에 도착한 안톤.
그는 휘황찬란한 거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 흑카데미에서 가장 필요한 게 뭡니까? 그건 바로 지팡이지요! 혹여나 훈련 중 지팡이가 부서지기라도 하면 어쩝니까? 하지만 여기 흔들리는 바위가 만든 지팡이는 결코 부서질 일이 없습니다! 한번 보고들 가시지요!”
“엘리멘털 스파이더의 실을 이용하여 만든 이 로브로 말할 것 같으면……!”
거리는 흑마법사들로 보이는 수많은 학생들을 비롯하여.
그들을 상대로 제작한 물품을 팔고자 하는 장인과 상인들로 가득이었다.
‘이게 도시구나.’
어린 시절부터 거의 평생을 크먼백섬에서 살았던 안톤에게 있어.
이러한 광경들은 낯설고 생소한 것이었다.
‘엄청나네.’
성카데미의 질 낮은 빵과 묽은 수프와는 달리.
이곳은 먹을 것으로 가득했으며 사람들의 얼굴에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다들 행복해 보이네.’
흑마법사의 통치령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아냐. 정신 차려! 잊었어?! 여기는 흑마법사들의 본거지나 마찬가지라고!’
안톤은 흔들리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만약 실수로 성마법을 발현하기라도 하면 그날로 끝이야. 주의해야 해.’
다시금 긴장의 끈을 다잡은 안톤.
‘먼저 정보를 수집하자. 하지만 어디서 정보를…….’
[기억해라! 선술집은 수많은 정보들이 오가는 정보의 장이다!]
불현듯 헤르만 교수의 가르침이 머릿속을 스쳐 가자.
안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지. 좋아, 그러면…….’
안톤은 이리저리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마침 눈에 보인 선술집으로 들어갔다.
“어서 옵… 엉?!”
그를 반가이 맞이하려던 주인장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쏘아본다.
“이봐, 젖비린내 나는 꼬마한테 파는 술은 없어. 썩 나가!”
“돈이라면 충분히 있는데요?”
“하아… 돈이 중요한 게 아냐. 너희 같은 애들한테 술을 판 걸 흑카데미 사람들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난 그날로 끝이라고! 알아?!”
턱수염이 더부룩한 주인장의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안톤은 다시금 헤르만 교수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물론 너희가 선술집에 들어가면 애송이라 불리며 쫓겨나겠지. 하지만 그럴 때는 조용히 금화를 꺼내어 내밀어라. 돈이 없다면? 뭐, 쫓겨나야지.]
‘돈이라면 충분히 있으니까.’
주머니에서 금화 한 닢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리는 안톤.
“지금… 뭐 하는 거지?”
“이 정도면 충분할 거라 생각하는데요.”
“설마 네 녀석… 지금 돈으로 날 매수하려는 건가?”
남자가 거친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으나.
안톤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싫으시다면 다른 곳으로 가고요.”
“잠깐. 커흠… 기다려 봐라.”
거부하기엔 너무도 큰 액수였던 걸까.
잽싸게 금화를 낚아챈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그의 앞에 잔을 내밀었다.
“딱 한 잔만이다. 그 이상은 못 줘.”
‘이게 술…….’
잔에는 보랏빛 액체가 넘실거리고 있었는데.
간혹 교수님들이 기쁜 일이 있을 때 꺼냈던 병의 내용물과 비슷해 보였다.
‘딱히 술을 마실 생각은 없었지만… 조금만 먹어 볼까.’
슬며시 잔을 들어 한 모금 술을 삼키는 안톤.
‘우웨에엑…….’
하나 그의 기대와 달리 보랏빛 액체에선 쓴맛밖에 나지 않았다.
“푸하하하하하하하! 애송아, 그게 인생이다.”
남자는 오만상을 찌푸린 안톤을 보며 껄껄 웃었다.
‘끙…….’
안톤은 저만치 잔을 밀어내 버리곤.
남자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묻고 싶은 것?”
“흑카데미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안톤의 물음에 남자는 별 희한한 놈 다 본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뭐야. 너, 흑카데미의 학생이 아니었어?”
“네.”
“허 참… 그런 놈이 금화는 또 어디서 난 건지…….”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남자가 그를 보며 묻는다.
“너, 흑마법은 쓸 수 있고?”
“못 쓰죠.”
“그럼 하인이 되는 것 말곤 없어. 흑카데미에는 뭐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줄 알아? 날고 기는 가문의 자제들도 들어가려고 안달인 곳을…….”
남자가 뭐라고 계속 말을 이어 갔으나.
‘하인?’
안톤은 오직 한 가지 단어에 꽂혀 있었다.
‘하인이라…….’
흑마법사들을 섬기는 하인은 전부 노예라고 들었다.
‘일단 노예가 되야 하나?’
“그럼 일단 노예부터 돼야겠네요.”
“…뭐?”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남자.
“너… 어디 산골에서 살다 왔냐?”
“네.”
“허 참…….”
팅-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이던 남자가 손가락으로 금화를 튕기자.
안톤은 날아드는 금화를 받아 낸 뒤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뭐죠?”
“그 뭐냐… 그, 나름대로 열심히 나무를 팼든 농사를 지었든 해서 번 돈이었을 것 아니냐. 코흘리개 돈이나 탐낼 정도로 썩진 않았어.”
남자는 머쓱하게 코를 훔치곤 계속 말을 이어 간다.
“노예를 하인으로 삼던 건 다 예전에나 있었던 일이야. 어쨌건 하인이 되고 싶다 이거지?”
“네. 꼭이요.”
“어린놈이… 허 참…….”
남자는 어딘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를 보며 말을 이어 갔다.
“방법은 간단해. 하인 선발 시험을 통과하면 돼.”
‘하인… 선발 시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