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94화 (194/200)

◈ 194화 외전 (14)

스르륵-

인형처럼 반복하여 노를 젓는 안톤.

‘이만하면 충분히 벗어난 것 같은데.’

이미 숲은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기에 안톤은 주머니에서 지도 한 장을 꺼내었다.

‘어디 보자. 이쪽이 알탄숲이고 내가 여기서 나왔으니까… 이쯤 온 건가?’

반나절 정도 더 노를 저으면 다시금 항구로 돌아갈 수 있을 터.

‘큰 배를 훔쳤으면 좋았겠지만 그걸 혼자서 다루긴 어려우니…….’

이 조각배로 곧장 크먼백섬으로 가는 건 어렵다.

‘물자도 그렇고, 적어도 작은 상선이랑 노를 저을 인부들이 필요하니까.’

결국 항구로 돌아가 다시금 밀항을 하기 위한 배를 구해야만 했다.

‘뭐, 하지만 배를 얻진 못했어도 더 중요한 걸 얻었으니까.’

힐끔 가죽 자루를 바라보는 안톤.

‘도대체 저게 뭐라고 리치까지 와서 난동을 부렸던 걸까?’

안톤은 잡고 있던 노를 지지대에 올려 두곤 가죽 자루에 손을 뻗었다.

‘어디… 무슨 실험을 했는지 한번 볼까?’

우르르 쏟아져 나온 양피지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기 시작하는 안톤.

‘흠… 으음… 생각보다 어려운 말이 많네.’

마력 결합, 술식의 구성 등, 읽기 난해한 요소들이 많았으나.

안톤은 양피지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몇 시간이나 집중했을까.

‘잠깐…….’

연구 일지를 읽던 안톤의 표정이 점차 딱딱하게 굳어 갔다.

‘마력과 흑마력을 결합하려고 했다고? 그것도 백탑의 마법사들이?’

이미 한차례 정령과 흑마력을 결합하려던 놈들을 본 덕일까.

어느 정도 실험의 목적이 이해가 되자.

안톤은 비로소 그 리치가 무얼 하고자 했던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그보다 백탑이 그런 짓을 했다고?’

비록 그들이 흑탑을 마탑의 일원으로 받은 건 사실이었으나.

그래도 그들이 대륙의 정의를 대표하는 일원 중 하나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놈들도 흑마법사들과 결탁하고 만 건가…….’

악을 가까이했으니 악에 물드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하…….”

무거운 한숨을 내쉬는 안톤.

‘지금 이 대륙에 흑마법과 연관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긴 한 걸까?’

마법사들을 비롯하여 고고하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엘프들도 흑마법에 손을 뻗은 상황이다.

오히려 흑마법에 물들지 않은 존재를 찾기가 더 어려울 터.

“…….”

안톤은 멍하니 연구 일지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정말 우리가 다시 레바논을 일으키는 게 가능할까?’

거의 모든 이들이 흑마법과 관련된 작금의 세상에서 다시금 그들이 일어날 수 있을지.

묘한 회의감마저 들었다.

‘성카데미의 수업이 훌륭하긴 하지만…….’

한 해 성카데미를 수료하는 학생의 수는 고작 삼백 명 남짓이다.

‘거기다가 남은 기사들을 다 합한다고 해도… 삼천은 되려나.’

삼천의 병력으로 흑마법에 물든 대륙을 상대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이대로는 안 돼. 이대로는 미래가 없어. 하지만 방법도 없어.’

“하… 차라리 보지나 말 것을…….”

만약 연구 일지를 안 봤다면 그는 지금도 백탑과 드루이드 등.

대륙의 정의를 자처하고 있을 그들과 동맹을 맺고 흑마법사들을 쳐부수는 꿈을 키워 나갔을지도 모른다.

하나 현실은 잔혹했다.

‘난… 난…….’

비록 긴 시간을 산 것은 아니었으나.

일생을 흑마법사들을 죽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살아왔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나 그 신념이 거대한 현실의 벽에 가로막히려 하자.

안톤은 큰 혼란함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이 실험… 신을 만드는 실험이라고 했었지. 그렇단 건… 나도 흑마력에 손을 뻗는다면 강해질 수 있는 건가?’

흔들리는 눈으로 연구 일지를 바라보던 안톤.

“헉…….”

순간 그는 몸을 흠칫거리곤 손을 들어 제 뺨을 힘껏 후려쳤다.

‘정신 차려! 아무리 힘이 중요하다고 해도 그 쓰레기들의 힘을 탐해선 안 돼!’

안톤은 애써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곤 다시금 연구 일지를 훑는다.

그러던 중, 한 가지 의문이 그의 가슴에 자리했다.

‘그런데 왜 다들 흑마력만 합치려고 하는 거지?’

마력과 흑마력을 결합하려 했던 리치.

그리고 정령과 흑마력을 결합하려고 했던 엘프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한 가지 힘과 흑마력을 결합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정령과 마력을 결합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근데 왜 흑마력만을 고집한 거지? 결합하는 데 꼭 흑마력이 필요해서 그랬던 걸까?’

그러나 연구 일지에는 그의 의문을 해소해 줄 내용은 들어 있지 않았기에.

안톤의 의문 또한 풀리지 않았다.

‘후우… 모르겠다.’

한숨을 내쉰 안톤이 다시금 노를 잡는다.

‘일단 성카데미로 돌아가자.’

정답이 나오지 않는 연구 일지에 시간을 쓰는 건.

붙잡힌 동료들을 구한 뒤에 해도 충분하다.

스르르륵-

망망대해에 떠 있던 조각배가 다시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 * *

한 달 뒤.

‘으으… 팔이야.’

조각배에서 내린 안톤이 떨리는 두 손을 내려다본다.

‘이것보다 큰 배를 구했으면 조금은 편했을 텐데.’

몇 주 전, 항구에 도착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도망자 신세인 그가 이보다 큰 배를 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안톤은 몰래 식량과 물을 사는 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파도가 잔잔해서 다행이었어.’

만약 바다가 거칠게 날뛰기라도 했다면.

그는 꼼짝없이 물고기들의 밥이 될 수밖에 없었을 터.

‘전부 레바논 님의 은혜 덕이지.’

가죽 자루를 다 챙기곤 슬며시 조각배를 바라보는 안톤.

‘날 이곳까지 무사히 데려다줘서 고맙다.’

그는 조각배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곤.

성카데미를 향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음… 혹시 모르니까 이건 숨기는 편이 낫겠지?’

안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연구 일지가 담긴 가죽 자루를 땅 깊이 묻곤.

근처의 나무에 그만이 알 수 있는 작은 표식을 새겼다.

‘좋아. 이제 이동해 볼까.’

동료의 구출을 위해 허겁지겁 성카데미를 향해 달려가는 안톤.

숲길을 지나 이윽고 성카데미 인근에 위치한 공터에 도착할 무렵.

화르르르륵-

‘…어?’

안톤은 무언가 일이 잘못됐다는 사실을 느꼈다.

‘저게 뭐야……. 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거지?’

성카데미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와 불길을 본 안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안톤이 다급히 박살 난 성문을 지나 성카데미로 들어서려던 그때.

“샅샅이 뒤져라! 반항하는 놈들은 죽여도 좋다!”

“예, 단장님!”

낯선 이들의 목소리가 성카데미를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저들은…….’

검은 갑옷과 투구를 눌러쓴 기사들.

저들은 분명 주신교의 흑기사들이었다.

‘놈들이 여길 어떻게 안 거지?’

설마 붙잡힌 동료들이 이곳의 위치를 털어놓은 걸까?

아니면 밀고자가 있었던 걸까?

수많은 가정들이 안톤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던 그때.

“어리석은 놈들. 꿇어라!”

“크윽…….”

흑기사들이 밧줄에 엮여 있던 학생들과 교수들을 겁박한다.

‘아칸 교수님… 마르코 교수님도……. 비스타… 엔리르…….’

그 모습을 본 안톤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픈 마음을 억눌러야만 했다.

‘참아… 참아… 지금 내가 나가 봐야 도움이 되질 않아.’

그러나 안톤은 혹시 모를 기회가 생길 걸 대비하여.

흑기사들의 시선을 피해 낮은 성벽을 타고 올라가 상황을 주시했다.

“너희는 주신교의 교리를 어기고 성수 밀매와 부당한 치료를 시행했으며, 또한 이교도를 늘리는 등 대륙에 혼란을 야기했다. 동의하나?”

“성수를 팔고 환자를 치료한 게 죄라고?! 개소리 집어치워!”

한 학생이 흑기사의 발언에 참지 못하고 소리치자.

흑기사의 투구 사이로 비웃음이 흘러나온다.

“너희가 벌인 죄악을 나열하자면 하루로는 부족하겠지. 죄악의 대가는 즉결 처형이다. 아나?”

“퉤! 알 게 뭐…….”

서걱-

흑기사의 투구에 침을 뱉었던 학생의 몸이 힘없이 허물어지자.

‘미레안!’

안톤은 핏발 선 두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주신께서는 너희 같은 극악한 범죄자들도 아우르실 정도로 관대하시다. 만약 너희가 레바논을 저버리고 진심으로 주신을 따른다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거다. 레바논을 저버리고 진심으로 주신을 따르겠나?”

“…….”

흑기사의 물음에 누구 하나 순순히 대답하는 이가 없자.

흑기사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 간다.

“30초를 주지. 그 안에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면 처형하겠다.”

“…….”

그러나 30초가 흐를 때까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자.

흑기사단장이 수하들을 보며 고개를 까딱인다.

“시작해.”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교수들의 뒤에 서 있던 흑기사들이 검을 드높이 쳐든다.

서걱-

“꺄아아아아아악!”

“아칸 교, 교수님…….”

‘빌어먹을 새끼들이……. 빌어먹을… 빌어먹을!’

언제나 냉정히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려 노력했던 안톤이었으나.

더 이상 이성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죽인다. 최소한 한 놈이라도 데리고 간다. 반드시!’

안톤이 들끓는 분노를 느끼며 검을 빼 들려던 그때.

지그시 하늘만을 바라보던 마르코 교수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소리친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말거라. 언제나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해라. 나의 가르침을 기억해라!”

‘교수님… 설마…….’

안톤이 떨리는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던 중.

마르코 교수가 계속 소리친다.

“우리의 염원은 여기서 끝이 나겠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다.”

‘아아…….’

“나의 집무실에 가거든 숨겨진 공간이 있을 거다. 넌 알고 있겠지. 그곳을 찾거라. 그리고 무너져 가는 레바논을 다시 일으켜…….”

“시끄럽군.”

서걱-

마르코 교수의 외침은 채 마무리되지 못한 채.

핏물과 함께 지면으로 사그라진다.

‘교수님! 교수님!’

안톤이 널브러진 마르코의 시체를 보며 속으로 오열하던 그때.

흑기사단장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시체를 보며 말한다.

“집무실에 숨겨진 공간이 있다고? 희한하군. 구태여 그 사실을 우리에게 이야기한… 음… 쥐새끼가 있는 건가.”

갑자기 흑기사단장이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안톤은 빼꼼 내밀고 있던 고개를 얼른 수그린다.

“…….”

잠시 성카데미 내를 둘러보던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기사를 바라본다.

“너희, 방금 이놈이 말했던 곳을 수색해라.”

“예!”

황급히 성카데미 안으로 들어가는 기사들.

몇십 분이나 지났을까.

“단장님! 놈이 말했던 집무실을 수색해 봤지만 놈이 말한 특수한 공간은 없었습니다!”

“…그래? 단순한 시간벌이였던 모양이군. 됐다.”

다시금 고개를 돌려 학생들을 내려다보는 흑기사단장.

“너희는 죽기에는 아직 젊다. 그러니 현명한 선택을 내려라.”

“저, 저는… 주신님을 섬기겠습니다.”

“저, 저도…….”

교수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걸까.

한 학생을 시작으로 누구 할 것 없이 주신을 섬기겠다고 소리치기 시작한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을……. 좋다. 이들을 끌고 가라. 본교로 돌아간다!”

“예!”

몇십 분 뒤.

흑기사들이 성카데미를 빠져나가자.

“…….”

숨죽이고 있던 안톤이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아칸 교수님… 마르코 교수님…….’

두 교수의 시체를 한참이고 바라보던 그는 검집을 들곤 땅을 팠다.

이윽고 두 시체를 안장할 정도로 구덩이가 커지자.

안톤은 두 사람의 목과 육신을 구덩이에 넣었다.

‘부디 레바논 님의 곁에서 평안하시길……. 그리고 두 분의 복수는 제가 반드시… 반드시 실현하겠습니다.’

두 주먹을 부서지라 쥐는 안톤.

그는 한참이고 무덤 앞을 떠나지 못하다가.

흐느적거리듯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곳인가…….’

안톤이 도착한 곳은 휑한 연무장이었다.

퍼억, 퍼억-

이윽고 말없이 연무장의 땅 한 부분을 파는 안톤.

얼마나 팠을까.

철컥-

검집에 무언가가 걸린 듯한 느낌이 들자.

안톤은 검집을 옆에 던지곤 땅에 묻혀 있던 것을 천천히 꺼내어 든다.

‘마르코 교수님…….’

사실 집무실에 비밀 공간이 있다는 그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그가 진짜로 말하고픈 장소는 바로 이곳이었으니 말이다.

‘결국 비밀을 지켜 드리는 데는 실패했네요. 죄송해요, 교수님. 죄송…….’

안톤은 붉어지려는 눈시울을 애써 끔뻑여 진정시키곤 상자를 열었다.

‘이건…….’

안에는 딱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검과 갑옷.

그리고 양피지 더미가 자리하고 있었다.

‘교수님의 복수를 하는 그날까지… 이건 제가 잠시 빌리도록 할게요.’

안톤은 검을 왼쪽의 허리춤에 매달곤 갑옷을 챙겨 입었다.

‘근데 이건 왜 넣어 두신 거지?’

안톤은 양피지 더미에 묻은 먼지를 후욱 불어 내곤.

양피지를 훑어 나갔다.

‘잠깐… 마르코 교수님께서 이걸 어떻게…….’

안톤이 부릅뜬 눈으로 양피지를 보던 그때.

“역시 넌 살아남았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의 등 뒤를 울려왔다.

“누구냐!”

그에 반사적으로 검을 들고 몸을 돌린 안톤.

하나 적의가 가득했던 그의 눈에 당혹감이 서려 간다.

“프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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