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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93화 (193/200)

◈ 193화 외전 (13)

스스로를 언데드화해 영생을 산다고 알려진 리치.

그런 리치가 왜 갑자기 이곳을 습격한 것일까?

‘연구일지를 훔쳐 갔다는 걸 봐선, 엘프들이 리치의 중요한 물건을 훔쳐 간 것 같긴 한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어쨌건 이건 기회야.’

엘프들의 시선이 리치에게 쏠린 지금이야말로 이곳을 나갈 수 있는 적기일 터.

‘아까 보니 호수의 선착장에 배가 있었지.’

그걸 타고 바다로 나간다면.

다시 성카데미로 돌아가는 것도 가능하리라.

‘좋아. 일단 얼른 여기서 내려가자.’

안톤이 감옥으로 사용되던 드높은 나무에서 조심스럽게 내려가던 그때.

[나를 능멸한 대가는 죽음이다!]

아크라 불린 리치가 엘프들을 보며 뼈마디만이 남은 손을 뻗는다.

그러자.

스스스스슥-

엘프들의 서식지 곳곳이 검게 물들어 가기 시작하더니.

우르르르르릉-

지반이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그 위에 있던 나무들과 집들 또한 깊은 구덩이 속으로 떨어진다.

“화살을 쏴!”

“전사들은 무기를 들어! 어떻게든 놈을 저지해야만 해!”

파바바바바박-

그에 대항하듯 엘프들은 정령의 힘이 담긴 화살을 쏘거나.

무기를 들고 용감하게 리치를 향해 달려갔으나.

[어리석은 놈들. 너희는 결코 날 죽일 수 없다.]

리치의 머리 위에 생겨난 검은 구체가 순식간에 그들을 직격한다.

콰과과과광-

“크억!”

“무, 무슨 힘이…….”

구체에 직격당한 엘프들은 단말마의 비명을 끝으로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저게… 리치.’

어느덧 나무에서 내려온 안톤.

그는 나무 뒤에 숨어 리치의 전투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저런 걸 이기는 게 가능하긴 한 걸까?’

라이프베슬을 부수지 않으면 죽지 않는 상대를 무슨 수로 이길 수 있을까?

‘엄청난 상대긴 하지만…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이곳의 엘프들이 흑마력을 사용하려고 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그에게 있어 리치나 엘프들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는 놈들이었다.

‘서로 싸우다가 양쪽 다 죽었으면 좋겠네. 그보다 호숫가가… 저쪽이었지?’

안톤이 기억을 되짚으며 조심히 호숫가를 향해 다가가던 그때.

“아크!”

한 엘프의 외침이 불타는 숲을 울린다.

[허허허, 이게 누군가. 내 연구일지를 훔쳐 간 쥐새끼가 아닌가?]

‘저건… 말레프?’

안톤은 리치의 앞에 나선 엘프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응시했다.

“흥, 네 연구일지는 틀렸어! 네 연구는 실패했다고! 네놈 때문에 우리 동포들이 무슨 일을 겪은 줄 알아?!”

[허허, 내가 도둑의 사정까지 알아야 하나?]

리치의 얼굴 사이로 기괴한 쇳소리가 흘러나온다.

[가만… 네놈들… 설마 실험을 한 건가?]

“…….”

[그래. 그런 거였군. 크허허허, 어리석은 놈들. 나조차 실패를 거듭하던 연구를 너희가 성공할 거라 생각했나?]

리치의 얼굴에서 비웃음 소리가 흘러나오자.

말레프는 그를 죽일 듯 노려보며 소리친다.

“네 연구는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어! 서로 다른 두 힘을 결합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그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 하지만 그 불가능 속에서 태어난 게 주신이다.]

‘…이건 또 무슨 말이야?’

그들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듣는 안톤.

[놈은 신성력과 흑마력의 결합을 성공했다. 그렇단 건 나 또한 가능하다는 이야기겠지.]

“네놈… 설마 그래서 신을 저버리고…….”

[허허허, 그래. 리치가 됐다. 오직 그 한 가지 가능성을 위해서 말이다.]

‘신을 저버렸다고?’

그렇단 건 저 리치도 본래는 신관이나 성기사였다는 걸까?

[어쨌건 네놈들도 그 실험을 진행한 모양이군. 아까부터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던 저게 그 결과물인가?]

리치는 유독 한자리에 몰려 있는 나무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서걱-

검은 반달 형태의 기운이 나무들을 향해 쏘아져 나가 나무들을 베어 버리자.

[아아아아악!]

잘려 나간 나무들 사이에서 피 분수가 터져 나와 대지를 적셔 간다.

“아크! 네놈이!”

[크허헣, 아무래도 정답이었던 것 같군.]

“죽이겠다! 반드시 네놈을 죽이겠어!”

말레프가 악귀 같은 표정을 한 채 검을 들자.

리치의 얼굴에선 무덤덤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네가 나를? 크허허헣, 재미있는 농담이군. 날 죽일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을 텐데?]

“재생할 수 없을 때까지 죽이고 또 죽이겠다!”

말레프의 검 위로 선명한 빛이 흘러나오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안톤의 두 눈이 동그래진다.

‘저건… 소드마스터였나?’

저 오러의 힘이나 크기로 미루어 봤을 때.

말레프는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것이 분명해 보였다.

“죽어!”

말레프의 공세는 눈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빨랐다.

그저 검의 궤적이 어렴풋이 보일 때마다.

챙-

리치의 몸을 두르고 있는 검은 방벽에 큰 균열이 간 걸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무의미한 짓을 하는군. 난 이미 죽음을 초월했다.]

“그 죽음조차 베고야 말겠다!”

‘좋아. 지금이 기회인 것 같은데.’

모든 시선이 두 놈에게 집중된 지금이야말로.

이곳을 빠져나가기 좋은 적기일 터.

스슥-

안톤은 호수를 향해 슬며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곳곳에 생겨난 구덩이를 지나 박살 난 민가를 엄폐물 삼아 이동하던 그때.

다시금 리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허허허, 아직도 깨닫지 못한 건가? 네놈은 결코 날 죽일 수 없다.]

“닥쳐!”

[지금이라도 패배를 인정하고 네놈들의 연구일지를 가져와라. 그리하면 적어도 살아남은 엘프들의 목숨은 보장하지.]

‘엘프들의 연구일지라…….’

연구일지라 함은 아마도 상반된 두 힘을 결합하려다 실패한 것들을 기록한 기록물일 터.

‘그런 걸 쉽게 내놓을 리 없겠지.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야.’

안톤이 서둘러 걸음을 내디디려던 중.

불현듯 한 가지 기억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저긴 뭔가요?”

“저긴… 창고다.”

“창고요? 그럼 그 안도 구경할 수 있겠네요?”

“아니. 절대로 안 된다, 절대로.”

처음 말레프가 마을 구경을 시켜 주던 중.

유독 한 곳에서 예민한 기색을 보였던 그곳, 창고.

‘설마 그곳이 창고가 아니라 엘프들이 연구하던 곳은 아니었을까?’

물론 어디까지나 그의 상상일 뿐이었으나.

안톤은 냉정히 생각을 이어 갔다.

‘그래. 이렇게 쓰레기 같은 대우를 받았는데 그냥 갈 수는 없지.’

정말 말레프의 말대로 그곳이 창고라면 안에서 괜찮은 물건들을 갖고 나오면 될 것이고.

만약 정말 그곳이 연구 시설이라면…….

‘연구와 관련된 건 싸그리 싹싹 갖고 나와야지.’

마침 창고는 그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 있었기에.

안톤은 얼른 걸음을 재촉했다.

콰과과과과광-

쓰레기들의 격렬한 전투가 대지를 울리는 가운데.

어느덧 창고 앞에 도달한 안톤.

‘문은… 열려 있네. 좋아. 들어가 볼까.’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곤.

서둘러 창고 안으로 진입했다.

‘흐음…….’

창고에 자리한 거대한 나무 선반들을 살펴 나가는 안톤.

‘정말 단순한 창고였던 건가?’

선반에 쌓여 있는 가죽 자루에는 식량이나 자질구레한 비품들이 담겨 있을 뿐.

그 어디에도 실험과 관련된 물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단순한 창고라면 왜 그렇게 정색을 했던 거지?’

거듭된 수색에도 별다른 수확을 얻지 못한 안톤.

‘할 수 없나. 너무 오래 이곳에 있을 순 없어. 이만 나가야겠…….’

그가 수색을 포기하고 창고를 나서려던 그때.

철컥-

“어억!”

무언가가 그의 발에 걸려 안톤은 몸을 휘청거리다가 겨우 자세를 다잡았다.

‘방금 건… 잠깐.’

어째선지 바닥에는 작은 쇠고리 같은 것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저것에 발이 걸렸던 모양이었다.

‘생긴 건 문고리처럼 생겼는데 이게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안톤이 의아한 마음에 쇠고리를 힘껏 잡아당기자.

드드드드드득-

쇠고리에 가해진 힘을 따라 숨겨져 있던 문이 옆으로 열리기 시작한다.

‘호오…….’

안톤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입구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 안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 * *

한편, 같은 시각.

“후우… 후우…….”

[허허허, 이제 깨달았나? 아무리 나를 베더라도 넌 결코 날 죽일 수 없다.]

“시끄러워…….”

거친 숨을 몰아쉬는 말레프.

‘빌어먹을…….’

인정하기 싫지만 리치의 말이 맞다.

아무리 그녀가 온 힘을 다하더라도 그녀는 그를 죽일 수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놈을 놔둘 수도 없는 노릇.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허허허, 고민이 많은 모양이군. 좋네, 그럼 이렇게 하지. 네놈들이 훔쳐 간 내 연구일지와 네놈들의 연구일지, 그 두 가지를 내놓는다면 너희의 죄를 용서하도록 하겠다.]

“…….”

리치의 제안에 말레프는 고민에 잠긴다.

‘연구일지를 돌려주면 물러나겠다?’

솔직히 놈을 죽일 자신이 없는 이상.

놈의 제안은 꽤나 달콤한 것이었다.

‘어차피 사본이 있으니 돌려주고 놈을 보내는 게 나을지도 몰라.’

그와의 전투에도 그녀는 살 수 있겠으나.

동포들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정말이야?”

[허허허, 너희의 목숨을 걷어 가 봐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게 필요한 건 연구일지뿐이다.]

리치의 제안에 고심에 잠겨 있던 말레프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연구일지를 돌려주지. 단, 돌려받거든 바로 물러나야 할 거야.”

[허허, 물론이지.]

그에 말레프는 옆에 있던 엘프를 향해 손을 까딱인다.

“메안느! 창고에 가서 연구일지를 가져와. 우리 것까지.”

“아, 알겠어요!”

명령을 받은 엘프가 허겁지겁 창고로 달려간 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마, 말레프 님! 말레프 님!”

어째서인지 안색이 하얗게 질린 메안느가 그들을 향해 뛰어온다.

“연구일지는?”

“그게… 그게…….”

메안느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던 그때.

화르르륵-

창고 위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무슨……!’

그 모습을 본 말레프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던 중.

울상이 된 메안느가 울먹이듯 말한다.

“누, 누군가 창고에 불을 지른 모양이에요.”

“…뭐라고?”

“열심히 불길을 제압하고 있긴 하지만, 이미 불길이 크게 번져 버려서…….”

‘어떤 새끼가 감히!’

말레프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눈을 부릅뜨던 사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리치, 아크의 입에서 무거운 쇳소리가 흘러나온다.

[크허허헣… 그게 너희의 대답인가?]

“아니… 그게…….”

[너희의 마음은 잘 알았다. 그렇다면 나 역시 너희의 마음에 보답해야겠지.]

어느새 손에 지팡이를 쥔 리치의 입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나온다.

[절망, 비탄 그리고 공포. 모든 것은 죽음으로 이르기 위한 시발점일지니…….]

“잠깐! 기다려!”

그러나 말레프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리치의 영창은 멈출 생각을 않았다.

이윽고 리치의 영창이 끝나자.

파스스스슥-

그를 중심으로 녹색의 기운이 삽시간에 퍼져 나가.

곧 숲 전역을 아울렀다.

“이, 이건……!”

“커헉!”

기운의 영역 안에 있던 엘프들이 각혈하며 쓰러져 나가기 시작하자.

“무슨 짓을 한 거야!”

분노한 말레프가 포효하며 검을 휘두른다.

챙-

지팡이로 그녀의 일격을 막아 낸 리치, 아크의 입에서 비웃음이 흘러나온다.

[크허허허, 약속하지. 너희의 어리석은 결정으로 인해 대륙에 있는 엘프들은 그 씨가 마를 것이다. 약속하마.]

“그러니까 우리가 한 게 아니라고!”

* * *

숲속의 엘프들이 독기에 범벅이 되어 죽어 가던 그 시각.

스르륵-

작은 조각배 한 척이 호수의 물길을 타고 앞으로 나아간다.

“노를 젓자, 노를 저어. 열심히 젓다 보면 목적지가 보이겠지.”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숲을 뒤로한 채.

콧노래를 부르며 노를 젓는 안톤.

뱃머리 부근에는 딱 봐도 묵직해 보이는 가죽 자루가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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