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92화 (192/200)

◈ 192화 외전 (12)

‘…뭐?’

저 나무들이 엘프라니?

도대체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설마 이게 엘프식 농담인 걸까? 아니면 진심?’

안톤이 크게 혼란스러워하던 중.

“저기 봐, 장로님께서 인간을 데리고 오셨어.”

“저렇게 인간을 막 데리고 와도 되는 거야?”

안톤을 본 엘프들이 그들을 보며 낮게 수군거린다.

그러나 안톤은 그들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

그저 게슴츠레한 눈으로 말레프를 바라볼 뿐.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이야.”

“혹시… 엔트와 엘프 사이에서 태어난 하프 블러드는 아니죠?”

안톤의 물음에 말레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깔깔 웃는다.

“엔트는 정령이야. 정령과 엘프의 하프가 있을 수 있을까?”

“그럼 저들은 왜 저런 모습을 하고 있는 거죠?”

“그건…….”

말레프의 입가에 쓴 미소가 번진다.

“저들이 하늘의 순리를 넘봤기 때문이지.”

“하늘의… 순리요?”

그러나 안톤의 물음에 더 대답할 생각이 없었던 걸까.

“대화는 이쯤 하자. 치유가 가능할 것 같아?”

말레프는 나무들을 보며 말을 돌린다.

“적어도 무슨 병에 걸렸는지 알아야 치유를 하죠. 그리고 저 병… 전염병은 아니죠?”

“안심해. 그랬으면 진작 불태웠을 거니까.”

‘전염병은 아닌데 무슨 병인지 알려 줄 수 없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말레프를 바라보는 안톤.

‘그래. 네가 알려 줄 생각이 없다면 내가 알아내면 그만이지.’

옷소매를 걷은 안톤이 엘프라 불린 나무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한다.

‘흠…….’

이리저리 나무 주위를 걸으며 나무의 상태를 살피는 안톤.

‘이게 엘프라는 게 진짜 믿기질 않네.’

말레프의 말이 없었다면 그저 흔하디흔한 나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건 정말 병인 걸까?’

정말 엘프들 사이에 퍼진 질병일 수도 있겠으나.

누군가가 그들에게 강력한 저주를 걸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자를 나무로 바꾸는 저주는 들어 본 적도 없단 말이지…….’

끝없는 의문이 머릿속을 휘저었으나.

안톤은 일단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부터 해 보기로 결정했다.

뽕-

먼저 안톤은 주머니에서 둥근 유리병을 꺼내어.

그 내용물을 조심스럽게 나무 주변에 흘렸다.

‘만약 이게 병이라면 상황이 조금은 호전될 거야.’

성수에는 강한 회복 능력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몇 분 뒤.

사사사삭-

[아아아…….]

나무의 가지 부분이 엘프의 하얀 살결처럼 변해 가기 시작하자.

안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행이야. 효과가 있어!’

말레프의 말대로 이건 좀 특이한 병에 불과했던 모양이었다.

‘이러면 성수만 대량으로 가지고 돌아오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

콰드드드득-

[아아… 싫어! 싫어! 그만! 그마…….]

하나 어째서인지 엘프의 하얀 살결로 바뀌었던 부분이 무언가에 잠식되기라도 한 건지.

순식간에 나무의 형태로 바뀌어 버렸다.

‘이건… 아니야. 아직 확신하긴 일러.’

이번에는 두 손을 들어 지면에 손을 뻗는 안톤.

웅웅웅웅-

그러자 성스러운 신성력이 그의 몸에서 흘러나와.

대지를 거쳐 나무들을 적셔 간다.

[아아… 그만!]

‘성마법도 통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다시금 엘프에서 나무로 변해 가자 안톤은 눈을 부릅떴다.

‘이건 병이 아니야. 이건…….’

저주다.

그것도 성수의 효능조차 가볍게 무시해 버리는 강력한 저주였다.

“이건 단순히 평범한 병이 아니에요.”

“역시 저주였나…….”

무언가 짐작 가는 게 있는지 혀를 차는 말레프.

‘분명 뭔가 아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왜 말을 해 주지 않는 거지? 알려져선 안 되는 일인 건… 잠깐…….’

순간 안톤은 피부에 서리가 내려앉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만약 저 저주가 세간에 알려져선 안 되는 저주라면…….’

그가 저들의 치유를 성공하든 실패하든 그는 엘프들의 손에 죽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였다.

‘설마 그 엘프들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야.’

안톤이 바삐 머리를 굴리던 그때.

스스슥-

“저, 정말 괜찮은 걸까? 이런 짓을 했다가 정령신들의 노여움을 사기라도 한다면…….”

“이미 마법사들도 이런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어. 만약 놈들까지 실험을 성공하기라도 한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뒤처지게 되는 거라고!”

갑자기 주변의 광경은 사라지고 엘프들의 회의장으로 보이는 장소가 안톤의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정령과 흑마력의 결합이라니……. 이건 미친 짓이라고! 정령들이 우리를 가만 놔둘 것 같아?”

“그렇게 무서우면 넌 빠지든가. 하지만 그 목숨은 두고 가야 될 거야.”

누군가의 경고에 거듭 불안감을 보이던 목소리가 잦아든다.

“그 하잘것없던 흑마법사들이 대륙의 패권을 잡은 지도 10년이 넘었어. 우리라고 대륙의 주인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그렇긴 하지만…….”

“후우… 준비는 끝났어. 시작한다.”

회의를 주도하던 엘프가 술식을 읊기 시작하자.

[불렀는가, 나의 계약자여.]

불길에 휘감겨 있는 도마뱀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 샐러맨더.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무엇이든 말만 해라. 네 의지가 곧 나의 의지이니.]

“그리 말해 주니 고맙군. 그럼 시작해.”

엘프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촤르르르륵-

술식이 가득 적혀 있는 검은 붕대 같은 것이 날아들어 샐러맨더를 포박하기 시작했다.

[계약자여!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미안하게 됐어. 하지만 엘프의 번영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계약자여! 계……!]

이윽고 붕대가 샐러맨더의 몸을 완전히 휘감자.

엘프들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나지막이 말한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번영을… 위하여.”

스스슥-

안톤의 머릿속을 스쳐 가던 광경은 그것으로 끝났다.

‘방금 건… 뭐지?’

단순한 환상이라 치부하기엔 광경들이 너무도 현실성이 있었다.

‘대체 왜 그런 환상이…….’

어째서 그가 그런 환상을 보게 된 건진 모르겠으나.

한 가지는 확실해 보였다.

‘저들이 저주에 걸린 이유가 정령으로 실험을 진행해서 그랬던 건가.’

자연 그 자체라고 불리는 정령과 흑마력을 결합하는 실험.

아마도 이곳의 엘프들은 그런 미친 짓을 벌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아니, 왜 그런 건진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이 엘프들이 흑마력을 취급했다는 것이었다.

‘가장 자연과 가깝다던 존재들이 그딴 짓을 벌여?’

흑마법사의 힘을 이용하려는 이들과 더 이상 상종할 수 없다.

아니, 상종하기도 싫었다.

‘누가 저주를 걸었는지 몰라도 잘 걸었네. 저런 놈들은 평생을 속죄하며 살아야 돼.’

안톤이 싸늘한 눈으로 나무들을 노려보던 중.

말레프가 그를 보며 묻는다.

“해주가 가능할까?”

“해주를 하려면 일단 저 저주가 어떤 저주인지부터 알아야죠. 저주의 종류를 명확히 알고 있지 않으면 해주는 쉽지 않아요.”

‘그리고 설사 알고 있다고 해도 너희를 위한 해주는 없어.’

“성검, 발칸을 이용하면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야?”

‘그래. 당연히 그 질문을 하겠지.’

애당초 말레프가 그에게 관심을 보인 것도 결국 성검 때문이었으니까.

“당신과 만나기 전, 저는 성검의 힘을 이용해서 추격을 뿌리쳤어요. 그 탓에 당장 성검을 사용할 수는 없어요.”

물론 거짓말이었다.

아직 그는 성검, 발칸을 제대로 다루지조차 못했으니까.

“으음… 그래? 처음과는 이야기가 조금 다른 것 같은데?”

“글쎄요? 애당초 물어보긴 하셨던가요?”

안톤의 물음에 말레프는 이맛살을 찌푸린다.

“좋아. 그럼 다시 발칸을 사용하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글쎄요. 적어도 두 달은 필요로 하지 않을까 싶네요.”

“…두 달?”

썩어 간 말레프의 표정을 본 안톤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려 성검, 발칸입니다. 힘을 사용하면 그 대가는 온전히 시전자가 감내해야 하죠. 두 달은 짧은 기간이 아니에요.”

“으음…….”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 여긴 걸까.

말레프는 고심하다가 입을 뗀다.

“좋아. 그럼 네가 완전히 회복하기 전까지 이곳에 머무르는 걸로 하자.”

“…이곳에 머무르라고요?”

“어차피 지금 갈 곳도 없잖아?”

‘뭐,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말레프가 저런 제안을 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이치였으니까.

‘이제 여기가 승부처다.’

“좋아요. 대신 당신들이 흑기사들에게 끌려간 제 동료들을 구해 준다면, 순순히 협조하죠.”

“네 동료들을 구해 달라고?”

“네. 저는 당신의 동포를 돕고, 당신은 제 동료들을 돕는 거죠.”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서로에게 득이 되는 거래일 터.

“…….”

그러나 어째선지 말레프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아 보였다.

“그건 불가능해.”

“불가능하다고요?”

“네 동료들은 주신교의 손아귀에 넘어갔어. 그런데 그들을 구해 달라고?”

말레프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안톤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다.

“네, 뭐가 문제죠?”

“그들을 구하려면 이쪽의 희생이 얼마나 나올 것 같아?”

‘알 게 뭐야?’

솔직히 양쪽이 싸우다가 전멸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겠으나.

안톤은 냉정히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불가능하다는 건가요?”

“그래, 불가능해.”

“그럼 우리의 거래는 여기까지겠네요.”

안톤이 일말의 미련도 없이 등을 돌리려 하자.

말레프가 얼른 그의 어깨를 붙잡는다.

탁-

“뭐 하는 거죠?”

그녀의 손을 쳐 내곤 경멸 어린 시선으로 말레프를 쏘아보는 안톤.

“이럼 안 되지. 넌 환자를 성실하게 치유하고, 난 네게 밀항할 배를 구해 준다. 그게 조건이었잖아.”

‘그래. 약속과 다르지.’

분명 그녀와 그러한 조건으로 거래를 맺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질병에 시름하고 있을 엘프들을 생각하고 맺었던 것일 뿐.

‘흑마법사와 손을 잡았을 놈들이 조건을 논해?’

흑마력을 이용하는 놈들인 줄 알았다면 애당초 그런 조건조차 걸지 않았을 것이다.

“거래는 파기하죠.”

“…파기?”

가만히 안톤을 바라보다가 씨익 미소를 짓는 말레프.

“누구 마음대로? 회복하는 데 두 달이 필요하다고 했지? 그때까진 이곳에 머물러 줘야겠어.”

“싫다면요?”

그에 말레프가 손을 치켜올리자.

처억-

언제 숨어 있었던 건지.

곳곳에서 나타난 엘프들이 그에게 활을 겨눈다.

* * *

그날 저녁.

“곱게 들어가 있어!”

“크윽…….”

엘프 경비의 손에 의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 무섭게.

콰아아앙-

두터운 철문이 거칠게 닫힌다.

‘망할 엘프 놈들……. 후…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되나.’

안톤은 성검, 발칸을 힐끔 내려다봤다.

‘내가 성검을 갖고 있지 않으면 성검도 회복되지 않는다는 헛소리를 믿어 줘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빼앗길 뻔했어.’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최악을 면한 것뿐.

현 상황이 긍정적이라곤 할 수 없었다.

‘아니야. 난 잘했어. 잘한 거라고!’

흑마법사들과 손을 잡은 놈들과 타협은 없다.

그는 그의 신념을 지켰을 뿐이었다.

비록 그 대가가 감옥행이었지만 말이다.

‘앞으로 두 달간 이곳에 갇혀 있으라고? 웃기지 마!’

그가 이곳에 갇혀 있는 동안 흑기사들에게 끌려간 더스크와 그의 친우들은 모진 고문을 받고 있을 터.

한시라도 빨리 성카데미로 돌아가 이 사실을 알리고 원군을 요청해야만 한다.

‘하지만 무슨 수로 이곳을 나가지?’

이곳은 거대하고도 높다란 나무의 가지 부근에 홈을 파서 만든 감옥이다.

‘어떻게 감옥을 탈출한다고 해도… 저 많은 엘프들을 나 혼자 상대할 수 있을까?’

아무리 깊이 고민을 해 봐도 마땅한 방안이 나오질 않았다.

그렇게 안톤이 깊은 고민에 잠겨 있던 그때.

콰아아아아아아앙-

어디선가 귀를 찢어 놓을 것 같은 굉음이 울려왔고.

콰자자자작-

어디선가 날아온 커다란 돌덩이가 감옥 벽을 뚫고 들어와 그의 발치에 떨어졌다.

‘무, 무슨 일이지?’

박살 난 나뭇가지 바깥으로 힐끔 고개를 내미는 안톤.

“아, 아크 리치가 쳐들어왔다!”

“다들 도, 도망… 아악!”

이미 숲 곳곳에는 불길이 치솟아 있었고.

엘프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바빠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감히 이종족 벌레들이 나의 연구일지를 훔쳐 가다니. 그 대가는 죽음으로 갚아라.]

‘저, 저건…….’

하늘에 떠 있는 검은 유령 같은 존재를 보며 안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리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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