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91화 (191/200)

◈ 191화 외전 (11)

‘빌어먹을…….’

더 이상의 망설임은 사치일 뿐이었기에.

안톤은 곧장 대로변으로 뛰어나가 질주하기 시작한다.

“저기 있다! 쫓아!”

그 모습을 본 흑기사들은 곧장 말에 올라타 맹렬한 기세로 안톤을 추격한다.

‘망할, 망할!’

자신을 바짝 쫓아오는 기사들의 모습에 안톤은 전력 질주를 이어 간다.

“오늘은 고기들이 많이 잡혔어야 할 텐데.”

“그러게 말이야. 요즘 희한하게 물고기들이 줄어든 것 같기도 하고…….”

새벽 사이 출항했던 배들이 곧 돌아올 시간이라 그런 걸까.

대로변은 항구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로 어수선한 상태였다.

“비켜! 비켜!”

“어어어?”

안톤은 그런 사람들의 사이를 헤집으며 정신없이 앞으로 나아갔고.

“놈이 인파 사이로 숨어들었다! 당장 말에서 내려 놈을 찾아라!”

멀찍이서 흑기사들의 고성이 울려왔다.

“허억, 허억…….”

얼마나 달렸을까.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점차 줄어들고, 어느 허름한 골목으로 들어서고서야.

“후우…….”

안톤은 겨우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놈들을 따돌린 것 같긴 하지만 안심할 단계는 아니야.’

이제 흑기사들에 의해 그의 신원은 이곳 어민들에게 알려질 터였고.

포위망은 점점 좁아져 그의 목을 옥죌 것이었다.

‘사람들이 날 알아보기 전에 어떻게든 이곳을 빠져나가야만 해.’

하지만…….

‘빠져나간 뒤엔? 그 뒤엔 어쩌지?’

교수님을 비롯하여 학생들은 모두 붙잡혔다.

그 뜻인즉슨, 적의만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그를 도와줄 이는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친우들과 교수님을 구해서 전력으로 삼는 건…….’

“…….”

슬그머니 성검, 발칸을 내려다보는 안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젓는다.

‘아냐, 그건 미친 짓이야.’

그를 진정한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은 탓인지.

지금 성검 발칸은 그저 한 자루의 검 정도에 불과했다.

‘그래… 미친 짓이야…….’

그러한 상황에서 적들에게 뛰어든다?

친우들을 구하긴커녕 도리어 그마저 흑기사들의 손에 잡히게 되리라.

‘일단 어떻게든 성카데미로 복귀해서 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받는 게 낫겠어.’

그것이 동료를 위해서라도, 그를 위해서라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일 터.

‘하지만… 무슨 수로 배를 구하지?’

이번 일로 항구는 봉쇄됐을 터.

그런 상황에서 배를 구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옆 마을로 이동해서 배를 탈취하는 건 어떨까. 조금 돌아가야 하긴 하지만 그 편이 여러모로…….’

안톤이 맹렬히 머리를 굴리던 그때.

“여기 있다! 여기 레바논의 잔당이 있다!”

누군가의 외침이 그가 있던 골목을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망할…….’

골목 입구에 들어온 흑기사들을 본 안톤.

그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한다.

“허억, 허억…….”

이곳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른다.

다만 지금은 그저 뚫린 길을 따라 질주할 뿐.

그러나.

‘…뭐라고?’

하필 막다른 길에 들어서 버린 안톤.

그는 얼른 나가 다른 길로 가고자 했으나.

“놈이 이 근처에서 사라졌다. 수색해!”

흑기사들은 어느새 그의 턱밑까지 추격을 해 온 상황이었다.

‘이런 곳에서… 끝난다고?’

겨우 뒷골목에서 흑기사들의 손에 잡히고자 지금껏 그 힘든 훈련들을 해 왔던 걸까.

‘아니야!’

아니다.

아직 그는 잡힐 수 없었다.

“으아아아아아!”

안톤은 성검 발칸을 들어 막힌 벽을 향해 힘껏 휘둘렀다.

까앙-

그러나 벽에는 희미한 자국만이 남았을 뿐.

기적처럼 갈라지는 일은 없었다.

‘왜! 성검 발칸이잖아! 근데 왜 이깟 벽 하나 못 자르는 거야!’

안톤이 다시금 벽을 향해 힘껏 성검을 쳐들던 그때.

쿠르르르릉-

돌연 그의 등 뒤에서 희한한 소리가 울려왔다.

‘벌써 따라잡힌… 잠깐. 저건……?’

도대체 언제 생긴 것인지.

그의 뒤에는 커다란 흙벽이 세워져 있었다.

‘누가 이런 걸…….’

안톤이 당황하여 벽을 바라보던 중.

“이곳은… 막다른 길이군.”

“다른 곳을 좀 더 찾아보겠습니다!”

“일개 성기사 지망생일 뿐이다! 반드시 찾아내!”

벽 너머로 흑기사의 것으로 짐작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그건 그렇고… 이봐, 베르토. 이 벽 말이야. 조금 희한하지 않나? 뭔가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것 같단 말이지.”

벽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안톤은 마른침을 삼켰다.

“확실히 단장님의 말씀대로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것 같습니다!”

“그렇지? 그러니 베어 보겠나?”

“예!”

칼집에서 검이 뽑히는 소리가 들려오자.

‘결국 잡히고 마는 건가…….’

안톤은 두 눈을 질끈 감고야 말았다.

그러던 그때.

“단장님! 시장 부근에서 놈으로 추정되는 범인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래? 이동하지.”

절그럭-

놈들의 갑주 소리가 벽에서 점점 멀어지자.

‘후우… 살았다…….’

안톤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토해 낼 수 있었다.

‘근데… 누가 날 도와준 거지?’

아무런 연유도 없이 갑자기 벽이 만들어지진 않았을 터.

분명 누군가 그를 도와준 이가 있을 것이었다.

그러던 그때.

“뭘 그렇게 두리번거려?”

허공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안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저건…….’

웬 로브를 눌러쓴 존재가 하늘에서 뛰어내려 그의 앞에 착지하자.

안톤은 검을 든 채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 존재를 노려봤다.

“당신이… 절 도와준 겁니까?”

“그래. 그러니까 검은 좀 내려놓지?”

“왜 절 도와준 거죠?”

안톤의 물음에 로브 사이로 실소가 흘러나온다.

“도와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 게 우선 아닐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절 도와주신 이유가 뭐죠?”

“거참, 아직 가랑이에 털도 안 자랐을 녀석이 의심은 엄청 많네.”

‘가, 가랑이에 털?’

안톤이 몸을 흠칫거리던 그때.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로브의 모자 부분을 벗기 시작한다.

‘…어?’

모자 사이로 드러난 두 개의 뾰족한 귀를 본 안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어째서 엘프가 날 도운 거지?’

엘프들은 직업을 떠나 그냥 인간을 싫어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어째서 그를 도운 거란 말인가?

“왜? 인간인 줄 알았어?”

“…….”

안톤이 대답하지 못하자 엘프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간다.

“어쨌건 도와줬으니 대가는 받아야겠지. 그렇지?”

“…원하는 게 뭡니까?”

“성검, 발칸. 그 검을 어디에서 얻었지?”

엘프의 물음에 안톤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

“그걸 물으시는 이유는요?”

“질문은 내가 먼저 했어. 어디서 발칸을 얻었지?”

엘프가 재차 묻자, 안톤은 고민에 잠겼다.

‘갑자기 벽을 세운 걸 봐선 아마도 그녀는 정령사일 거야.’

엘프가 마법을 쓰는 건 들어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어느 정도로 강력한 정령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녀를 자극해서 좋을 건 없겠지.’

이미 흑기사들에게서 도망치는 와중에 괜히 또 적을 만들 필요는 없을 터.

“받은 겁니다.”

“받은… 거라고?”

“네.”

안톤의 대답에 엘프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누구에게 받았지?”

“저희 교육을 담당하시는 교수님한테요.”

“…그 교수의 이름은?”

‘내 말을 정말로 믿는 건가?’

안톤은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입을 열었다.

“프랄 교수요.”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야.”

“이만하면 대답은 충분히 한 것 같은데 전 이만…….”

“잠깐.”

등을 돌리려던 그를 붙잡는 엘프.

‘설마 검을 내놓으라고 하려는 건 아니겠지?’

안톤이 긴장하여 검을 꽉 붙잡던 그때.

엘프가 나지막이 묻는다.

“너… 그 검의 원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어?”

“변절자, 제이나 성녀죠.”

안톤의 말에 엘프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만약 그 검을 주신교에 상납한다면 주신교의 주요 일원이 될 수도 있을 텐데?”

“…….”

그에 싸늘한 눈으로 엘프를 노려보는 안톤.

“오직 제 검은 흑마법사들의 심장을 찌르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검을 흑마법사들의 주구에게 넘기라고요?”

“…그래? 하지만 그 검… 살상력은 없을 텐데?”

엘프의 말에 안톤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살상력이 없다고요?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죠?”

“말했잖아? 그 검, 제이나 성녀가 주인이었다고. 그녀가 여타 성녀들에 비해 회복력이 떨어지던 건 알고 있지?”

제이나가 회복 능력이 떨어지는 덜떨어지는 성녀였다는 건.

안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근데요?”

“그걸 보완하고자 레바논이 그녀에게 하사한 검이 바로 성검, 발칸이야. 일반적인 검들과는 다르게 그 검은 생명을 살리는 검이지.”

‘생명을 살리는… 검?’

안톤은 멍하니 발칸을 내려다보다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엘프를 응시했다.

“해박하시네요. 그래서, 검의 역사까지 알려 주면서 저를 잡아 둔 이유가 뭡니까?”

“날 좀 도와줬으면 해.”

‘도와 달라고?’

평소였다면 조금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내게 그럴 시간이 없어.’

잡혀간 교수님과 친우들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빨리 배를 탈취하여 성카데미로 돌아가야만 했다.

“도와준 건 감사하지만 지금 제겐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잡혀간 동료들 때문에?”

엘프의 물음에 안톤은 몸을 움찔거렸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아, 오해하진 마. 나도 성수 구매자 중 하나일 뿐이니까. 나도 성수를 못 사서 꽤 난처하다고.”

“…….”

엘프의 말에 안톤은 생각에 잠겼다.

‘성수를 구매하려 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닐 거야.’

흑마력 포션을 비롯하여 일반 포션 그리고 주신교에서 판매하는 성수.

그 모든 것들은 엘프들이 선호하는 품목들이 아니었다.

‘흑마력 포션이랑 일반 포션은 인위적으로 만든 거라 역하고, 주신교의 성수는 뭔가 흐릿한 어둠의 맛이 느껴져 싫다고 했었지.’

헤르만 교수가 엘프와 밀거래했던 일을 우스갯소리처럼 풀어 줬던 적이 있었기에.

안톤은 엘프의 말이 어느 정도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단 건…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저 엘프는 성수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거겠지. 하지만 밀거래하려고 했던 성수를 구하지 못해 난처해하던 와중에 날 본 걸 거고.’

즉, 그녀는 어떤 이유 때문에 성검, 발칸이 갖고 있는 치유 능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직 성검을 다루지는 못하지만 여분의 성수는 있어. 그렇다면…….’

안톤이 무심한 눈으로 엘프를 보며 말한다.

“좋아요. 당신을 따라가죠.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이봐, 너. 어차피 쫓기는 신세잖아?”

“쫓기면 조건도 못 겁니까?”

안톤이 으르렁거리듯 말하자.

엘프는 그런 그를 보다가 졌다는 듯 손을 까딱인다.

“그래. 그래서 조건이 뭔데?”

“당신이 제게 원하는 건 아마도 누군가를 치유하는 일이겠죠. 그 일을 성실히 도와드리겠습니다. 단, 당신의 일이 끝나고 나면 절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안톤의 말에 엘프는 기가 차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흑기사와의 전투를 도와 달라고?”

“아니요. 밀항할 배를 구해 주셨으면 합니다.”

“…밀항?”

의아하다는 듯 안톤을 바라보는 엘프.

“동료들은 어쩌고? 안 구해?”

“지금의 저로선 그들을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일단 돌아가 상황을 알릴 겁니다.”

“허… 냉정하네.”

당황한 엘프가 혀를 차자.

안톤은 무심한 눈으로 엘프를 응시했다.

“그럼 당신이 그들의 구출을 도와주기라도 할 겁니까?”

“당연히 그건 아니지.”

“저 또한 최선의 판단을 내린 것뿐이니 그에 토 달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안톤의 싸늘한 말투에 엘프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네가 우리를 돕는다면 네 말대로 밀항할 배를 구해 줄게. 그럼 되는 거지?”

“좋습니다.”

마침내 서로의 손을 맞잡는 안톤과 엘프.

“그래서, 우리는 어디로 가면 되는 거죠?”

“알탄 숲. 그곳에 네가 치료해 줄 엘프들이 있어.”

“심각한 병에라도 걸린 겁니까?”

안톤의 물음에 엘프는 쓴 미소를 짓는다.

“심각한 병이라면 병이라고도 할 수 있지. 가 보면 알아….…..”

“그렇군요. 그보다 서로의 이름 정도는 알아 두죠. 안톤입니다.”

“말레프야.”

엘프의 말에 안톤은 고개를 끄덕인다.

“뭔가 여성스러운 이름이군요.”

“그야 여자니까.”

“…….”

‘…여자였어? 하여간 이종족들을 외관으로 구분하는 건 너무 어렵단 말이지.’

안톤은 고개를 젓곤.

말레프가 준 로브를 둘러쓰고 천천히 그녀의 뒤를 쫓는다.

* * *

2주 뒤.

“이곳이야.”

알탄 숲에 도착한 안톤과 말레프.

‘이곳이 엘프들의 마을인가. 신기하네.’

일생을 크먼백섬에서만 살아서 그런 탓일까.

우거진 숲 사이에 터전을 짓고 살아가는 엘프들의 삶은 안톤에게 있어 신비로운 것이었다.

“그래서, 제가 치료해야 할 엘프들은 어디에 있죠?”

“급하긴. 저기, 저들을 치료하면 돼.”

그러나 말레프가 가리킨 곳엔 나무들만 무성히 자리하고 있을 뿐.

엘프들은 보이질 않았다.

“장난은 그쯤 하시고 엘프들에게 안내해 주시죠.”

안톤이 까칠한 목소리로 말하자.

말레프가 아차 싶었는지 씁쓸히 웃으며 말한다.

“아, 저기 저 나무들을 치료하면 돼. 저 나무들, 원래 엘프들이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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