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화 외전 (9)
대륙의 최남부.
레바논 왕국이 번영하던 시절.
왕국의 지침이나 법률을 어긴 이들이 유배되던 섬, 크먼백.
하아아아압!
그러한 섬에서 사내들의 우렁찬 기합소리가 울려 퍼진다.
“늦다! 그런 어설픈 실력으로 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어?! 다시!”
중년의 남자가 자빠져 있는 소년을 내려다보며 싸늘히 말하자.
“으아아아아아!”
소년은 한 손으로 채 마르지 않은 진흙을 딛고 일어나더니.
고성을 지르며 남자에게 검을 내지른다.
챙-
그러나 소년의 간절한 외침과 달리.
남자의 일격에 소년이 쥐고 있던 검은 힘없이 바닥을 뒹굴 뿐이었다.
“더스크, 내가 누누이 말했을 텐데? 네 공격은 너무 정직하다. 간악한 흑마법사 놈들이 네 공격에 맞을 거라 생각하나?”
“…아닙니다!”
“잊지 마라. 놈들을 이기기 위해선 지금보다 더 칼끝을 벼려야만 한다. 자, 다음!”
교관이 다음 학생을 호명하는 사이.
“망할…….”
더스크라 불린 소년은 오만상을 찌푸린 채, 일어나 몸에 묻은 흙을 털어 낸다.
그러던 중.
“더스크, 이번에는 다를 거라고 하지 않았어?”
금발 머리의 소년이 싱글싱글 웃으며 그에게 다가온다.
“시끄러워. 오늘은 졌지만 내일은 분명 다를걸?”
“내일도 별반 다를 게 없을 것 같은데…….”
“아니야!”
더스크는 새빨갛게 물든 얼굴로 고함을 내지르곤.
씩씩거리며 자신의 검을 챙겨 든다.
“그래. 내일은 뭔가 다를지도 몰라. 키가 조금 큰다든가, 아니면 근육이 조금 붙는다든가…….”
“놀릴 거면 저리 가.”
“알았어. 그만할게. 그보다 옷을 좀 정리하는 게 어때? 좀 있으면 흑마법 방어학 수업이 있잖아.”
안톤의 말에 더스크는 구시렁거리면서도 몸에 묻은 흙을 탈탈 털어 낸다.
“이제 갈까?”
천천히 연무장을 나서는 두 소년.
“하아… 우리는 언제쯤 전장에 투입될 수 있을까?”
“그렇게 싸우고 싶어?”
안톤의 물음에 더스크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하지! 난 한시라도 빨리 흑마법사들을 베어 버리고 싶다고!”
“그러려면 적어도 교관님은 이겨야 하는 것 아냐?”
“아이씨… 내일은 다를 거라니까?!”
흥분한 더스크를 보며 안톤은 차분히 말한다.
“글쎄. 지금 우리 실력으론 힘들지 않을까?”
“그게 무슨 상관이야! 놈들도 사람이야. 칼에 맞으면 죽는다고!”
“아니, 그러니까 죽이는 건 좋은데 겨우 한 놈만 죽이고 죽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냐는 거지. 적어도 수천, 아니 수만은 죽여야 하지 않을까?”
안톤의 말에 더스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런 방법이 있어?”
“있으면 진작 그렇게 했겠지.”
“후우… 그렇겠지.”
좀처럼 보이지 않는 미래를 어렴풋이나마 그려 보며 걸음을 옮기는 소년들.
이윽고 그들이 한 교실에 들어서자.
“늦었구나. 얼른 자리에 앉아라.”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그들의 면전을 울린다.
“예!”
“죄송합니다.”
교수에게 묵례를 하곤 얼른 빈자리에 앉는 더스크와 안톤.
“잠시 수업이 끊어져서 그런데… 어디까지 했지?”
“흑마법사들을 효과적으로 상대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셨어요, 프랄 교수님.”
한 여학생의 대답에 프랄 교수는 여학생에게 희미한 미소를 보인다.
“그랬었지. 어쨌건 계속 하던 말을 이어 하자면… 지금의 너희가 흑마법사들을 상대한다는 건 실질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왜죠? 저번에는 수업을 열심히 들으면 충분히 놈들을 이길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발끈한 더스크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자.
프랄 교수는 그런 그에게 미소를 던진다.
“이유는 간단하단다. 지금의 너희가 대륙에 모습을 보인다면, 그 즉시 죽을 테니까.”
“그건…….”
“너희가 상대해야 할 게 흑마법사들뿐인 것 같나? 그들을 따르는 수많은 병사들, 나아가 그들의 가족들 또한 상대해야만 하겠지. 너희에게 그들을 베어 넘길 용기가 있나?”
프랄 교수의 질문에 자리에 앉아 있던 학생들 그 누구도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던 그때.
“전 할 수 있어요!”
더스크가 자신 있게 오른손을 쳐든다.
“오, 그래?”
그에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보던 프랄 교수가 손뼉을 치자.
스스슥-
갑자기 그의 발 앞에 작은 빛무리가 모여들더니.
“어어… 어어어?!”
반쯤 헐벗고 야윈 사내가 당황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건…….”
더스크를 비롯하여 학생들이 당황해하는 와중.
프랄 교수가 더스크를 보며 말한다.
“그럼 이 자리에서 네 각오를 증명해 봐라.”
“…예?”
“이자는 성카데미에서 일하고 있는 정원사다. 네 각오대로라면 이 사람을 죽이는 것 정돈 어렵지 않겠지?”
프랄 교수의 물음에 더스크의 눈동자가 잘게 떨린다.
“그, 그건… 상황이 다르잖아요!”
“다르다니? 앞으로 네가 죽여야 할 사람들 중에는 분명 평범한 사람들도 가득할 거다. 그런데도 죽일 수 없나?”
“저, 전…….”
더스크가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입술만 꽉 깨물던 중.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안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제가 할게요, 교수님.”
“오, 그래? 좋아, 그럼 네가 한번…….”
서걱-
프랄 교수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검을 꺼내어 남자의 목을 베어 버리는 안톤.
목 언저리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바닥을 흥건히 적셨지만.
안톤의 표정은 차갑기 짝이 없었다.
“이러면 되는 거죠, 교수님?”
“안톤! 미쳤어?!”
친우의 행동에 경악한 더스크가 헐레벌떡 나와.
정원사를 치료하기 시작한다.
“그래. 잘했다.”
그러나 안톤을 칭찬하는 입과 달리.
프랄 교수의 눈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조금은 고민할 줄 알았는데, 의외구나.”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서요. 어차피 할 일이라면 미리 경험해 두는 편이 낫죠. 안 그런가요?”
다시금 검을 검집에 넣는 안톤을 보며.
프랄 교수는 덤덤히 말한다.
“뭐랄까… 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구나. 성기사보단 흑마법사가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어.”
“입을 옷은 제가 정해요. 교수님께서 신경 쓸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야 그렇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 넌 흑마법사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말이다.”
프랄 교수의 말에 안톤이 피식 미소를 흘린다.
“그래서, 절 흑마법사로 만들기라도 하시게요?”
“하하, 그럴 리가? 난 어디까지나 효율적으로 흑마법을 막는 방법을 가르치러 온 것뿐이란다.”
“그러시겠죠. 안심하세요. 저도 흑마법사가 될 생각은 없으니까요.”
장난스러운 눈빛 이면에 자리한 서리 같은 눈동자가 프랄 교수를 응시한다.
“네가 그렇다면야……. 어쨌건 이제 자리에 앉겠니? 수업은 계속 진행해야 하니 말이지.”
짝-
프랄 교수가 다시 손뼉을 치자.
치료를 받고 어리둥절해하던 정원사가 빛에 감기어 그 모습을 감추었다.
“자, 그럼 계속 수업을 진행하겠다. 오늘은 흑마법사들의 근간이자 핵심이 되는 파멸 마법에 대해…….”
몇십 분 뒤.
드르륵-
수업을 끝마친 프랄 교수가 문 너머로 자취를 감추자.
“안톤! 너 미쳤어?!”
더스크가 헐레벌떡 그의 친우에게 달려간다.
“미쳤다니? 완전 멀쩡한데.”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일 수가 있어?!”
“네가 치료해 준 덕에 죽진 않았잖아. 그리고 치명상을 입힌 것도 아니었어. 목 끝만 조금 벤 것뿐이야.”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어 가는 안톤.
“그 마음에 안 드는 교수의 콧대를 꺾으려면 그렇게라도 해야 했어.”
“그게 무슨 말이야?”
“딱 봐도 우리가 살인을 못 할 거라고 생각하고 저런 짓을 벌인 거잖아?”
안톤의 대답에 더스크는 기가 차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그렇다고 해도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어.”
“교수는 마음에 안 들지만 그가 한 말이 틀린 건 아니었어. 우린 언제고 평범한 사람을 죽여야 할 상황에 놓일지도 몰라. 미리 연습했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그렇다고 해도 그건 잘못된 일이야!”
더스크가 두 눈을 부릅뜬 채 소리치자.
안톤은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다.
“그래. 내 잘못이야. 사과할게. 하지만 너도 저 흑마법사를 싫어했잖아?”
“맞아. 지금도 싫어해. 하지만 놈의 콧대를 꺾으려고 무고한 정원사를 벤 건 잘못한 일이야!”
더스크가 단호히 말하자.
안톤은 그런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뗀다.
“더스크, 지금도 여전히 흑마법사를 싫어하는 건 맞지?”
“당연하지! 가족을 언데드로 만든 놈들을… 내가 어떻게 좋아할 수 있겠어.”
더스크의 대답에 안톤은 한숨을 내쉬며 빙긋 웃는다.
“그래. 어쨌건 미…….”
드르륵-
두 소년이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자기 교실의 문이 열리고.
“안톤, 수업이 끝나거든 내 집무실로 오거라.”
간 줄 알았던 프랄 교수가 안톤을 보며 말한다.
* * *
모든 수업이 끝나고.
“…….”
어딘가 불쾌하다는 듯 문을 바라보는 안톤.
그러나 그는 곧 표정을 지우곤 천천히 손을 문에 갖다 댄다.
똑똑-
“프랄 교수님, 안톤입니다.”
“들어와라.”
안톤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빛바랜 양피지처럼 눅눅해 보이는 방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여기 앉거라.”
“…예.”
“차라도 한잔 줄까?”
프랄 교수의 물음에 안톤은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아니요.”
“그래? 검은 대지에서 들어온 귀한 찬데 아쉽게 됐구나.”
말과 달리 자신의 찻잔만을 가지고 돌아가 자리에 앉는 프랄 교수.
“그래서, 저를 따로 부르신 이유가 뭐죠? 제가 수업을 방해하기라도 한 건가요?”
“그럴 리가? 넌 굉장히 이성적이고 냉철한 아이야. 합리적인 결정을 내린 널 내가 뭐 하러 탓할까.”
프랄 교수의 상냥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안톤의 눈가에 씌인 불신은 사라질 생각을 않았다.
“그럼 저를 따로 부르신 이유가 뭐죠?”
“네게 선물을 하나 주마.”
“…선물이요?”
‘무슨 속셈이지?’
처음부터 흑마법 방어학을 가르친다고 들어온 이 흑마법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이제는 저 사내가 무슨 속셈을 갖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노려볼 필요 없단다. 말 그대로 선물일 뿐이야.”
“…….”
째려보는 안톤에게 무언가를 내미는 프랄 교수.
웅웅웅웅-
그가 내놓은 것은 은은한 광채를 내는 검이었는데.
흘러나오는 분위기나 기세는 보통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이건… 뭔가요?”
“보이는 그대로 검이지.”
프랄 교수가 어깨를 으쓱이자.
안톤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쏘아본다.
“농담이나 하시려고 절 부르신 건가요?”
“하하, 설명이 조금 부족했나 보구나. 이건 발칸이라는 검이란다.”
프랄 교수의 말이 끝나자.
안톤은 당황했는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멍하니 프랄 교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설마… 제가 아는 그 발칸은 아니겠죠?”
“글쎄. 아마도 네가 생각하는 그게 맞을 거다.”
그에 안톤의 눈가가 점점 파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그 성검 발칸을… 저한테 주신다고요? 그것도 선물로요?”
“그래. 왜? 선물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니?”
프랄 교수의 물음에 안톤은 가슴 깊이 피어오르는 의혹과 당혹감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장난이 심하시네요.”
“장난? 난 진심으로 하는 말이란다.”
‘정말 진심으로 하는 소리일까? 근데 어떻게 일개 흑마법사 따위가 성검을 갖고 있는 거지?’
성검 발칸.
레바논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
레바논께서 성녀 제이나를 위해 손수 하사하셨다는 그 성검이 도대체 왜 저 흑마법사의 손에 있는 것이란 말인가?
‘혹시 흑탑에서 나오면서 몰래 훔친 걸까? 아니면 성검의 소유자를 죽이고 탈취한 건가?’
온갖 가정이 안톤의 머릿속을 배회했으나.
그 어떤 가정도 소년을 만족스럽게 하진 못했다.
“좋아요. 그게 정말 성검 발칸이라고 쳐요. 그런데 그걸 왜 저한테 주시려고 하는 거죠?”
“그야 네가 나의 시험을 통과한 유일한 학생이니까.”
“시험… 이라고요?”
‘잠깐… 설마 그 정원사를 베는 게…….’
프랄 교수의 시험이었던 걸까?
“그래. 너만이 내가 낸 시험을 통과했지. 내 선물을 받을 자격을 지닌 사람은 너 한 명뿐이라는 거고.”
“잠깐만요. 겨우 정원사 한 명을 벤 것 때문에 성검을 선물로 준다고요?”
안톤이 크게 혼란스러워하자.
프랄 교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래.”
“…제게 뭘 원하는 거죠?”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
더욱이 그 호의가 흑마법사의 호의라면 의심에 의심을 거듭해야 할 터.
“원하는 거라……. 원하는 게 있긴 하지.”
‘역시…….’
안톤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싸늘한 시선으로 프랄 교수를 노려보던 그때.
프랄 교수가 그를 보며 말한다.
“무너진 레바논을 일으켜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