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 외전 (7)
‘에만이 살아 있다고?’
분명 노안르의 증언과 백탑이 전해 온 소식에 따르면.
에만을 비롯하여 타우린가의 모든 이들이 죽었다고 했건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주신께서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을 터.
‘그럼 노안르가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
아스칼은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왜 그러시나요? 뭔가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으신가요?”
“그게 말입니다…….”
아스칼은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를 제이나에게 털어놨다.
“그러니까 정리를 해 보면… 있어선 안 될 타우린가에 생존자가 있어서 혼란스럽다는 거네요.”
“…예. 분명 누군가는 거짓말을 했다는 게 되니까요.”
아스칼이 이맛살을 찌푸리자.
곰곰이 생각하던 제이나가 운을 뗀다.
“노안르에게 아이가 있었던 건 사실인가요?”
“예, 조사 결과 3살 남짓의 아들이 있었던 걸로 확인됐습니다.”
“하지만 타우린가에서 벌인 실험으로 인해 죽었다, 그게 노안르의 자백이었죠. 음…….”
제이나가 어딘가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짓자.
아스칼은 의아해하는 눈으로 그녀를 보며 묻는다.
“짐작 가는 부분이 있으신 겁니까?”
“아니요. 다만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요.”
차분히 말을 이어 가는 제이나.
“주신께선 제게 에만을 찾을 것 외에도 이런 말씀을 하셨거든요.”
“무슨 말씀을…….”
“타우린가를 멸망시키라고요.”
제이나의 말이 끝나자 아스칼은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처럼 변해 가는 것을 느꼈다.
‘타우린가를 멸망시키라 하셨다고? 그게 말이 돼?’
멸망을 시키라는 건.
타우린가가 멀쩡하다는 소리나 다름이 없잖은가?
‘아니지. 신탁이 한참 전에 내려온 거라면 시기상의 문제인 걸 수도 있어.’
노안르가 일을 벌이기 전에 제이나가 신탁을 받았을 수도 있었기에.
아스칼은 그 부분을 확인하고자 했다.
하나.
“제가 신탁을 받은 건 며칠 전이에요. 노안르가 일을 벌인 지 몇 주나 지난 시점이고요.”
“허…….”
그러나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럼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노안르를 비롯하여 백탑에선 타우린가의 멸망을 알려 왔다.
그러나 주신께선 타우린가를 멸망시키라는 신탁을 내리셨다.
‘그렇단 건 설마…….’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몇 가지.
‘노안르와 백탑이 단체로 미쳤거나, 아니면…….’
노안르가 백탑과 입을 맞추고 그들에게 거짓을 고했거나.
“이거… 아무래도 원한 때문에 벌인 일이 아닌 모양입니다.”
“그건 모르는 거죠. 노안르가 원한 때문에 일을 벌였지만 사실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든가, 그래서 그걸 이용해서 백탑이 장막을 펼친 걸지도 모르죠.”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어.’
감옥에서 봤던 노안르의 광기와 분노.
적어도 그 감정들에서만큼은 거짓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거… 어떻게 일을 처리해야 할지…….”
“일단은 타우린가에 가 봐야죠.”
“하지만 백탑의 마법사들이 순순히 허락하겠습니까?”
지금은 협력 관계라곤 하나 아직 마법사들과 흑마법사 사이에는 원초적인 감정이 남아.
암묵적으로 서로를 멸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저들이 거절을 한다고 해도 이쪽에선 할 말이 없어.’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백탑의 영역에서 벌어진 일.
그들이 쉽사리 끼어들 수가 없는 일이었다.
“자기들이 허락하지 않으면 어쩌겠어요?”
그러나 그의 우려와 달리 제이나는 코웃음을 친다.
“좋은 방법이 있으신 겁니까?”
“노안르가 주신님의 신도인 건 아시죠?”
“예. 한데 그게 왜… 아…….”
제이나가 뭘 하려는지 눈치챈 아스칼이 눈을 부릅뜨자.
“따지고 보면 이번 일은 주신교 또한 개입을 해야 하는 일이에요. 저는 그분의 사도인 만큼 이번 일을 조사할 필요가 있고요.”
제이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흑기사단을 데리고 가야겠어요.”
* * *
한 달 뒤.
척, 척, 척-
검고도 두터운 갑주를 차려입은 수천의 기사들이 절도 있게 보도를 걸었고.
기사들의 선두에서는 백색과 검은색이 아우러진 깃발이 바람을 타고 펄럭거린다.
“엄마, 엄마! 저 사람들은 누구야?”
“쉬잇! 저들은 주신교의 사람들이란다.”
좌중의 수군거림이 곳곳에서 울렸으나.
기사들은 아랑곳 않고 목적지를 향하여 전진한다.
스윽-
이윽고 그들의 목적지인 새하얀 탑 언저리에 도착하자.
투구의 테두리를 붉은색으로 장식한 기사단장이 힘껏 호령한다.
“정렬!”
척-
기사단장의 명령에 일시불란하게 오와 열을 맞춘 흑기사들.
“으음…….”
“저들이 그 소문의 흑기사들인가 봅니다.”
그들을 마중차 나온 마법사들은 괜히 위축되어 불안해하는 시선으로 흑기사들을 바라본다.
그도 그럴 것이, 흑기사단은 주신교를 상징하는 기사단이기도 했으나.
무엇보다 그들이 이단 심문관의 역할 또한 병행하는 탓이었다.
그러던 그때.
“허허, 위명 높은 흑기사들을 이렇게 두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참으로 은혜로운 날입니다.”
현 백탑의 탑주, 요하가 선두에 있던 제이나에게 반가이 인사를 건넨다.
“빛과 어둠이 함께하시길.”
그에 제이나 또한 그에게 가벼이 묵례하곤 말에서 내린다.
“사도님께서 방문을 하신다고 하셔서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주신께서 원하신다면 어디든 가야 하는 게 사도 된 자의 도리죠.”
제이나가 싱긋 웃어 보이는 사이.
어느새 말에서 내린 아스칼이 그들에게 다가온다.
“흑혼해 듀오의 수장 아스칼입니다.”
“오오, 당신이 아스칼이었군요. 그 위명은 넘치도록 들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탑주의 환대 속에서 훈훈한 분위기가 이어지던 중.
아스칼이 탑주를 보며 말한다.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타우린가를 조사하고 싶으시다 하셨지요.”
“예.”
아스칼이 고개를 끄덕이자 요하는 쓴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그건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렵다니요?”
“타우린가가 멸망한 사실은 잘 아실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 백탑에 소속된 자들이기도 했지요. 그러니 조사는 우리의 주관하에 이루어져야 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탑주의 물음에 아스칼은 미간을 찌푸린다.
“하지만 우리 흑탑 또한 이번 일과 관련이 없는 게 아닙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끔찍한 일을 벌인 게 그 정신 나간 여인이란 사실을 잊으신 겁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범인의 편에 서 있으니까 참견할 생각 말고 꺼져라?’
탑주가 에둘러 말하긴 했어도 말속에 담겨 있는 본질은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곳에서 조금만 밖으로 나가면 경치 좋은 산들이 많습니다. 여기까지 오신 김에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시는 건 어떠신지요?”
말이 휴식이지 이는 명백한 축객령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예상한 바다.’
아스칼이 힐끔 고개를 돌려 제이나를 응시하자.
“아니요. 휴식을 취할 정도의 여유는 없어요. 우리는 타우린가에서 벌어진 참사를 조사할 거니까요.”
“…….”
제이나의 대답에 미소를 유지하고 있던 탑주의 표정이 조금 딱딱하게 굳는다.
“주신교가 다른 세력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건 조약을 어기는 일일 텐데요.”
주신교가 흑마법사들에게서 시작된 종교인 터라.
종교의 중립성을 갖기 위해 주신교는 대륙을 상대로 한 가지 조약을 맺었었다.
그건 바로 이렇다 할 이유가 없는 이상, 다른 왕국이나 세력에 간섭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죠. 하지만 이번 일에는 우리 신도들 또한 개입되어 있어요. 그러니 우리도 조사를 하는 게 맞다고 보는데요.”
“…….”
그러나 실질적으로 조약이 큰 의미가 없었던 것이.
대륙민의 대부분이 주신교를 믿는 상황에서 신도를 핑계로 삼는다면.
주신교가 개입할 수 없는 곳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또 신도를 빌미로 간섭하시겠다는 겁니까?”
“간섭이라니요? 요하 탑주께선 우리를 그런 식으로 보고 계셨던 건가요?”
제이나의 물음에 탑주는 반박할 수 없었다.
“…좋습니다. 좋을 대로 하시지요. 하지만 원하던 걸 찾으시거든 바로 우리 백탑의 영역에서 나가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이에요.”
그 말을 끝으로 요하 탑주가 홱 등을 돌리자.
그를 따르던 마법사들 또한 그를 따라 사라진다.
“뭔가 엄청나게 반대할 줄 알았더니, 의외군요.”
아스칼이 그런 그들을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제이나는 피식 실소를 흘린다.
“이미 정리를 끝마쳤나 보네요. 우리가 타우린가에 방문해도 얻을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니, 저렇게 나오는 거겠죠.”
“그럼 타우린가에 가도 의미가 없는 것 아닙니까?”
아스칼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제이나는 고개를 젓는다.
“예전에 주신께서 저한테 이런 말을 하신 적이 있어요.”
“주신께서 말입니까?”
“인간이 하는 일에는 항상 실수가 있기 마련이라고요. 그러니 일단 가 보도록 하죠.”
* * *
3일 뒤.
“이곳이 타우린가의 저택이 있던 곳입니다.”
안내인 격으로 따라온 마법사를 따라.
그을린 대지를 걷는 아스칼과 제이나.
“…불이 났었던 모양이군요.”
“예. 그 참사가 있었던 날 큰불이 났다고 합니다.”
마법사의 말대로 보이는 것이라곤 집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잔해와 주춧돌들만이 덩그러니 자리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으음… 이래선 뭘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겠습니다.”
단서를 찾아보려고 해도 뭐가 있어야 찾을 것 아닌가?
“글쎄요…….”
그러나 제이나는 생각이 달랐던 건지.
어딘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을린 대지를 바라본다.
“노안르가 타우린가가 이곳에서 자신의 아들로 실험을 벌였다고 했었죠?”
“그랬었습니다.”
“남들에게 보여 주기도 뭐한 실험이니, 꽤나 은밀한 곳에서 실험이 진행됐을 거고요.”
그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아스칼.
“그랬을 가능성이 높죠.”
“그렇다면…….”
잠시 고민에 잠겨 있던 제이나가 홱 고개를 돌려 흑기사들을 바라본다.
“아라한.”
“예, 사도님.”
그녀의 부름에 흑기사단장이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인다.
“기사들 절반을 데리고 이 부근에 있는 숲이나 마을을 샅샅이 조사하세요.”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남은 반은…….”
그을린 대지에 고갯짓을 하며 씨익 웃는 제이나.
“이 대지를 갈아엎도록 해요.”
“…이곳을 전부 말입니까?”
기사들 대신 깜짝 놀라 묻는 아스칼을 보며.
제이나는 의아해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문제가 있나요?”
“이 넓은 곳을 다 파헤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아스칼의 우려에도 제이나는 빙긋 웃어 보인다.
“그저 땅만 판다면 그렇겠죠. 하지만…….”
콰드드드드득-
갑자기 그녀의 팔이 오우거의 그것처럼 점차 우람해지자.
아스칼은 멍한 눈으로 그녀의 팔을 바라봤다.
“그, 그건…….”
“주신께서 제게 내려 주신 힘이죠.”
레바논에게서 벗어나고자 버렸던 힘.
그러나 지금은 주신이 내려 준 힘.
그녀는 그 힘을 이용하고자 했다.
“내 삽 가져와!”
“예!”
멍청한 표정을 짓는 아스칼과 달리.
기사들은 이러한 광경이 익숙했던 걸까.
철컥, 철컥-
저마다 거대한 철통 같은 것을 꺼내어 조립하기 시작하는 기사들.
이윽고 철통이 하나의 거대한 삽으로 바뀌자.
“이건 드워프들에게서 받은 삽이에요. 제법 쓸 만해 보이죠?”
제이나는 아스칼을 보며 활짝 웃는다.
“어… 예, 뭐… 그렇죠.”
“자, 이제 시작해 볼까요. 흐읍!”
그녀가 삽을 들어 그을린 대지에 꽂자.
푸욱-
어마어마한 양의 흙더미가 삽날에 딸려 올라오기 시작한다.
푸욱, 푸욱, 푸욱-
지치지도 않는 걸까.
엄청난 속도로 작업을 반복하는 제이나를 기가 질린 눈으로 바라보는 아스칼.
그러던 그때.
텅-
무언가가 삽에 걸렸는지 거친 쇳소리가 땅속에서 흘러나왔다.
“호오… 이곳에 뭔가 있는 것 같은데요?”
그에 신이 난 제이나가 돌덩이들을 연달아 박살 내며 가로막는 모든 것을 파괴하자.
곧 흙더미에 가려져 있던 무언가가 그들의 눈앞에 드러났다.
“이건… 문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다만 이 문… 강화 마법이 걸려 있는 것 같습니다. 어지간한 힘으로는 뚫기 어려울 것…….”
“이 안에 뭔가 단서가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그렇죠?”
제이나는 싱긋 웃곤 거대한 삽을 들어 힘껏 문을 내려찍는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삽자루에 찍혀 문이 두 동강 나자.
제이나는 동전 던지듯 문짝을 내던지곤 아스칼을 보며 묻는다.
“근데 방금 뭐라고 하셨죠?”
“…아닙니다.”
“그럼 들어가 볼까요?”
제이나가 아스칼과 함께 문 밑에 자리하고 있던 계단을 타고 내려가자.
“…….”
그들의 행동을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던 안내인 마법사.
그가 곧 수정구를 꺼내어 누군가에게 송신을 하기 시작한다.
“놈들이 타우린가의 연구실을 찾은 것 같습니다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 안에 있던 자료들은 모두 처리해 뒀으니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