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85화 (185/200)
  • ◈ 185화 외전 (5)

    한때는 레바논 왕국의 번성한 도시 중 하나인 마치성.

    그 안에서 저마다 가지각색의 문양을 가진 마차들이 도보를 질주한다.

    다그닥, 다그닥, 히히힝!

    모두 목적지가 같았던 걸까.

    이윽고 모든 마차들이 검고도 드높은 건물 앞에서 멈춰 선다.

    “바리스 님, 내리시지요.”

    “만돌라 님, 흑혼해 듀오에 도착했습니다.”

    귀족가의 자제들이기라도 한 걸까.

    어딘가 앳돼 보이지만 얼굴에 거들먹거림이 한가득한 남녀가 저마다 집사의 시중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린다.

    “후우…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야. 정말 이딴 곳에서 나의 인연을 찾을 수 있다고?”

    “미심쩍어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곳은 대륙에서 가장 많은 남자와 여인들의 정보를 갖고 있는 곳입니다. 분명 바리스 님께 도움이 될 겁니다.”

    “알았어, 알았다고.”

    바리스라 불린 청년이 어딘가 불만인 듯 퉁명스레 말하자.

    집사는 무심한 눈으로 그를 보며 말한다.

    “바리스 님께선 향후 페른 왕국의 중추에서 왕국의 역사를 이끌어 나가시게 될 겁니다. 그때가 되면 아버님께서 왜 이러한 결정을 내리셨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알았다고. 그깟 천한 여자 따위는 기억에서 잊었으니까 얼른 안내나 해!”

    “그러지요.”

    잔뜩 심통이 난 바리스와 함께 건물로 들어서는 집사.

    “예약을 하고 오신 겁니까?”

    입구를 지키고 있던 사병의 물음에 집사는 정중한 미소를 짓는다.

    “그렇네. 네그워드 바리스, 그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있을 걸세.”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잠시 명단을 확인하는 경비.

    “확인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경비는 고급진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는 방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잠시 이곳에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곧 관리자님께서 오실 겁니다.”

    “그러지.”

    그들이 마련된 다과를 입에 넣은 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젊음의 황혼기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은 남자가 들어와.

    그들에게 반가이 인사를 건넨다.

    “저는 이곳의 총책임자인 아스칼입니다.”

    “네그워드가의 차남, 바리스입니다.”

    바리스가 정중히 아스칼이 내민 손을 맞잡자.

    아스칼은 그런 그에게 손짓하며 말한다.

    “반갑습니다. 자, 일단 앉으실까요?”

    아스칼이 주섬주섬 양피지들을 꺼내어 들던 그때.

    바리스가 그를 보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일이 많이 바쁘신 모양이네요.”

    “하하, 뭐… 아무래도 그렇지요. 요즘 들어 찾아오시는 손님들이 더 늘어났으니 말입니다.”

    흑탑이 대륙의 패권을 잡은 이후.

    많은 사람들이 흑마법사를 자신들의 혈족으로 삼아 가문으로 들이려는 열풍 때문일까.

    아스칼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지쳐 보였다.

    “그보다 찾으시고자 하던 여성분이… 최소 C등급의 여성에 흑탑 출신이면 좋겠다고 언질을 주셨는데, 맞습니까?”

    “예, 정확합니다.”

    아돌프가 힘껏 고개를 끄덕이자.

    아스칼은 그에게 양피지를 내밀기에 앞서 먼저 바리스를 보며 입을 뗀다.

    “흑탑 출신의 흑마법사는 기본적으로 B등급을 부여받는 건 잘 아시지요?”

    “예. 그래서 말인데… 혹시 어떻게, 그녀들과 매칭을 할 수 없을까요?”

    “바리스 님께서는 C등급이시지요. C등급이 D등급과 매칭 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C등급이 B등급과 매칭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죠.”

    아스칼의 설명에 바리스가 의자를 바짝 당겨 앉는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말의 가능성 정도는 있지 않겠습니까?”

    “으음…….”

    어딘가 씁쓸한 미소를 짓는 아스칼.

    그는 들고 있던 양피지 더미를 그의 앞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어 간다.

    “여기에 적힌 여성분들이 바리스 님과의 매칭을 원한 여성들입니다. 한번 보시죠.”

    “…….”

    잠시간 양피지를 훑던 바리스의 표정이 점차 딱딱하게 굳어 간다.

    “이게… 전부라고요?”

    양피지에 적혀 있는 여인은 그와 엇비슷한 세력의 가문의 여식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흑탑 출신의 흑마법사 여인이 있긴 했으나 나이 차가 20살이 넘게 났다.

    “예. 그게 전부입니다.”

    아스칼이 딱 잘라 말하자.

    옆에 서 있던 그의 집사가 조심스레 운을 뗀다.

    “바리스 님은 페른 왕국에서도 명문가라고 알려진 네그워드가의 차남이십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게 현실입니다.”

    “이, 이보다 더 어린 흑마법사는 없는 겁니까?”

    바리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아스칼은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그보다 어린 흑마법사는 결혼을 선호하지 않아, 회원 수가 적습니다. 회원 수가 적은데 찾으시는 분들은 많으니 등급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할 수밖에요. 나이가 어린 흑탑 출신의 여인을 만나시기 위해선 적어도 A등급은 되셔야 합니다.”

    “허어…….”

    눈앞의 잔혹한 현실에 큰 충격을 받은 걸까.

    아니면 작금의 사실을 믿을 수 없기라도 한 걸까.

    바리스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힘겹게 뗀다.

    “정말… 등급을 올리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는 겁니까?”

    “적어도 지금으로선 그렇습니다.”

    매섭다 싶을 정도로 아스칼의 단호한 통보에 바리스는 고개를 푹 숙이고 만다.

    그러던 그때.

    “그럼 아까 스무 살 정도 차이가 나는 여성분… 이름이 마리안나 님이었던가요? 그분과의 매칭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뒤에 있던 집사가 양피지 하나를 콕 집으며 묻는다.

    “뭐, 뭐라고?! 한스! 미쳤어?!”

    그에 화들짝 놀란 바리스가 집사를 노려보며 고함쳤으나.

    한스의 표정은 차갑기 짝이 없었다.

    “미치다니요? 저는 지극히 멀쩡합니다.”

    “네까짓 게 뭐라고 감히 나의 혼인 상대를 정해?!”

    분노와 모멸감으로 몸을 부들부들 떠는 바리스를 보며.

    한스는 무심하게 대꾸한다.

    “가주님께서 저를 보내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매칭 상대에 흑마법사가 있거든 출신이나 나이를 떠나 무조건 매칭을 하라고 말입니다. 저는 가주님의 뜻을 이행하는 것뿐입니다.”

    “아, 아버지가?”

    아버지의 명령이라는 말 때문일까.

    바리스는 역정 내는 것을 멈추고 침을 꿀꺽 삼킨다.

    “예. 만약 바리스 님께서 가주님의 뜻을 거부하실 경우, 후계자의 지위와 모든 권한을 박탈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늙은 집사의 차가운 경고를 피부로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바리스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한스를 바라본다.

    “한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나랑 스무 살이나 차이가 난다고! 애도 못 낳을걸? 아니! 잘 걷지도 못할 거야! 그래! 분명 그럴 거라고!”

    “그럴 경우 가주님께서는 바리스 님이 첩을 두시는 것도 용인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나보고 늙어 빠진 여자를 정실로 삼으라고?! 난 그렇게 못 해!”

    바리스가 오열하듯 소리치자.

    그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아스칼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말씀 중에 실례합니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매칭일 뿐입니다. 바리스 님과 상대, 양쪽 모두가 서로를 마음에 들어 해야만 성사되는 일이죠.”

    “그럼 그 늙어 빠진 여자가 날 거부할 수도 있다는 건가?”

    바리스가 으르렁거리듯 말하자.

    아스칼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하죠. 어쨌건 상대 또한 바리스 님과 같은 C등급의 여인입니다. 그 사실을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

    그에 바리스가 말없이 이마를 부여잡자.

    아스칼은 그런 그에게 한마디 충고를 덧붙인다.

    “저희 흑혼해 듀오는 모든 분들께 최고의 매칭 상대를 제공해 드린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기조는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고요.”

    “그럼… 저 늙은 여인이 내게 있어 최고의 매칭 상대라는 건가?”

    “네그워드 가문이 페른의 왕좌라도 차지하지 않는 이상,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요?”

    지금은 불가능에 가깝다, 라는 말을 돌려 말하는 아스칼.

    “도련님.”

    “시끄러워. 조용히 있어.”

    바리스는 한스의 말을 딱 잘라 버리곤.

    양피지를 노려보며 연거푸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좋아. 일단 아버지의 뜻대로 이 여자와 매칭 하지. 하지만 잘되지 않는 건 내 책임이 아니잖아. 그렇지, 한스?”

    “물론입니다, 도련님.”

    “후우… 좋아. 이 여인과 매칭 하지.”

    마침내 바리스가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인지.

    마리안나의 프로필이 담겨 있는 양피지를 꽉 잡는다.

    “좋습니다. 그럼 마리안나 님과의 매칭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거든 언제든 저희 흑혼해 듀오에 문의해 주시지요.”

    “…그러죠.”

    쾅-

    마침내 바리스가 그의 집사와 함께 방을 나서자.

    “후우… 쉽지 않네.”

    아스칼은 덩그러니 남아 있는 찻잔을 보며 쓴 미소를 짓는다.

    ‘저런 놈들이 몇인지……. 이제는 세는 것도 지겹네.’

    흑탑이 대륙의 주인으로 등극한 이래로.

    흑마법사를 매칭 상대로 찾는 사람들이 크게 증가했다.

    ‘흑마법사가 되는 게 좀 쉬운 일인 줄 아나?’

    그러나 대부분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원하거든 언제든 흑마법사를 자신의 배필로 삼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부류가 대다수였다.

    ‘후우… 그냥 때려치울까.’

    이미 흑혼해 듀오를 통해 부와 명예는 맛볼 만큼 맛봤다.

    이제는 일선에서 물러나 평화로운 일상을 즐기는 것도 나쁘진 않을 터.

    ‘망할……. 주신님만 아니었어도…….’

    하나 그는 이곳을 쉽사리 그만둘 수 없었다.

    이곳은 주신께서 이룩하신 공간인 데다가.

    무엇보다 그는 주신께서 선택하신 사람이었다.

    ‘만약 내가 일을 그만둔다고 하면… 난리가 나겠지.’

    이제는 탑주가 된 레논을 시작으로 여러 간부들이 그를 찾아와.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을 게 너무도 뻔했다.

    ‘하아… 예전에는 이 정도로 힘들진 않았는데…….’

    이제는 흑마법사만을 찾는 놈팡이들 때문에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하다못해 쓸 만한 후임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나 도무지 이 흑혼해 듀오를 믿고 맡길 만한 놈이 보이질 않았다.

    이제는 덩치가 부풀 대로 부푼 이곳을 관리하길 원하는 자는 대개 야망만 가득한 놈들 뿐.

    진심으로 흑혼해 듀오를 위하는 녀석은 없었다.

    ‘적어도 신이 되시기 전에 이곳이라도 처리하고 가 주시지.’

    오늘도 소리 없이 주신을 원망해 보는 아스칼.

    그가 지긋이 천장을 올려다보던 그때.

    덜컥-

    “아스칼 님! 아스칼 님! 큰일이 났습니다!”

    흑혼해 듀오의 관리자 중 한 명이 입에 거품을 문 채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온다.

    “또 무슨 일이야? 가정이 파탄 나는 건 우리가 책임질 사안이 아닌 건 알지?”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건은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는 사안인지라…….”

    “무슨 일인데?”

    아스칼의 물음에 관리자 흑마법사는 울상이 된 채 말한다.

    “저희가 매칭 했던 노안르라는 여인이 있지 않습니까?”

    “…노안르?”

    워낙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이용하는 터라.

    아스칼은 쉽사리 그 이름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

    “어쨌건 그 여자가 뭐 어쨌다는 건데?”

    “그 여자가… 결혼했던 남자의 가문을 풀 한 포기 안 남기고 멸망시켰다고 합니다.”

    “…뭐라고?”

    결혼.

    일생일대의 중대사이자 가문의 이익이 걸린 사업.

    그렇기에 매칭을 통해 서로의 얼굴과 마음을 확인하는 작업을 거치는 것이건만.

    ‘멸망이라니…….’

    도대체 노안르는 무슨 이유로 결혼한 남자의 일가를 멸망시킨 것이란 말인가?

    “근데?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그건 이미 우리의 손을 벗어난 일이잖아?”

    “물론 그렇습니다만… 멸망시킨 가문이 하필… 타우린 가문인지라…….”

    “타우린? 타우린… 아…….”

    시큰둥하던 아스칼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려 간다.

    “타우린가면… 설마 내가 아는 그 타우린 가문은 아니겠지?”

    “백탑에서도 서열 20위권의 유망한 마법사 가문이었습니다.”

    “빌어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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