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화 외전 (1)
주신교가 대륙에 뿌리내린 지 10년이 지났고.
세상은 바뀌었다.
대륙의 패자를 자처하던 레바논 왕국은 왕국의 운명이 걸렸던 일전에서 결국 패배했고.
그 성세를 다하여 변방의 외진 곳으로 물러났다.
“음…….”
한 방 안.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 양피지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똑똑-
“들어오게.”
노인은 노크 소리가 울린 문에 대고 소리치곤 다시금 양피지를 보는 데 여념이 없다.
“탑주님,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잘 왔네. 일단 앉게.”
나가란 탑주의 호출을 받고 온 레논 부탑주가 슬며시 그의 맞은편에 앉는다.
“요즘 정황은 좀 어떤가.”
“늘 그렇듯 정신없이 바쁜 상황입니다. 특히 학장들이 흑탑에 사람이 부족하다고 하소연을 해 대서… 하하.”
레논이 멋쩍은 웃음을 보이자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는 나가란.
“사람이 부족하다는 게 인력이 부족하다는 건가, 아니면 학생들의 실험 재료가 부족하다는 건가?”
“후자입니다.”
“흠… 왕국의 죄수들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군.”
나가란의 말에 레논이 고개를 끄덕인다.
“잡혀 들어오는 죄수의 숫자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학생들의 숫자는 엄청나게 늘었으니 말입니다.”
“흠…….”
미간을 좁힌 채 생각에 잠기는 나가란 탑주.
“그렇다고 일반인들을 납치하자니 또 문제가 될 것 아닌가?”
“예전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조금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들은 대륙의 패자였다.
한데 대륙의 패자가 학생들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실험체로 이용한다면.
분명 물밑에서부터 그들을 향한 반발심이 커져 나갈 터.
“아니면 이번에 저주학파가 완성한 키메라 공법을 도입해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키메라 공법? 학생들에게 키메라를 실습 재료로 던져 주자는 건가? 그러다 키메라에게 학생들이 죽을 수도 있을 텐데?”
나가란이 싸늘한 목소리로 묻자.
레논은 그의 발언을 예상했다는 듯 바로 고개를 젓는다.
“전투용 키메라를 사용하면 그렇겠으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바로 인형입니다.”
“인형이라…….”
확실히 인형이 인간과 빼닮은 키메라이긴 했으나.
나가란의 표정은 썩 탐탁지 않아 보였다.
“이보게, 레논. 난 말이네, 학생들이 인형이나 주물럭거리는 게 썩 달갑지 않게 느껴지는군. 아무리 우리와 똑같은 피와 살을 갖고 있다 한들, 녀석들에게는 영혼이 없잖나?”
“그건…….”
레논이 무어라 말을 하려고 입을 달싹이는 중.
나가란이 계속 말한다.
“실험체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와 애통 그리고 체념. 그러한 감정들이 인형에게는 없네.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죽음의 문턱으로 넘어가는 그 순간이야말로 학생들에게 많은 깨달음과 영감을 선사하지. 인형으로는 부족해.”
“…알겠습니다. 그럼 다른 방법을 도모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가란은 그제야 차를 한 모금 삼키곤.
레논의 두 눈을 뚜렷이 응시한다.
“그리하게. 그보다 이제 자네를 부른 이유에 대해 말하지. 일단 이걸 읽어 보게.”
나가란이 들고 있던 양피지 더미를 그에게 내밀자.
레논은 천천히 내용을 훑다가 점점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이건…….”
“주신께서 활동하던 당시 남기셨던 문헌이네. 특이하지 않나?”
그에 동의하듯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레논.
“인간이실 때도 범상치 않으신 분이란 건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건 정말이지… 희한하군요. 흑마랜드라니…….”
문헌의 내용이 다소 괴이했던 탓일까.
문헌을 쭉 살핀 레논이 슬며시 눈을 치뜬다.
“그런데 이걸 제게 보여 주신 이유가……?”
“구현할 수 있겠나?”
“…예?”
놀란 레논과 달리 나가란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말을 이어 간다.
“이보게, 레논.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흑마법사들을 이끌어 갈 수 있을 거라고 보나? 나는 길어야 5년이라고 보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이십니까?!”
레논이 목소리를 높이자.
나가란은 허허롭게 웃으며 말한다.
“내 상태는 내가 잘 아네. 리치라도 되지 않는 이상 그 안에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나이이네.”
“하지만 지금도 정정하지 않으십니까?”
“이보게, 레논. 난 이미 충분히 오래 살았네. 하지만 말이야, 왜인지 모를 미련이 생기더군. 도대체 어떤 미련이 날 이리도 흔들었는지 몇 날을 고심했네. 그리고 답을 내렸지.”
나가란이 씨익 미소를 짓는다.
“주신께서 우리를 이리도 번성케 하셨으니 우리도 응당 그에 보답을 해야 하지 않겠나?”
“탑주님의 말씀이 맞습니다만…….”
다시금 문헌을 살피는 레논.
“이게… 실현이 가능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자네의 걱정은 충분히 이해하네. 하지만 한번 과감히 도전해 보는 건 어떻겠나? 설령 자네가 흑마랜드의 구현에 실패한다고 해도, 자네가 다음 탑주가 되는 데 지장이 가는 일은 없을 거네.”
“…예?”
레논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자.
나가란은 빙긋 미소를 보인다.
“몰랐나? 내 뒤를 이을 차기 흑탑의 탑주는 자네가 될 걸세.”
“하나 탑주가 되려면 부탑주들의 동의가…….”
레논이 뭐라 말하려 했으나.
나가란은 고개를 저으며 그의 입을 틀어막는다.
“거기까지. 이미 나도, 다른 부탑주들도 결정을 내린 사안이네.”
“…….”
노인의 단호한 대답에 레논은 입을 꾹 다물었고.
나가란은 그런 그를 보며 나지막이 묻는다.
“어떤가. 할 수 있겠나?”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좋네.”
* * *
주신이 남겼다는 문헌을 들고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온 레논.
‘허… 이게 도대체 어디다 쓰는 물건인지 도무지 모르겠군.’
그는 문헌 속에 그려진 그림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기다란 뱀처럼 생긴 물체가 빙글빙글 돈다거나.
나뭇가지만 남은 앙상한 나무에 바구니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물체는 생전 들어 보지도 못한 것이었다.
‘공성 병기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흑마법에 사용하는 매개체도 아닌 것 같은데…….’
몇 시간이 넘도록 고민하고 또 고민해 봤으나.
도저히 양피지 안의 그림이 무얼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예전에 흑마랜드에 대해 언급하셨던 건 기억이 나는데…….’
워낙 예전의 일인지라 좀처럼 그때의 일이 떠오르질 않는다.
“끙…….”
레논이 탄식에 가까운 신음을 내뱉던 그때.
덜컥-
누군가가 그의 집무실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온다.
“아빠, 저 왔어요.”
“오 그래, 레나야. 벌써 방학을 맞았나 보구나.”
이제는 완숙한 숙녀가 된 딸을 보던 그는 그녀에게 넌지시 묻는다.
“학장이라는 게 도통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일은 좀 어떠니.”
“그냥 교수들을 통솔하고 학생들을 관리하면 돼서 크게 어렵진 않아요.”
비교적 젊은 나이로 페이트 왕국에 있는 흑카데미의 학장이 된 딸을 자랑스럽게 바라보는 레논.
“그건 다행이구나. 그런데 말이다. 정말 혼인을 할 생각은…….”
“없어요.”
레나가 딱 잘라 말하자.
레논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린다.
“아직도 마음에 드는 남자를 찾지 못한 거라면 이 아비가 흑혼해 듀오에 문의라도 넣어 보마.”
이제는 검은 대지를 넘어 대륙 곳곳에 발을 뻗은 흑혼해 듀오.
그곳의 도움을 받는다면 혼기가 찬 딸의 연인을 찾는 것 정돈 쉬운 일일 터.
“괜찮아요. 전 혼자가 좋아요.”
“…….”
독신을 선언한 딸을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레논.
“혹시 아직도 그분을 마음에 품고 있는 거라면…….”
“그런 것 아니에요. 애당초 이루어질 수도 없는 관계였잖아요? 인간과 신이 어떻게 결혼할 수 있겠어요? 전 진짜 혼자 사는 게 좋아요.”
딸의 강력한 주장에 레논은 입을 벙긋거리다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다.
“네 뜻이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겠구나……. 하지만 생각이 바뀌거든 언제든 이야기를 해 주려무나. 이 아비가 최고의 신랑감을 찾아 네게…….”
“알았어요. 그보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보고 계시는 거예요? 또 전쟁이라도 하는 건가요?”
“전쟁이라니? 더 이상의 전쟁은 없을 거란다.”
레논이 고개를 젓자 레나는 진한 호기심을 드러낸다.
“그럼 뭔데 그렇게 심각하세요?”
“그게 말이다……. 주신께서 남기신 문헌을 보고 있었는데, 워낙 내용이 희한해서 고민 중이었단다.”
“저도 볼래요.”
낚아채듯 레논에게서 양피지를 넘겨받은 레나.
그녀는 잠시간 양피지를 살피더니.
피식-
갑자기 실소를 흘리는 것 아닌가?
“왜, 왜 그러니?”
“그냥 뭐랄까… 신이 이런 걸 진지하게 구상하고 있었다는 게 재밌어서요.”
레나가 뭔가 아는 듯한 반응을 보이자.
레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뭔가 아는 게 있는 거니?”
“네? 이건 전에 그 사람이 아빠한테도 말한 거였잖아요. 흑마랜드요.”
“…….”
그에 레논은 레나의 손을 꽉 잡으며 말한다.
“자세하게 좀 말해 주려무나.”
잠시 후.
“허어…….”
‘그러니까 흑마랜드라는 게…….’
특수한 기체를 타고 유희를 즐기는 공간이라니.
“뭔가 맥이 빠진 표정이시네요.”
“허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공성 병기나 신물 제작법은 아닐까라는 오만 가지 상상을 했던 그였기에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혹시 흑마랜드를 만들 생각이신가요?”
“…탑주님의 명령이란다.”
레논의 말에 레나가 두 눈을 반짝인다.
“재미있겠네요. 저도 할래요!”
“레나야, 넌…….”
“어차피 방학 기간이라 할 것도 없어요, 아빠.”
레나의 간절한 목소리에 레논은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네 좋을 대로 하려무나.”
“네! 그보다 문헌에 적힌 대로라면 일단 드워프 대공방에 가야 할 것 같은데요?”
“…드워프 대공방?”
갑자기 딸의 입에서 의외의 장소가 튀어나오자.
레논은 의아한 눈으로 레나를 바라봤다.
“예전에 그가 공방장인 고산의 방패랑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있어요. 그라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요?”
“…….”
흑마랜드를 지을 실마리를 잡은 덕일까.
레논이 두 눈을 번뜩인다.
“당장 드워프 대공방으로 가자꾸나.”
* * *
3일 뒤.
드워프 대공방.
땅, 땅, 땅-
모루 위를 세차게 내려치는 망치 소리와 격렬한 풀무질로 분주한 드워프들 사이를 누비는 레논과 레나.
“이곳은 여전하네요.”
레나가 감회에 젖은 눈으로 드워프들의 작업을 구경하던 그때.
“어서 오시지요! 부탑주께서 이 고산의 방패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드워프들보다 유독 근육이 빵빵한 드워프가 그들을 반가이 맞이한다.
“먼 길을 오셨을 텐데, 일단 목부터 축이시는 게 어떻습니까?”
고산의 방패가 맥주잔을 내밀자.
레논은 고개를 저었다.
“다음에 마시도록 하지. 그보다 자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 찾아왔네.”
“편히 물어보십쇼.”
고산의 방패가 제 가슴을 툭툭 쳐 보이며 활짝 웃는다.
“한참 전의 일이라 잘 기억이 나지 않을 수도 있겠네만, 자네… 혹시 흑마랜드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나?”
“…흑마랜드 말입니까? 흑마랜드… 흑마랜드?”
고산의 방패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레논은 다급히 뒷말을 덧붙인다.
“전에 흑남께서 자네에게 의뢰를 했었다고 들었네만.”
“아아아! 그것 말입니까?! 물론 기억하고말고요! 워낙 특이하기 짝이 없는 설계도를 들고 오셔서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지요!”
고산의 방패가 껄껄 웃자.
레논도 그를 따라 웃으며 기대감 가득한 표정으로 묻는다.
“정말 잘됐군! 그럼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흑마랜드를 완성할 수 있겠나?”
“음… 당시 흑남께도 말씀드렸지만 그건 쉽지 않을 겁니다.”
“쉽지 않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레논이 당황해하자.
고산의 방패는 못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이 설계도대로라면 엄청난 기구를 지탱할 광물과 기술이 필요합니다. 특히 이 철마를 이 철로에서 빠르게 움직이게 만들어야 하지요. 그리고…….”
고산의 방패가 차분히 설명을 이어 가던 중.
레논이 잠긴 눈으로 그를 보며 말한다.
“그런 부분은 걱정하지 말게. 백탑의 마법사들과 드루이드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해결할 수 있을 터이니 말이네.”
“문제는 또 있습니다. 저 기구를 완성하려면 대량의 오리하르콘이 필요한데, 그걸 공수할 방법이 없습니다.”
고산의 방패의 대답에 레논은 마른침을 삼킨다.
‘생각 이상으로 많은 인력과 자원을 필요로 하는군.’
마법사들과 드루이드들을 끌어다 쓰는 것도 문제였지만.
심지어 대량의 오리하르콘까지 필요로 할 줄이야.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이는 주신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신성한 사업이자.
어쩌면 생전에 마지막이 될 나가란 탑주의 염원이기도 했다.
‘인력이야 어떻게든 공수할 수 있겠지만, 오리하르콘이 문제군.’
과거, 페른 왕국에 오리하르콘 광산이 존재하긴 했으나.
어느 날을 기점으로 오리하르콘 광산이 송두리째 사라졌다는 말을 들었다.
‘어디서 오리하르콘을 구해야 할지…….’
레논의 눈이 점점 시름에 잠기어 가던 그때.
옆에 있던 레나가 피식 웃으며 말한다.
“오리하르콘은 금방 구할 수 있을 거고, 사람들만 어떻게 끌어모으면 되겠네요.”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