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화
3년 뒤, 마계.
[끙…….]
양피지 더미에 둘러싸인 펠기누스가 무거운 한숨을 내쉰다.
[뭐 이렇게 처리해야 할 게 많은 거야.]
전에는 그저 악마들과 영역을 통제하는 일 정도가 전부였다면.
지금은 마계 전역을 관리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하아… 주신님도, 갑자기 이렇게 자리를 비우시면…….]
죽일 듯 양피지를 노려보던 펠기누스가 홱 고개를 돌린다.
[야.]
그녀의 뾰족한 한 마디에 시녀복을 입고 있던 레바논이 몸을 움찔거린다.
[…네?]
[거기 바닥 더러운 것 안 보여? 근데도 손이 놀고 있네?]
[아…….]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는 레바논.
[그게……. 당장 닦을게요.]
[일하는 것도 시원찮고, 그렇다고 성격이 싹싹한 것도 아니고.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다니까.]
까득-
펠기누스의 조롱에도 레바논은 그저 이를 갈며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참자. 참아. 언젠간 이 굴욕적인 날도 끝날 거야. 주신에게 강탈당한 힘만 어떻게든 다시 돌려받을 수 있다면…….’
그런 날이 온다면 찬란했던 옛 시절을 다시 찾아오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하지만… 정말 다시 돌려줄까?’
천 년.
천 년간 하녀의 일을 충실히 수행한다면 힘을 돌려준다는 게 주신의 약속이었다.
‘그딴 약속을 할 거면 차라리 천계 주인의 자리도 뺏어가든가!’
천계의 주인이 하녀라니.
천계의 천사들이 그녀의 이런 모습을 봤다면 까무러칠 일이었겠으나.
그녀로선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호호호호… 죄송해요. 당장 청소할…….]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나보고 뭐 어쩌라고!’
레바논의 소리 없는 비명이 마계를 울린다.
* * *
한편, 같은 시각.
한 도시의 술집.
“다들 수고했고, 오늘은 마시자고!”
퉁-
용병들이 술이 든 잔을 부딪치곤 내용물을 단숨에 입안에 털어 넣는다.
“크으…….”
잠시 오만상을 쓰던 남자가 힐끔 동료들을 보며 말한다.
“그래도 이번엔 후송 임무치곤 제법 벌이가 좋았지?”
“뭐, 그렇지. 요즘 이만큼 벌이가 되는 일을 찾는 것도 쉽지 않으니까.”
동료의 말에 남자는 쓴웃음을 짓는다.
“후우… 이런 말을 하긴 좀 뭐하지만, 너무 평화롭기만 한 것도 마냥 좋지만은 않군.”
“몇 년 전이 좋긴 했지. 그때는 무기만 들 줄 알면 무조건 고용했잖아?”
좋았던 옛 시절이라도 떠올리는 걸까.
남자는 몽롱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고개를 젓는다.
“아니야. 다시 생각해 보니 썩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아.”
“왜?”
“그야 생각해 봐. 흑마법사들이 갑자기 물러갔으니 망정이지, 만약 놈들이 대륙을 싹 다 초토화했다면 어땠을 것 같…….”
툭-
갑자기 동료가 그의 옆구리를 치자.
남자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동료를 응시한다.
“왜 그래?”
“저기. 저기 좀 봐.”
동료가 가리킨 손가락 끝에는 말없이 술잔을 쥐고 있는 검은 로브의 사내가 자리하고 있었다.
“뭔데? 흔한 방랑객일 뿐이…….”
남자는 동료에게 핀잔을 주려다가.
검은 로브 사내의 명치에 자리하고 있는 백골 모양의 브로치를 보곤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흑마법사들이 대륙을 초토화하려고 한 적도 있었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과거의 일일 뿐이잖아?
“그래. 지금은 왕국마다 흑탑도 들어섰고, 흑마법을 배우려는 사람도 제법 있다고 하니까. 하하.”
용병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며 어딘가 불편한 표정을 짓던 그때.
탁-
검은 로브의 사내가 카운터에 금화 한 닢을 올려놓곤 조용히 술집을 나선다.
“…갔군.”
“후우… 저 음침한 녀석들은 좋게 보려고 해도 좋게 볼 수가 없네.”
“당연하지. 몇백 년 동안 응어리진 원한들이 그리 쉽게 풀리겠어? 에이씨, 술이나 들자고!”
떨떠름한 표정으로 문을 쳐다보던 용병들은 곧 다시 아무렇지 않게 술잔을 잡는다.
* * *
한편.
조용히 술집을 나간 검은 로브의 사내는 말없이 노을이 진 거리를 걷는다.
잠시간 거리를 걷던 그는 곧 어느 한 신전에서 걸음을 멈춘다.
“…….”
우두커니 신전을 바라보던 그가 안으로 걸음을 옮기자.
“어서 오십시오, 형제님.”
신관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그를 반가이 맞이하면서도 미안한 기색을 보인다.
“주신께 기도를 올리러 오신 모양입니다만, 곧 신관님들의 식사 시간이 있는 터라…….”
“이곳에 제이나 사도님께서 계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잠시 그녀를 뵙고 싶군요.”
그에 신관은 남자의 얼굴과 그의 가슴팍에 걸린 백골 브로치를 번갈아 보다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사도님과 어떤 사이이신지……?”
“랄프가 찾아왔다고 전하시면 될 겁니다.”
“랄프, 랄프라…….”
검은 로브의 사내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짓는 신관.
“참으로 은혜로운 이름을 갖고 계시는군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신관이 신전으로 들어간 지 몇 분이나 흘렀을까.
“허억, 허억…….”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여인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신전에서 뛰쳐나온다.
“정말… 당신인가요?”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남자는 천천히 로브를 벗기 시작한다.
“오랜만이야, 제이나.”
“세상에……. 정말… 정말이군요.”
그녀는 한참이고 랄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의 손을 꼭 잡는다.
“…신기하네요. 3년간 아무런 소식도 없을 땐 걱정도 되고 화도 치밀어 올랐는데…….”
“지금은 어떻지?”
“…그저 반가운 마음뿐이네요.”
그녀의 대답에 랄프는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내 사도라면 나의 존재에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럼 적어도 신탁이라도 한번 내리든가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3년간 잠잠한 건 너무 한 것 아닌가요?”
토라진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랄프는 빙긋 웃음을 보인다.
“지금이라도 찾아왔으니 된 것 아닌가?”
“그것도 그렇지만……. 그보다 그건 어떻게 된 건가요?”
“뭘 묻는 건지 모르겠군.”
그의 발언에 눈을 흘기는 제이나.
“이미 다 알면서 모른 척하지 마세요.”
그에 랄프는 그제야 그녀가 원하던 답변을 내놓는다.
“잠시 유희 중이야.”
“…유희요? 아…….”
“그래. 유희.”
그의 대답에 제이나는 조금 기대가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기간은요?”
“글쎄……. 최대한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즐겨야지. 별일이 없는 한 적어도 네가 늙을 때까진 머무르지 않을까 싶은데.”
그의 대답에 제이나는 기쁨의 미소를 보인다.
“정말인가요?!”
“아마도?”
요 3년간 마계를 재정비하고 체계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실질적인 일들이야 펠기누스가 처리할 것이니.
지금의 그가 해야 할 일은 딱히 없다고 봐도 좋을 터였다.
“왜 레바논 왕국은 아직도 존속되고 있는 건지, 갑자기 대륙에 퍼진 질병은 또 뭔지.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어요.”
“그래. 시간은 많으니 차분히 이야기하자고.”
“그리고 또 당신이 부재중인 사이에 제가 이만큼 신전을 늘려 놓은 사실도…….”
그녀가 지난 3년간 못다 한 회포를 풀듯 끊임없이 말을 풀어내자.
스윽-
랄프는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며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지난 3년간 참으로 수고가 많았다, 나의 사도여.”
“…네.”
갑작스러운 칭찬에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히는 제이나.
“어, 얼른 들어가요. 얼른요.”
그녀는 괜히 랄프를 보채며 그를 주신의 신전 안으로 인도하고자 했고.
랄프는 그런 그녀를 따라 천천히 신전으로 들어선다.
* * *
한 달 뒤.
[…….]
나는 하늘에 오롯이 서서 대륙을 응시했다.
덜걱-
제이나와 다른 신도들의 왕성한 활동 덕일까.
페른, 페이트 왕국을 비롯하여 크라켄 왕국 전역에 나를 섬기는 신전들이 들어섰고.
심지어 검은 대지에서까지 나를 섬기는 신도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재미있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의 베논과 레바논으로 양분되다시피 한 대륙의 정세가 이렇게 바뀔 줄이야.
‘그보다… 저건 개입을 해서라도 처리를 해야 될까, 아니면 알아서 하라고 방치를 할까.’
나는 도미닉 왕국 끝머리에 자리하고 있는 검은 덩어리를 응시했다.
‘사람들이 맴피스의 잔해를 처리할 수 있을까? 힘들 것 같기도 한데.’
맴피스를 처리하는 와중에 놈의 파편이 튀기라도 한 건지.
‘지금이야 저 근방에 사람이 없다고 해도, 방치한다면 몇 달 전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르기는 한데.’
몇 달 전.
맴피스가 흩뿌린 역병 탓에 대륙 전역에 좀비들이 창궐했었다.
‘다행히 전염력이 없어서 망정이었지…….’
하마터면 대륙 곳곳에 좀비들이 들끓는 모습을 보게 될 뻔했다.
‘일단은 방치하다가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개입하도록 하자.’
나는 검은 덩어리에 대해 결론을 내리곤.
시선을 돌려 레바논 왕국 방면을 응시했다.
‘저놈들은… 한결같네.’
레바논이 내게 힘을 뺏긴 탓에 그녀를 섬기던 저들 또한 힘이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들이 대륙의 패자라 생각하고 오만한 행동을 일삼고 있었다.
‘음… 치워 버릴까? 잠깐…….’
내가 놈들을 응시하던 중.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나의 머릿속을 스쳐 간다.
‘예전에 비해 훨씬 나아졌다고 해도 아직은 흑마법사에 대한 인식이 안 좋긴 하지만, 그거야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잖아.’
더욱이 내가 흑마법사들의 신이라는 사실이 대륙에 퍼졌으니.
흑마법사들이 완전히 대륙에 편입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렇다면… 반대로 흑백 역전 세계를 만들어 보는 것도 꽤 재밌겠는데?’
흑백 역전 세계.
과거, 흑마법사들이 대륙의 핍박을 받던 그 시절을 성기사들과 신관들이 그대로 겪게 하는 것이었다.
‘신성력을 쓰기만 하면 탄압받고 억압받는 거지.’
나를 따르는 신관들이 사용하는 건 신성력이라기보단 흑과 백이 융합된 혼돈의 힘이니.
적어도 내 신도들에게 피해가 갈 일은 없을 터.
‘흠… 괜찮을 것 같은데?’
지금의 내게 있어 무고한 성기사들과 신관들이 입을 피해보단.
나의 즐거움이 무엇보다 우선이었으니 말이다.
‘좋아. 까짓것 한번 해 볼까.’
이 세계의 주인은 나다.
무엇을 하건 세계는 나의 생각과 계획대로 움직일 터.
* * *
10년 뒤.
“더스크!”
한 소년이 멍하니 정원을 바라보는 소년에게 손짓한다.
“뭐 해! 곧 검술 연습 시간이야!”
“안톤, 우리가 이러는 게 의미가 있을까?”
“그게 무슨 말이야?”
안톤이 의아하다는 듯 묻자.
더스크는 검자루를 만지작거리며 말한다.
“아무리 우리가 열심히 검술 훈련을 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게 있을까 해서.”
“달라지는 게 왜 없어! 우리가 열심히 해야 다시 레바논 님의 이름을 대륙에 널리 떨칠 수 있지!”
레바논 왕국.
한때는 대륙을 주름잡으며 그 성세를 널리 떨치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어디 가서 함부로 신성력을 쓰기라도 했다간… 바로 돌팔매질을 당한다던데.”
성기사, 신관.
사람들에게 촉망받고 부러움을 사던 직업들은 이제 멸시와 조롱거리에 불과했고.
그 누구도 그들을 찾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대륙에선 흑마법사가 되는 게 출세하는 길이라던데?”
한때는 대륙의 공적이었던 흑마법사가 지금은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직업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 탓에 대륙의 감옥에 있는 죄수들의 씨가 말랐다는 소문도 들려왔으나.
그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었다.
“더스크! 정신 차려! 우리가 아니면 누가 레바논을 일으키겠어?!”
“후… 그렇지. 일어나야지…….”
한차례 푸념을 늘어놓은 덕일까.
아까보다 표정이 조금 나아진 더스크가 활짝 미소 짓는다.
“그래. 성카데미를 졸업하면 우리가 꼭 더러워진 세상을 바꿔 놓는 거야!”
“맞아. 꼭 그렇게 할 거야!”
의기투합한 두 소년은 서로를 보며 활짝 웃곤.
검을 든 채 연무장으로 이동한다.
웅성웅성-
그들이 연무장에 들어서자.
어째선지 이미 모여 있는 소년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오늘 새로운 교수님이 오셨다는데?”
“그래? 희한하네.”
고개를 갸웃거리는 더스크.
이 외진 곳에 교수를 자청하여 올 사람이 있던가?
“주목!”
그러던 그때 다부진 체격의 검술 교관이 학생들을 향해 소리친다.
“오늘 새로운 교수님께서 취임하신다. 곧 이곳을 지나가실 테니까 오시거든 크게 인사할 수 있도록!”
“네!”
얼마나 기다렸을까.
저벅, 저벅-
곧 연무장 끝에서 누군가가 검은 로브를 펄럭이며 그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온다.
“교수님! 오셨습니까?!”
그 모습을 본 검술 교관이 웃으며 인사하자.
남자는 슬쩍 묵례를 해 보인다.
“성카데미에 가시는 길이지요?”
“네.”
“마침 여기 학생들이 모여 있는지라, 가시기 전에 한번 학생들에게 교수님을 소개해 드리고 싶어서 말입니다. 으허헣.”
“아, 그렇군요.”
학생들을 쓱 훑는 남자의 입가에 인자한 미소가 걸린다.
남자는 옷매무새를 가볍게 고치곤 천천히 입을 뗀다.
“반갑다. 난 흑마법 방어학을 가르칠 교수, 프랄이라고 한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