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화
맴피스의 심드렁한 목소리와 달리.
레바논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갔다.
[제 힘을 가져가 봐야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은데요? 제 힘은 아가멤논의 것이었기도 하니까요.]
[호오… 어쩐지 놈의 냄새가 나더라니.]
그녀의 말에 흥미가 동한 걸까.
맴피스는 공격을 하려다 말고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 간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네년은 볼 품없는 하급 신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베논도 그렇고, 어떻게 네년이 아가멤논의 힘을 가지게 된 거지?]
[그야 저희가 아가멤논을 배신했으니까요.]
[배신? 크흐흐흐흐. 놈은 배신을 당해서 죽은 거였나. 딱 놈에게 어울리는 최후였군.]
맴피스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자.
레바논은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말한다.
[그래서 제 힘을 가져가 봐야 도움이 안 된다고 한 거예요. 당신과 아가멤논의 힘은 상극이잖아요?]
[…상극?]
[그래요. 그래서 아가멤논에게 패배하고 봉인을 당한…….]
크하하하하하하하-
맴피스의 입에서 터져 나온 광소가 대지를 뒤흔든다.
[그렇게 와전됐던 건가. 재미있군, 정말 재미있어.]
[…와전이라고요?]
[애당초 난 놈에게 패배한 적이 없다. 그저 놈에게 속아 영겁의 시간동안 이곳에 갇혀 있었을 뿐이다.]
맴피스의 관심사가 다른 곳에 쏠리자.
레바논은 얼른 추임새를 넣는다.
[속았다는 게 무슨 말이죠?]
[나는 재앙과 저주 그리고 혼돈을 주관했다. 나는 대륙에 갖은 역병과 재앙을 퍼뜨리며 나의 존재 이유를 충실히 증명했지. 하나 아가멤논은 그런 나를 고까워했다. 그래서 우리는 눈이 마주칠 때면 싸우고 또 싸웠지만 승부를 내지 못했지.]
맴피스의 말에 레바논이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잠깐만요. 제가 알기로 아가멤논이 대륙을 한번 멸망시켰던 이유가 당신이 퍼뜨린 혼돈 때문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지?]
[당신이 활동을 줄였다면 싸울 일도 없었던 것 아닌가요?]
그녀의 질문에 코웃음을 치는 맴피스.
[대륙에서 나의 영역을 넓히고 신도들을 모은 게 잘못된 일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건…….]
[놈은 단순했다. 그저 세계와 피조물들이 자신의 뜻대로 돌아가길 원했지. 나는 그 꼴이 보기 싫었을 뿐이다.]
슬며시 재앙의 문을 바라보곤 계속 말하는 맴피스.
[그렇게 우리의 사이가 더없이 최악으로 치닫던 중, 놈의 하수인이 나를 찾아왔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었지. 주인이 없는 세계의 주인이 되어 보는 건 어떠냐고.]
[그 말은…….]
[놈의 제안은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다. 나도 놈과 싸우는 게 부담이 되긴 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난 놈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게 함정인 줄도 모르고 말이지.]
맴피스는 으르렁거리며 재앙의 문을 노려본다.
[끝없는 어둠 속에서 나는 수천 번, 수만 번을 넘게 맹세했다. 이 빌어먹을 공간에서 나간다면 아가멤논을 비롯하여 놈과 관련된 모든 것을 내 손으로 없애겠다고 말이다.]
스스슥-
천천히 고개를 돌려 레바논을 내려다보는 맴피스.
[그리고 네년 또한 내가 정한 범주 안에 들어가는군. 그것도 아주 강하게 말이야. 그렇지?]
[…….]
맴피스의 눈에서 살기가 뚝뚝 묻어 나오자.
레바논 또한 말없이 무기를 꺼내어 든다.
* * *
한편.
‘호오, 상황이 재밌게 돌아가네.’
마계에서 저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난 실소를 감추지 못했다.
‘그래. 네년이라면 당연히 놈에게 협력을 구할 거라고 생각했지.’
맴피스가 그녀의 제안을 거부할 줄은 몰랐겠지만 말이다.
콰아아아아앙-
내가 빛과 검은 물질들이 얽히어 굉음을 자아내는 전장을 주시하는 중.
[레바논이 생각보다 열심히 싸우네요.]
넌지시 다가온 펠기누스가 말을 걸어왔다.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라곤 맴피스의 손을 잡는 것뿐이었으니까. 물론 그조차도 실패했지만.]
[그런데 맴피스에게 저런 비사가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형제의 다툼 정도야 흔한 일이잖아? 다만 그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신이라 좀 더 무게감이 있을 뿐이지.]
[그렇죠. 근데… 뭔가 아쉬운 게 있으신가요?]
[아쉬운 거?]
나의 물음에 펠기누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뭐랄까… 조금 그런 기색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요.]
[…제법 눈치가 빠르네.]
[별말씀을요.]
나는 재앙의 문을 응시하며 말했다.
[저게 진짜 이세계로 넘어가는 문이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이세계에 관심이 많으신 모양이네요.]
[관심? 글쎄…….]
나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전생의 기억이 남아서 그런지 한번 가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과거는 과거로 두었을 때 가장 아름다운 법.
‘그래.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까.’
[관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딱히 신경 쓸 정도는 아니야.]
[그런가요?]
[그런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난 다시금 재앙의 문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주시했다.
‘언제 움직이는 게 좋을까.’
맴피스의 힘이 빠지는 걸 기다리고 있던 내게 있어.
레바논과 맴피스의 전투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레바논이 맴피스의 힘을 얼마나 빼 놓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명색이 베논이랑 세계를 양분하던 여신인데, 최소한은 해 주겠지.’
[혹시 맴피스가 손을 잡자고 하면 어쩌실 건가요?]
[방금 못 봤어? 저놈은 누구랑 손을 잡을 만한 놈이 아니야. 설사 손을 잡았다고 해도 금세 뒤통수를 칠 놈이지. 거기다가 놈을 살려 둬 봐야 좋을 것도 없고.]
놈은 재앙의 화신이자 질병 그 자체인 놈이다.
그런 놈을 놔둔다면 대륙 전역에 질병과 재앙이 일게 될 터.
‘누구도 통제하지 못하는 힘이라면 내가 가져오는 게 맞지.’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움직이시려는 건가요?]
[그래.]
처음에는 접전처럼 보였으나.
점점 그 기세가 맴피스에게 쏠리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적기이다.
‘놈이 레바논의 힘을 취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쩌저저저적-
나는 눈앞에 균열을 생성한 뒤.
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쩌저저저적-
다시금 열린 균열을 타고 밖으로 나가자.
덧없이 웅장해 보이는 재앙의 문을 비롯하여.
[크으으으윽…….]
맴피스의 손에 붙잡힌 채 신음을 흘리고 있는 레바논의 모습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약자가 강자에게 먹히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이치이니 그리 억울해할 것 없다. 오히려 내게 삼켜지는 게 네게 덧없는 영광이…….]
맴피스가 승자의 미소를 지은 채 레바논을 제 아가리에 밀어 넣으려던 그때.
홱-
돌연 맴피스는 아가리를 움찔거리더니 내가 있는 방향으로 홱 고개를 돌린다.
[호오… 이게 누군가. 형님이 아니신… 잠깐…….]
게슴츠레한 눈으로 날 노려보는 맴피스.
[네놈은 뭔데 아가멤논의 힘을 갖고 있는 거냐.]
[글쎄.]
내가 어깨를 으쓱이자.
맴피스는 레바논을 노려보며 묻는다.
[저놈은 뭐지?]
[크윽… 놈은… 아가멤논의 후계자예요.]
[…후계자? 후계자라고?]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멍청한 표정을 짓던 맴피스의 입가에 점차 비웃음이 걸린다.
푸하하하하하하-
[그 잘난 척하던 놈도 결국 소멸을 한 건가. 꼴좋군. 놈은 어떤 최후를 맞았지?]
[거기 네가 쥐고 있는 년한테 물어봐.]
내가 고개를 까딱이자, 맴피스는 고개를 돌려 레바논을 응시한다.
[네가 놈의 최후를 봤나?]
[그게…….]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는 레바논을 보며 으르렁거리는 맴피스.
[대답해라.]
[저와 베논이 합작해서 아가멤논을 소멸했어요.]
[…뭐라고?]
맴피스는 정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네깟 년이 아가멤논을 소멸했다고?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하지만 정말…….]
콰드드드드득-
맴피스가 손아귀에 힘을 주자.
레바논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온다.
[진실을 고해라.]
[하지만 정말… 이에요! 정말이라고요!]
[…….]
잠시간 멍하니 레바논을 바라보던 맴피스가 하늘을 보며 피식 웃는다.
[그렇게 잘난 척은 다 하더니 부하에게 배신을 당해 죽은 건가. 새삼 한심하게 죽었군. 어리석은 놈…….]
왜일까.
놈의 목소리에서 애환이 느껴지는 건 단순한 기분 탓일까.
[…….]
물끄러미 하늘만 바라보던 맴피스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래서, 나를 소멸하러 온 건가?]
[그래. 네 존재 자체는 대륙에 해악이 될 뿐이야.]
[내 존재가… 해악?]
놈의 어금니 사이로 비틀린 웃음이 번진다.
[놈과 똑같은 소리를 하는군.]
[엄연한 사실이니까.]
[병이 뭐가 나쁘지? 재앙이 뭐가 나쁘단 거냐. 성공 이면에 실패가 있듯, 삶의 이면에 죽음이 존재한다. 내가 그 죽음을 관장하겠다는 게 그리도 고깝나?]
맴피스의 물음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이 필요하긴 하지. 하지만 넌 도를 넘었어. 목숨을 갖고 장난을 쳤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아가멤논의 기억 속에는.
맴피스가 퍼뜨린 이름 모를 역병으로 인해 사람들이 좀비처럼 변하여.
대륙을 난장판으로 만든 전례가 있었다.
‘그래서 아가멤논도 어쩔 수 없이 대륙을 한번 멸망시켰던 거였고.’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건 비교적 최근이긴 했으나.
어쨌건 그러한 정보 덕에 맴피스를 결코 놔둘 수도, 놔둘 생각도 없었다.
[장난? 우습군. 난 그들에게 안식을 줬을 뿐이다.]
[안식? 사람들을 이지도 없는 시체처럼 만든 게 안식이다?]
[삶은 고통이다. 난 그들이 고통을 잊을 수 있게 만들어 준 거다. 놈들 또한 심연 속에서 내게 감사하고 있겠지.]
‘그냥 말이 안 통하는 새끼네.’
놈과 무슨 말을 나누건 얻을 수확은 없어 보였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겠어.]
[오, 그래? 난 꽤나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네놈은 아니었나.]
맴피스가 클클 웃다가 슬며시 어금니를 드러낸다.
[삶은 고통이다.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거든 네놈 또한 결국 형과 같은 선택을 하겠지.]
‘무슨 소리를 씨불이는 거야?’
내가 놈의 말에 숨겨진 의미를 유추하던 그때.
스으윽-
돌연 놈의 앞발이 지면 속으로 사라진다.
‘…뭐지?’
내가 의아한 눈빛으로 놈을 바라본 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으아아아아! 이, 이건 뭐야?!]
[괴, 괴물이다! 도망쳐!]
[오오… 맙소사… 주신이시여…….]
갑자기 신도들의 기도가 나의 머릿속에 빗발치기 시작했다.
‘이 녀석들은 또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하여 난 기도를 한 신도들 쪽으로 잠깐 시야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난 기이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어어어어어어-
그곳은 지옥이었다.
부모였던 이들이 서로를 물어뜯고, 형제자매였던 이들이 서로를 죽이기 위해 창날을 겨누고 있었다.
‘저 새끼가 설마… 역병을 뿌린 건가?’
하지만 분명 놈은 이 자리에 있건만 어째서 저런 일이 벌어진 걸까.
‘방금 발을 지면에 넣은 게 관련이 있나?’
좀처럼 의문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가운데.
맴피스가 입꼬리를 올린 채 입을 연다.
[이 세상은 유한하다. 목숨 또한 유한하며 삶 또한 유한하지. 그렇기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나는 그 고통을 덜어 줄 수 있다. 네놈의 고통 또한 말이다.]
[개소리를 길게도 늘어놓는군.]
나는 무심히 놈을 응시하며 말했다.
[삶이 그리도 고통스럽게 느껴진다면 내가 네놈에게 평안을 주마.]
[평안?]
크하하하하하-
[평안을 줄 수 있는 건 오직 나뿐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맴피스뿐이란 말이다!]
맴피스의 광소가 지면을 울리던 그때.
쩌어어억-
갑자기 허공을 찢고 나온 놈의 앞발이 나의 면전으로 날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