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화
‘저게 무슨…….’
레논은 크게 당황했다.
그 오만하고도 거만하기 짝이 없는 대악마들이 최상의 예를 표하고 있다니.
‘정말 주신이 마신을 소멸하고 새로운 마계의 주인으로 등극한 것이란 말인가…….’
그게 가능한 일인가 싶기도 했으나.
눈앞에 펼쳐진 환상은 단순히 환상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도 사실적으로 보였다.
스스슥-
이윽고 눈앞에 펼쳐졌던 환상이 사라지자.
“…….”
막사는 정적에 휩싸였다.
그 누구도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는 와중.
한 늙은 흑마법사가 천천히 입을 뗀다.
“아무래도… 정말 베논께서 운명을 건 전투에서 패배하신 것 같군.”
“아직 확신할 수 없습니다. 주신이 우리를 현혹하기 위해 이런 환상을 보여 준 걸 수도 있습니다!”
한 흑마법사의 반박에 늙은 흑마법사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그리 생각하는 게 정상이네. 나 또한 그런 의심이 드는데 하물며 자네들이라고 다를까. 하지만 갑자기 우리의 힘이 약화된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나?”
“그건…….”
“베논님께서 정말 주신과의 일전에서 패배하셨다면 그 모든 게 설명이 되네. 그러잖은가?”
그러나 대부분의 흑마법사들은 베논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좀처럼 믿지 못했고.
“만약 베논 님께서 우리를 시험하고자 그러신 거라면 어쩝니까?”
“우리는 전쟁 중이네. 이렇게 긴박한 상황에 우리를 시험하려고 했겠나? 환상은 진짜이네! 그러니 지금이라도 주신을 모셔야 하네!”
이제는 베논의 소멸 여부를 두고 간부들이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에 보다 못한 레논이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계약한 악마에게 물어보면 될 일 아닌가?”
“흠흠…….”
레논은 간단하면서도 명료한 해결책을 내놓곤 계속 말을 이어 간다.
“어쨌건 마계의 상황이 어떤지를 떠나 병력을 크라켄 왕국으로 물리는 걸로 하지.”
“하지만 부탑주님…….”
“그만. 더 이상의 반론은 듣지 않겠다.”
레논이 딱 잘라 말하자.
퇴각을 반대하던 흑마법사들은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 * *
일주일 뒤.
“소식 들었나? 흑마법사들이 물러났다는군.”
“허어… 정말 다행이군, 다행이야. 레바논 왕국이 아주 큰일을 해냈군 그래.”
레바논에서 퍼져 나간 소식은 삽시간에 대륙 곳곳으로 번져 나갔다.
“그래도 안도하긴 이르지. 페른, 페이트는 이미 놈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거기다가 크라켄 왕국까지 놈들과 손을 잡은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나? 대륙의 반이 놈들 손에 넘어간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렇긴 하네만… 레바논이 있는데 걱정할 것 있겠나?”
“그렇긴 하지만 만약 레바논도 무너진다면?”
“그건…….”
흑탑의 향후 행보는 대륙 모든 이들의 관심거리였다.
“아니면 흑탑을 정식 마탑으로 인정하고, 그들을 대륙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미쳤나? 시체나 팔아먹고 사는 놈들을 받아들이자고?”
“뭐… 놈들이 쓰레기인 건 맞지만, 대륙의 반이 놈들에게 넘어갔어. 이미 놈들이 차지한 왕국에는 새로운 흑탑들이 올라가고 있고. 그렇다면 차라리 놈들을 받아들이고 전쟁을 피하는 게 현명할 수도 있다, 이 뜻이네.”
흑탑을 대륙의 일원으로 받자는 의견은 비단 사람들 사이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었다.
“백탑주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미친 소리를 하는 것처럼 들리겠지.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 보게. 놈들은 메테오를 가볍게 소멸하는 엄청난 흑마법사를 보유하고 있네. 지금이야 놈들이 물러났다고 해도, 다시 싸운다면 승리를 확신할 수 있겠나?”
마법사들의 종주이자 모든 마탑 위에 오롯이 서 있는 백탑에서도.
그와 비슷한 의견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흑탑을 정식 마탑으로 인정하자는 말씀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건 전례가 없었던 일이고, 또 있어서도 안 될 일입니다!”
부탑주의 격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백탑주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나라고 이런 결정을 웃으며 내렸겠나? 시대의 흐름이 그러하니 흐름에 따르고자 하는 것이네.”
“그 흐름을 거부하고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게 마법사의 도리이지 않습니까?!”
“그럼 자네는 지금의 흑탑이 전력을 다해 백탑을 치거든 막을 수 있다고 보나?”
이미 한차례 암살자들이 백탑을 덮쳤던 터라 백탑의 전력은 완전치 못한 상태다.
그러한 상황에서 흑탑의 전력을 막기란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다른 왕국들과 모든 마탑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인간이란 참으로 이기적인 존재들이네. 자기 발에 불이 떨어지지 않고서야 쉽게 움직이질 않지.”
“그럼 정녕 흑탑을 마탑으로 인정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겁니까?”
부탑주의 물음에 백탑주는 크게 한숨을 내쉰다.
“글쎄……. 저들이 섬기고 있는 베논이 레바논의 손에 소멸이라도 하지 않는 한, 그런 일은…….”
벌컥-
“백탑주님! 큰일 났습니다!”
그들이 대화하던 중.
한 마법사가 숨을 헐떡이며 방 안으로 들어온다.
“…큰일?”
“예! 흑마법사들이 물러난 이유가 우리와 레바논의 협공 때문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마법사의 외침에 백탑주의 눈이 게슴츠레해진다.
“…그게 무슨 말이지?”
흑마법사들이 퇴각한 이유가 그것 때문이 아니라면.
도대체 놈들은 무엇 때문에 갑자기 군세를 돌린 것이란 말인가?
“놈들이 섬기던 마신이 소멸됐다고 합니다!”
“…….”
전령의 발언이 너무도 의외의 것이었기에.
백탑주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마신이… 소멸했다고? 허어…….”
허탈한 웃음을 흘리는 백탑주.
“우리의 협공이 두려워 피한 줄 알았건만… 우리는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친 게로구나…….”
마신의 소멸.
그의 소멸은 그를 섬기던 흑마법사들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럼 만약 흑마법사들이 퇴각할 때 그 후미를 노렸다면.
놈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힐 수 있었을 터.
“탑주님,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놈들을 공격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부탑주가 다시 당당히 운을 떼자.
백탑주는 애매모호한 표정을 짓는다.
“레바논이 베논을 소멸한 건 아닐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레바논의 성기사들이 진작 놈들을 쳤겠지. 하지만 놈들은 그리하지 않았어.”
“그렇단 건…….”
“아마 마계에서 내란이 벌어졌을 거다. 그리고 새로운 악마가 베논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겠지. 그렇지?”
백탑주가 소식을 들고 온 마법사를 보며 묻자.
마법사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예! 포획한 흑마법사의 악마의 말에 따르면, 새로운 신이 베논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했습니다!”
“…새로운 신? 그게 누구지?”
“주신, 랄프라고 합니다.”
마법사의 말이 끝나자.
백탑주는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채 중얼거린다.
“주신이라, 주신…….”
“흑마법사들이 차지한 왕국에서 그 성세를 늘려 나가고 있는 신입니다.”
부탑주가 그의 중얼거림에 답했으나.
백탑주의 표정은 딱딱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단 건 결국 놈들이 섬기는 신만 바뀌었을 뿐이지, 크게 달라진 건 없다는 이야기군.”
“그래도 베논과 달리 페른, 페이트 왕국에서의 평판이 썩 나쁘지 않은 걸 봐선, 아주 악신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봐야 결국 악마들이 섬기는 신일 뿐이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는 백탑주.
“후… 결국 달라지는 건 없겠군. 흑탑에 전령을 보내라.”
“레바논에서 크게 반대할 텐데… 정말 괜찮겠습니까?”
“흑탑을 정식 마탑으로 인정은 하되 우린 중립을 지키겠다고 해야지.”
* * *
백탑주가 어쩔 수 없는 결단을 내리고 있던 그 시각.
[음…….]
펠기누스는 재앙의 문이 있는 곳을 주시하며 낮게 침음한다.
사르륵, 사르륵-
한때는 설원이었던 이곳이 이제는 맴피스의 영역이 된 것인지.
대지 곳곳이 검게 얼룩져 있다.
[놈이 점차 영역을 넓혀 나가고 있는 것 같은데…….]
한시라도 빨리 맴피스를 처리해야하건만.
주신은 왜 저 상황을 방관하고 있는지 그녀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쩌저저저적-
균열을 열고 들어가 마계로 복귀한 펠기누스.
그녀는 곧장 마계를 오시하고 있는 주신을 찾아갔다.
[주신님, 주신…….]
주신을 부르려던 그녀는.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뭘 보고 계시는 거지?’
[음… 백탑이 저런 결정을 내릴 줄이야. 좀 의외네.]
백탑 부근을 보고 있는 걸까.
그는 묘한 탄성을 흘리며 감탄하고 있었다.
[의외라니요?]
[백탑이 흑탑을 정식 마탑으로 인정하기로 한 모양이야.]
[아아… 그렇군요.]
펠기누스가 대수롭지 않아 하는 반응을 보이자.
주신은 흘끔 눈을 돌려 그녀를 바라본다.
[별로 놀랍지 않은가 보네.]
[놀랍긴 하지만 결국 인간사의 일부일 뿐이잖아요.]
앙숙끼리 손을 잡는 경우가 없는 일도 아니건만.
[평소보다 목소리에 날이 서 있는 것 같네. 심기가 불편할 일이 있었나?]
[…정말 저대로 맴피스를 놔둘 생각이신 건가요?]
펠기누스의 물음에 주신은 그제야 그녀를 보며 웃는다.
[아아, 뭐 때문에 그러나 했더니 그것 때문이었어?]
[그것 때문이라뇨? 그렇게 단순히 넘길 사안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녀의 대답에 천천히 입꼬리를 올리는 주신.
[설마 내가 아무 이유도 없이 놈을 방치하고 있을까.]
[그럼 일부러 놔두셨단 말씀이신가요?]
[그래.]
주신은 자신의 머리를 가리켜 보이며 계속 말한다.
[아가멤논이 남긴 지식 중에 맴피스에 대한 정보도 있더군. 그래서 좀 찾아봤지.]
[정보요?]
[그래. 놈이 머물고 있는 대지가 점점 놈의 힘으로 오염되고 있는 건 알고 있지?]
펠기누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신은 계속 말한다.
[그런데 말이야. 영역이 넓어질수록 놈의 힘이 강해지는 것도 맞지만, 영역을 넓히려면 놈의 힘이 소모된다고 하면 어떨까?]
[그 말씀은…….]
눈을 동그랗게 뜬 펠기누스를 보며 주신은 빙긋 웃는다.
[일단은 놈이 땅따먹기를 하게 놔둬. 어느 정도 놈이 땅을 먹으면 그때 움직일…….]
빙긋 웃던 그가 갑자기 싸늘한 미소를 짓는다.
[호오… 어쩌면 저렇게 예상을 벗어나질 않을까.]
[네?]
펠기누스의 반문에도 주신은 말없이 재앙의 문 부근을 응시할 뿐이었다.
* * *
같은 시각.
[젠장… 젠장!]
대륙 북단에 도착한 레바논이 얼룩진 땅을 노려보며 욕지기를 토해 낸다.
빛의 여신. 대륙의 희망이자 구원자.
수많은 수식어도 지금의 그녀에겐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겨우 한낱 인간 따위가 날…….]
그저 열쇠이자 장난감 정도로 취급했던 인간.
하나 지금은 한낱 인간이었던 놈의 눈치나 보며 생을 연명하는 처지에 놓였다.
[감히 날… 그딴 눈빛으로 노려봐?]
분노에 몸을 파르르 떠는 레바논.
왜 주신이 그녀를 살려 뒀는지는 그녀조차 알 수 없었으나.
이건 기회였다.
[만약 맴피스의 환심을 살 수 있다면…….]
어느 쪽의 편을 들어도 답이 없다면 차라리 맴피스를 구슬려 보는 게 나을 터.
[…….]
레바논은 천천히 재앙의 문으로 향했고.
그르릉-
문에서 몸이 반쯤 나온 맴피스를 향해 다가갔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맴피스 님.]
[넌… 레바논이군.]
검은 늑대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레바논은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맞아요. 절 기억해 주시다니, 정말 영광이네요.]
하나 레바논의 살가운 웃음에도 맴피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낯간지러운 소리는 집어치우고 날 찾아온 이유를 말해라.]
[전 맴피스 님을 도와 세계를 멸망시키고 싶어서요.]
[네가… 날 돕겠다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레바논을 응시하던 맴피스의 눈이 곧 곡선처럼 변했다.
[원하는 게 있나 보군.]
[별건 아니에요. 그저 지금의 제 위치를 인정해 주시고, 또 주신을 소멸해 주시면 돼요.]
[…주신?]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다.
곧 입꼬리를 올리는 맴피스.
[간단한 일이군.]
맴피스가 활짝 웃자.
그의 입 사이로 검붉은 어금니들이 드러난다.
[좋다. 다만 지금의 나는 영역을 넓히는 데 힘을 소비하고 있다. 그러니 네가 나를 도와라.]
[뭘 도와드리면 되죠?]
[가까이 와라.]
맴피스의 눈치를 살피던 레바논이 그의 곁으로 조심스레 다가가던 그때.
콰아아아아앙-
맴피스가 손을 들어 레바논이 있던 자리를 있는 힘껏 내려친다.
사사사삭-
그러나 황급히 빛이 되어 맴피스의 손아귀를 벗어난 레바논.
그녀는 죽일 듯 맴피스를 노려보며 소리친다.
[지금 이게 무슨 뜻이죠?!]
[네년이 갖고 있는 힘이 내게 도움이 될 것 같아 가져가려 한 건데, 뭐가 문제지? 내게 도움을 준다고 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