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도움?]
나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게 소멸당하려고 찾아온 거라면 도움이 맞긴 하겠네.]
나의 스산한 말투 때문일까.
레바논은 힘겹게 웃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뇨. 전 정말로 당신에게 도움을 드리려고 온 거예요.]
‘우습네.’
불과 몇 년 만에 나와 그녀의 관계가 이렇게 역전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래. 뭐라 지껄이는지 한번 들어나 볼까.’
내가 이야기해 보라는 듯 손을 까딱이자.
그녀는 애써 미소를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지금 재앙의 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시나요?]
[알지.]
나의 대답에 레바논이 부리나케 말을 이어 간다.
[그 안에서 나온 존재가 아가멤논의 동생이라는 사실은요?]
[그것도 알고 있어.]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의 유용함을 보이고 싶었던 건지.
나의 대답에 그녀는 잠깐 몸을 움찔거렸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자, 잘됐네요. 상황을 알고 계신다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당신이 정복한 마계의 군세와 제 세력의 힘을 합친다면, 아무리 상대가 맴피스라고 해도 충분히 물리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나와 손을 잡고 싶다, 그 뜻인가?]
[…….]
레바논은 침묵으로 일관했으나, 또 내 말을 부정하진 않았고.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희한하네.]
[…네?]
[분명 최근까지만 해도 나를 재앙의 문을 여는 매개체로 삼고 싶어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도대체 무슨 마음의 변화가 생긴 걸까?]
나의 물음에 레바논의 표정이 눈에 띄게 흔들린다.
[오호호호,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전 그저 대륙의 안녕을 위해…….]
[대륙의 안녕?]
‘안녕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나는 실소를 흘리곤 무심히 입을 뗐다.
[내가 생각한 네 목적을 한번 말해 볼까?]
[제 목적은 대륙의…….]
[원래는 재앙의 문을 타고 다른 세계로 넘어가려고 했겠지. 근데 알고 보니 재앙의 문이 통로가 아니라 봉인지였다. 그래서 도망칠 곳이 없으니 어떻게든 내 손을 잡아 보려 온 거고. 맞잖아?]
[그건…….]
정곡을 찔렸는지 바로 반박하지 못하는 레바논.
[솔직하게 말해.]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근데 그게 그리 잘못된 일인가요?]
[재밌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그 삶을 연장하려고 발버둥 치는 레바논을 보고 있자니 그저 웃음만 나왔다.
스윽-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레바논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며 목소리를 높인다.
[저, 절 소멸하려 든다면 곱게 당하지만은 않을 거예요.]
[호오… 곱게 당하지 않는다?]
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다가 손을 까딱였다.
[일단은 내 앞에서 꺼지도록.]
[…….]
레바논이 모멸감에 몸을 떨면서도 얼른 자리를 벗어나자.
[왜 그녀를 그냥 보내 주신 건가요?]
펠기누스가 내게 질문을 던져 왔다.
[소멸하면 그걸로 끝이잖아.]
[…네?]
[그녀는 오랫동안 살면서 나를 즐겁게 해 줘야 하거든.]
이미 상하 관계가 명확하게 정립된 탓인지.
레바논은 내게 있어 더 이상 신이라기보단 장난감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
그런 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펠기누스는 나지막한 탄성을 터뜨린다.
[하지만… 주신께서 맴피스와 일전을 벌이시는 동안 혹시라도 레바논이 기습을 가해 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나는 확신에 차 대답하곤 슬쩍 고개를 돌려 지상을 응시했다.
나의 시선 끝자락에는 혼란에 먹혀 어쩔 줄을 몰라 하는 흑마법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음… 그보다 일단 베논의 빈자리를 채워야 하는데.]
[네? 물론 그것도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맴피스가 더 급한 일인 것 같은…….]
[놈은 당분간 그냥 놔둔다.]
나의 말이 끝나자.
펠기누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냥… 놔두신다고요?]
[그래. 그래야 사람들이 나의 존재에 감사함을 느끼고 절박하게 나를 찾을 테니까.]
펠기누스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날 바라봤으나.
곧 수긍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 * *
1주일 뒤.
레바논 왕국 중남부에 위치한 팔메이성.
그 성벽 위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성기사들이 전방을 응시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거참 희한하군, 희한해.”
“그러게 말이네. 왜 갑자기 놈들이 공세를 멈춘 건지 모르겠군.”
그들은 아직 채 수습하지 못한 시신이 가득한 평원을 힐끔 내려다보며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레바논 님의 은총이 임해서 놈들에게 무슨 변고가 생긴 걸지도 몰라. 내란이 일어났다거나 아니면 질병이 번졌다든가 말이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라. 어쩌면 소문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
“소문이라니?”
동료의 물음에 옆에 있던 성기사가 대답한다.
“듣자 하니 흑마법사들의 힘이 크게 쇠약해졌다고 하던데.”
“…음? 갑자기 힘이 쇠약해지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나도 소문을 전해 들은 것뿐이라 정확한 이유는 모르네. 그게 사실인지조차 의문이고.”
화두를 던졌던 성기사가 어깨를 으쓱이자.
옆에 있던 동료는 웃으며 창대를 내린다.
“힘이 약해졌건 내란이 벌어졌건 간에 우리에겐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가 없군.”
“뭐, 그렇다고 해도 방심은 금물일세. 저 잔혹한 놈들이 언제 또 침공을 개시할지 몰라.”
“그야 그렇지. 후… 도대체 이놈의 전쟁은 언제쯤 끝이 날는지…….”
성기사의 나지막한 한숨이 바람을 타고 피비린내로 얼룩진 대지를 떠돈다.
* * *
한편, 같은 시각.
흑마법사들의 막사.
“으음…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군.”
“이를 어떡하면 좋단 말입니까?”
흑마법사들의 안색은 평소보다 어두운 상태였다.
“우리의 힘이 약화됐다는 사실을 저들이 알게 된다면 필시 총공세를 펼쳐 올 겁니다. 그러니 그 전에 퇴각을 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베논께선 우리에게 대륙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셨네. 그런데 여기서 퇴각을 하면 우리는 베논 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과 마찬가지인 걸세!”
“그럼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지속하자는 겁니까? 뻔히 개죽음을 당할 걸 알면서도요?!”
간부들이 언성을 높이며 서로의 의견을 피력했으나.
좀처럼 해결책은 나오질 않았다.
“부탑주님, 부탑주님께서 결단을 내려 주셔야만 합니다.”
좀처럼 해결책이 나오지 않자.
간부들은 모두 레논을 응시하며 그의 결단을 촉구했다.
“으음…….”
그에 나지막이 침음하는 레논.
그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누군가가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흑남께서 계셨다면 결단을 내려 주셨을 텐데…….”
“허어, 자네! 지금 그게 무슨 말인가? 베논께서 놈을 배신자라고 판명하셨는데, 어찌 그 이름을 거론한단 말인가?!”
“그렇기야 하지만, 전 도저히 이해가 안 가서 그럽니다! 흑남에게 배신할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 배신했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갑자기 우리의 힘이 약화된 것도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한 흑마법사의 발언에 레논 부탑주 또한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나 역시 자네와 같은 생각이네.”
“부, 부탑주님!”
“그러나 베논 님의 말씀을 어길 수 없는 것도 사실이지.”
그의 말이 끝나자.
간부들 중 일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럼 부탑주께선 패배가 예정된 이 전투를 지속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에 레논 대신 다른 간부들이 목청을 높인다.
“베논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대륙의 지배권을 약속하셨네. 그런데도 그 알량한 믿음 때문에 베논 님의 약속을 무시하고 퇴각하자는 건가!”
“약속도 약속 나름이지요! 레바논을 비롯한 백탑의 마법사들이 우리의 숨통을 조여 오고 있는데, 지금 상황에서 전투를 속행한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다시금 간부들 간에 격렬한 설전이 오가자.
“후우… 잠시 쉬었다 하지.”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레논 부탑주는 도망치듯 막사 밖으로 빠져나갔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전투를 속행한다면 필시 패배할 것이오.
전투를 하지 않으면 베논의 신약을 어기는 꼴이 된다.
어떤 선택을 하건 그는 군세를 이끄는 통솔자로서 책임을 져야만 했다.
“…….”
레논이 한참을 갈등하며 막사들을 배회하던 그때.
“아이, 씨……. 또 졌다고? 카드 돌려!”
“그래. 혹시 알아? 이번에는 이길 수도 있지.”
한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카드를 돌리는 흑카데미의 학생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
저마다 자리 앞에 금화를 놓고 카드를 하는 걸 봐선 도박을 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레논은 그들을 타박하기보단 멀찍이서 그들이 카드를 돌리는 걸 지켜봤다.
‘…그래. 결국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할 일이라면, 나 하나로 끝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가 퇴각을 결정하기만 한다면.
적어도 남은 군세는 살아서 검은 대지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며.
그 군세들로 다시 훗날을 도모할 수 있을 터.
“…….”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는 레논 부탑주.
‘비록 이 자리에는 없지만 흑남님 또한 나와 같은 결정을 내리셨겠지.’
베논의 말처럼 그가 정말 흑마법사들을 배신했는지는 모른다.
하나 만약 그가 있었다면 그와 똑같은 결정을 했으리라.
‘좋다. 내 한 목숨과 검은 대지의 미래를 맞바꾸는 것이라면… 기꺼이 바꿔 주겠다.’
마침내 레논이 결단을 내리고 지휘 막사 안으로 돌아가려던 그때.
[베논의 종들은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돌연 누군가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그의 머릿속을 울려왔다.
[나는 신들의 신, 만류를 관장하는 주신이다.]
‘이게 무슨…….’
당황한 레논은 주변을 힐끔 살폈다.
“방금… 너도 들었어?”
“어. 너도?”
비단 그에게만 목소리가 들려온 게 아니었는지.
학생들을 비롯하여 대다수의 흑마법사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희가 섬기던 마신 베논은 나의 손에 의해 소멸했다.]
‘…뭐라고?’
스스로를 주신이라 칭한 존재에게서 폭탄 같은 발언이 흘러나오자.
레논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베논께서… 소멸을 당하셨다고?’
[하여 신들의 율법을 따라 마계는 나, 주신의 이름 아래에 들어오게 되었다. 따라서 그를 섬기던 너희 또한 베논을 잊고 나, 주신을 섬겨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닥친 고난 또한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혼란한 마음을 안고 황급히 막사으로 돌아간 레논 부탑주.
“부, 부탑주님, 들으셨습니까?”
“주신이라는 놈이 베논 님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간부들 또한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들었네.”
“정말… 베논께서 주신이라는 놈에게 당하신 건 아니겠지요?”
“하지만 만약 그 목소리가 사실이라면… 우리의 힘이 쇠약해진 이유가 설명이 되는군.”
베논의 소멸로 인해 모든 흑마법사가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
그들의 힘이 약해진 것도 설명이 됐다.
“그럼 정말 방금의 목소리대로 주신을 섬겨야 하는 겁니까?”
“그게 무슨 망언인가?! 베논 님을 두고 다른 잡신을 섬기겠다는 건가?!”
늙은 흑마법사가 역정을 내자.
질문을 던진 젊은 흑마법사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만약 정말 주신이 새로운 마계의 주인으로 등극한 거라면요?”
“베논 님께선 결코 패배하시지 않는다, 결코!”
“그럼 방금의 목소리는, 우리의 힘이 약해진 건 어떻게 설명하시렵니까?”
“그건… 그래! 베논 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자 하시는 게 분명하네!”
방금의 상황을 두고 다시 간부들이 말다툼을 벌이던 그때.
스스스슥-
“이, 이건…….”
갑자기 그들의 눈앞에 환상이 드리우기 시작했는데.
[신들의 신, 만류의 왕 주신이시여! 저 아바돈의 경배를 받으소서!]
[저 아몬, 주신님께 영원한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저 아스타로트…….]
거대하고도 검은 신전 안에서.
동상이나 책으로만 접했던 대악마들이 누군가를 향해 절을 하며 경배를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