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화
[…뭐라고?]
어딘가 다급해 보이는 베논의 모습에 코웃음을 치는 레바논.
[같이 힘을 합치자고 해도 들어 처먹질 않더니, 이제 와서 그러는 이유가 뭔데?]
[…힘의 차이를 느꼈다.]
많은 것이 함축되어 있는 그의 한마디에.
레바논은 입술을 움찔거린다.
[너… 설마 놈한테 패배한 건 아니지?]
[…….]
침묵으로 일관하는 베논.
[이건 내 예상의 영역을 넘어섰는데…….]
아무리 흑남이 아가멤논의 후계자라고 하더라도.
베논은 그녀와 함께 아가멤논을 소멸했던 신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토록 무기력하게 자신의 영역을 빼앗길 줄이야.
[나는 네 동정을 원하는 게 아니다. 나와 함께할 건지 말 것인지, 그에 대한 대답만 해라.]
[아직도 세울 자존심이 남아 있다는 게 더 놀랍네.]
아직 잃을 게 남아 있기에 저 높다란 자존심도 꺾일 생각을 않는 걸까.
[그렇다면 남은 것까지 다 뺏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게 궁금하긴 하네.]
[…뭐라고?]
베논의 물음에 빙긋 웃으며 말을 돌리는 레바논.
[좋아. 함께할게.]
[잘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너와 내가 손을 잡는다면 승산은 충분할…….]
피식 웃던 레바논의 손에 어느새 빛나는 검이 쥐여 있자.
베논은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무슨 의미지?]
[함께하자며?]
레바논이 스산한 미소를 입가에 건 채 계속 말한다.
[내가 네 힘을 흡수한다면 우리는 진정한 의미로 함께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니겠어?]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그에 그녀는 베논을 쓱 훑고는 씨익 웃는다.
[지금 같은 기회를 놓치는 새끼가 등신인 거지.]
[…….]
스스로 호랑이 굴에 발을 디딘 자신의 선택을 원망하는 대신.
검은 대검을 꺼내 드는 베논.
[결국 최악의 선택을 하는군.]
[최악? 나한텐 이게 최선이야.]
그 말을 끝으로.
콰과과과과과광-
빛과 어둠이 어울린 굵은 곡선이 연달아 맞부딪치고, 커다란 굉음이 천계를 뒤덮는다.
* * *
1주일 뒤.
빙하가 가득하고 매서운 한파만이 비명처럼 울려 대는 대륙의 북단.
생명체라곤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이 얼어붙은 땅 한쪽에서.
쩌저저적-
돌연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크윽…….]
그리고 그 안에선 검은 장발의 남자가 쓰러지듯 튀어나왔는데.
몸 곳곳에 깊은 상흔이 가득한 게, 당장 죽어도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빠르게 닫히는 균열을 응시하며 조용히 중얼거린다.
[레바논…….]
몇 번이고 그 이름을 곱씹고 또 곱씹는 베논.
결국 그가 생각하던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탓일까.
그의 눈빛에는 형형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나는 결코 소멸하지 않을 것이다. 결코…….]
홀린 것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던 그는.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어디론가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휘이이이이잉-
얼마나 걸었을까.
세찬 눈보라로 인해 한 치 앞도 제대로 볼 수 없던 중.
무언가가 그의 시야에 잡혔다.
저벅, 저벅-
베논은 눈밭을 밟아 가며 천천히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
거대하고도 검은 문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주변을 살피는 베논.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환경과는 사뭇 대비될 정도로.
문 주변에는 티끌만 한 눈송이도 쌓여 있질 않았다.
[이건… 여전하군.]
재앙의 문.
누가 이것을 만들었는지, 언제 이 문이 이곳에 생겼는지는 오직 아가멤논만이 알고 있던 정보였기에.
그조차도 문의 역사에 대해선 알지 못했다.
하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문이 개방된다면 이차원과 연결되는 통로가 생성되며, 이차원의 존재들이 이곳으로 넘어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지배하지 못하는 세상은 더 이상 필요 없다.]
더 이상 가질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세상은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베논은 문을 열어 세계를 멸망시킴과 동시에 문을 타고 이차원의 세계로 넘어갈 계획이었다.
스윽-
천천히 문에 손을 뻗는 베논.
[흐으으읍…….]
그의 양손에서 검은 힘이 파도처럼 휘몰아치자.
문에 새겨져 있던 기이한 술식들이 붉게 물들어 가기 시작한다.
[크윽…….]
하나 아무런 매개체도 없이 문을 열려고 한 대가일까.
쩌어어억, 후드드득-
베논의 몸 곳곳에서 커다란 균열들이 생겨났고.
피부였던 것이 굳은 진흙처럼 툭툭 떨어져 나갔으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아!]
그저 악에 받친 한 마리의 악귀가 되어.
문을 여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소모하는 베논.
그러한 그의 간절한 열망이 통한 것일까.
화아아아아아악-
마침내 재앙의 문 사이로 형형한 광채가 새어 나오더니.
문이 좌우로 벌어지기 시작한다.
[…훌륭하군.]
완전히 개방된 재앙의 문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베논.
혹시나 이세계의 존재들이 먼저 문을 타고 넘어올 수도 있었기에.
[몰락도 나를 무너뜨릴 수는 없다. 이제 곧 다가올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리곤 문 안쪽으로 발을 디밀었다.
그러던 그때.
웅웅웅웅-
갑자기 문 안쪽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무슨…….]
이제 막 문을 개방했건만 설마 벌써 이세계에서 다른 존재가 넘어오려고 하는 것일까?
베논이 당혹해하던 찰나.
스으윽. 쩌저저적-
돌연 문 사이로 검은 손이 튀어나와 우악스럽게 그의 몸을 잡으려 들었다.
[…….]
그에 베논은 곧바로 대검을 꺼내어 들어 손을 자르려 했으나.
텅-
그의 일격은 검은 손에 이렇다 할 생채기도 내지 못하고 튕겨져 나왔다.
[…이럴 리 없다. 이럴 리 없어!]
아무리 거듭된 전투로 그의 힘이 전에 비해 크게 약해졌다고는 해도, 그는 엄연한 마신이었다.
베논이 당혹감과 굴욕감으로 표정일 일그러뜨리던 중.
그그그그긍-
[…베논, 오랜만이로군.]
활짝 열린 문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것의 모습을 본 베논은 잠시간 멍하니 서 있다가 입술을 꿈틀거렸다.
[…이세계로 통하는 문은 애당초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건가……. 크하하하하하하하하! 우습구나. 우스워!]
하늘을 노려보며 광소를 터뜨리는 베논.
[아가멤논! 몇백 년간 나를 속였던 것이냐! 대답해라!]
그러나 이미 소멸된 존재가 그에게 대답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문안에서 다시 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최후의 시간은 충분히 즐겼나? 그럼 이제 죽어라.]
[크하하하하하하하!]
광소하는 베논의 머리 위로 거대한 주먹이 떨어져 내렸고.
콰아아아아아앙-
빙하 지대를 뒤엎을 정도로 거대한 충격이 대륙 북단을 뒤덮는다.
* * *
한편, 같은 시각.
마계에 머무르며 상황을 정리하고 있던 난.
갑작스러운 힘의 파동에 재앙의 문 부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 저건 도대체 뭐야?’
문밖으로 상반신이 반쯤 튀어나온 흉측한 생물을 보며 난 생각했다.
‘설마 저게 이세계에서 넘어온 생명체인 건가?’
그러나 난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럼 베논이 진작 문을 타고 넘어갔겠지.’
하지만 놈은 이세계로 넘어가는 대신 저 괴생물과의 전투를 택했고.
패배와 함께 소멸한 것으로 추정됐다.
‘설마 재앙의 문이란 게 사실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문이 아니라 봉인지 같은 거였던 걸까?’
내가 거듭 고민하던 그때.
쩌저저저적-
괴물을 반쯤 토해 낸 재앙의 문에 조금씩 균열이 가고 있는 게 나의 눈에 들어왔다.
‘씁… 아무래도 진짜 봉인지였나 보네.’
아마도 아가멤논이 레바논과 베논을 속이려고 거짓말을 했던 모양이다.
‘귀찮게 됐네.’
베논과 레바논만 처단하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건만.
저 괴이한 존재까지 처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으신가요?]
내가 계속 고민하던 그때.
나의 표정을 본 펠기누스가 슬며시 질문을 해 왔다.
[베논이 재앙의 문을 열었다.]
[그건… 좀 아쉽게 됐네요.]
[아쉽다고?]
나의 물음에 펠기누스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이제 영영 놈을 잡을 길이 없어졌잖아요.]
‘펠기누스도 재앙의 문이 이세계로 가는 문인 줄 알고 있는 건가.’
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상황이 조금 이상해졌어.]
내가 그녀에게 대강의 상황을 설명하자.
그녀의 눈이 점차 휘둥그레졌다.
[그러니까… 재앙의 문에서 검은 거신 같은 게 튀어나와서 베논을 삼켰다는 건가요?]
[그래. 혹시 뭐 아는 게 있어?]
[글쎄요…….]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그녀의 표정이 어째선지 조금 어두워 보였다.
[제가 아는 검은 거신이라면… 하나뿐이에요.]
좀처럼 정보가 없던 와중에 펠기누스가 뭔가 아는 눈치를 보이자.
나는 크게 반색했다.
[잘됐네. 그게 누군데?]
[맴피스. 아가멤논 님의 동생이에요.]
[동생이라고?]
‘동생이 있었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펠기누스.
[네. 하지만 놈은 아가멤논 님께서 소멸한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소멸 대신 봉인을 택하셨던 모양이네요.]
펠기누스는 내게 검은 거신에 대한 정보를 풀어놨다.
‘그러니까 정리를 하면… 동생 놈이 자기가 만든 세계에 온갖 역병이랑 혼란을 일으키니까 화가 난 아가멤논이 처리했다는 건데…….’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문뜩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아가멤논은 놈을 친형제라 죽이지 못했던 거야, 아니면 죽일 여력이 안 돼서 봉인을 해 둔 거야?]
전자라면 크게 상관은 없겠으나.
만약 후자의 상황이라면 내게도 변수로 작용하게 될 터.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펠기누스도 그 사실은 잘 모르는지 고개를 젓자.
나는 계속 질문을 이어 갔다.
[그럼 어느 정도로 강한지는 알아?]
[그게… 제가 갓 탄생했을 때 아가멤논 님이 맴피스와 싸우시는 걸 본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호각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호각이라…….]
‘씁… 그럼 보통 강한 게 아니라는 거잖아?’
최소한 나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라고 봐도 좋을 터.
‘이것 참…….’
베논의 소멸로 인해 문의 정체를 파악한 것에 안도를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새로운 존재의 등장에 한숨을 내쉬어야 하는 건지.
[한 가지만 더 묻지. 맴피스와 아가멤논의 사이는 어땠어?]
[서로 못 죽여 안달이었죠.]
[…그래.]
그렇다는 것은 결국 아가멤논의 유지를 이은 나와 맴피스의 전투는 반드시 벌어질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흠, 그럼 놈이 아직 문에서 다 못 나왔을 때 공격하는 게 맞겠지.’
놈의 힘이 온전치 못할 가능성이 높은 지금이야말로 맴피스를 가장 손쉽게 처리할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럼 지금 당장 이동하는 게…….’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던 그때.
쩌저저저적-
갑자기 나의 앞에 웬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뭐지?’
내가 의아하게 균열을 바라보던 중.
누군가가 균열 사이에서 천천히 걸어 나온다.
‘저년은…….’
[오랜만이에요, 흑남, 아니… 주신님.]
도대체 무슨 낯짝으로 나를 찾아온 건지.
나는 미소를 머금고 있는 레바논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응시했다.
‘미친년인가?’
원래 정신 나간 년이라는 건 알고 있었으나.
더 이상 삶에 미련이 없어 내 손에 죽고자 찾아온 걸까?
[네년이 원하는 게 소멸이라면 그리해 주지.]
[잠깐! 잠깐만요!]
레바논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를 만류한다.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전 주신님께 도움을 드리기 위해 찾아온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