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72화 (172/200)

◈ 172화

[질서를 재정립하는 건 여기 계신 후계자님이 하실 일이지, 네놈 따위가 거론할 일이 아니다!]

그에 펠기누스는 맞받아치듯 일갈하곤.

내가 채 뭐라 하기도 전에 아바돈을 향해 쇄도했다.

[어리석은 년! 죽어라!]

아바돈이 날아드는 펠기누스의 면전을 향해 검을 휘두르자.

사사사사삭-

초승달 같은 검은 궤적이 그녀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우습네.]

그에 펠기누스도 창을 꺼내어 날아드는 초승달의 중심부에 일격을 내지르자.

콰아아아아앙-

맞물린 창과 초승달 사이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

굉음이 대지를 진동시키고 서로가 서로의 눈을 노려보던 중.

펠기누스가 창을 한 바퀴 돌리곤 아바돈의 검은 투구로 창을 힘껏 내지른다.

쇄애애액-

붉어진 창날 끝이 투구에 닿자.

창날이 닿은 부분을 시작으로 투구에 미세한 균열이 나던 그때.

터어어엉-

아바돈이 왼손에 들고 있던 카이트 실드로 후려치듯 창을 밀쳐 낸다.

[펠기누스!]

자신의 투구에 균열이 생긴 것에 분노하기라도 한 걸까.

귀곡성 같은 아바돈의 고성이 일대를 울리자.

스스스스슥-

그의 주변에 일렁거리던 검은 아우라가 안개처럼 퍼져 나가더니.

[배신자에게는… 소멸만이 있을 뿐이다!]

폭음이 일며 격렬한 폭발이 자리를 뒤덮는다.

하나 날개로 몸을 덮어 폭발을 막아 낸 펠기누스가 날개를 치우며 비웃음을 던진다.

[그깟 파멸 마법으로 내 몸에 생채기나 낼 수 있을 것 같아?]

[주둥이는 멀쩡한 모양이구나!]

분노한 아바돈이 말에서 뛰어내려 질주하자.

그에 질세라 펠기누스도 달려드는 아바돈을 향해 창을 내지른다.

콰아아아아앙-

‘흠…….’

아바돈과 펠기누스가 한 몸처럼 얽혀 미친 듯이 싸우자.

나는 그들의 결투를 보며 생각했다.

‘확실히 펠기누스가 다른 대악마들보다 강한가 보네.’

언뜻 전투가 호각처럼 보이긴 했으나 자세히 뜯어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아바돈의 일격은 펠기누스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던 반면.

펠기누스의 공격이 아바돈의 신체에 적중할 때면.

사사사사삭-

놈의 주변으로 퍼져 있던 검은 안개가 크게 요동쳤으니 말이다.

푸욱-

그러던 그때 펠기누스의 창이 아바돈의 갑주를 찢고 옆구리에 꽂힌다.

‘끝난 건가.’

누가 봐도 승자와 패자가 명확하게 갈린 상황이었으나.

아바돈의 입에서 쇳소리 같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네년이 나보다 강하다는 사실은 인정하겠다. 그러나… 네년은 절대로 나를 소멸할 수 없다! 절대로!]

사하하하하하하하-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었던 걸까.

실제로 창에 꿰뚫린 부위로 검은 안개가 들어차더니.

삽시간에 상처가 회복되어 처음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 아닌가?

‘호오… 재생 능력이 제법 뛰어나네.’

확실히 불사와 파멸, 그 상징적인 단어들과 함께하는 악마라 그런 걸까.

[그깟 재생 능력을 믿는 건 아니겠지? 네놈이 회복할 수 없을 때까지 죽이고 또 죽이면 그만이야.]

[그럼 죽여 봐라……. 날 소멸해 보란 말이다!]

콰아아아아앙-

다시금 두 대악마가 상처도 아랑곳 않고 맹렬히 전투를 벌인다.

하나 분명 펠기누스가 우위를 점하고 있음에도.

아바돈은 좀처럼 쓰러지질 않았다.

‘아오. 더럽게 오래도 싸우네.’

펠기누스에게 기회를 주고자 방관하고자 했으나.

너무 전투가 길어지자 보다 못한 난 저 전투를 끝내고자 소매를 걷어붙였다.

‘악마들 상대로는 이게 약이지.’

웅웅웅-

나는 아바돈을 응시하며 원초적인 창조의 힘인 성마법을 발현했다.

아아아아아아아-

그러자 어디선가 여인들의 아리따운 음성이 들려오더니.

거멓던 하늘 아래로 찬란한 광채가 드리운다.

[저건…….]

[랄프 님…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지…….]

두 대악마가 상반된 반응을 보이던 그때.

파바바바바바박-

그들의 머리 위로 광채를 머금은 검들이 빗발치듯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레바논의 힘……. 네놈이 어째서……. 잠깐, 그렇다는 건… 흑남 네놈… 네놈이 정말로 아가멤논의 후계자였구나!]

카이트 실드를 들어 쏟아지는 검들을 막아 내던 아바돈이 고함을 지르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베논이 아무 말도 안 했던 모양이네. 그 정도면 버림받은 것 아냐?”

[닥쳐라! 네놈을 소멸하고…….]

갑자기 어디서 힘이 난 건지 아바돈은 펠기누스의 창을 확 잡아 허공으로 힘껏 던지곤.

[베논께서 이륙하실 대업의 디딤돌이 되겠다!]

나를 향해 맹렬히 쇄도해 오기 시작했다.

붉은 안광을 흩뿌리며 달려오는 검은 기사를 보며.

나는 손가락을 까딱였다.

[예의를 갖춰라.]

그러자.

콰드드득-

아바돈의 다리 부근에서 비틀린 쇳소리가 울리더니.

아바돈은 그대로 바닥을 몇 바퀴나 뒹군다.

[크으윽…….]

아바돈은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도.

몇 번이고 힘없이 주저앉곤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본다.

[어째서 네놈이 베논 님의 힘까지… 사용하는 것이냐.]

“이래도 계속 낡은 배에 타고 있으려고? 지금이라도 갈아타는 편이 네게도…….”

[닥쳐라! 내 충성을 받으실 분은, 오직 베논 님뿐이시다!]

아바돈의 양손에 기이한 술식이 그려져 가자.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나는 두 손을 들어 검지를 위로 까딱였다.

콰자자작-

[크어어어억!]

아바돈의 두 팔에서 기이한 울림이 일어남과 더불어.

놈이 구현하던 술식은 사라지고, 두 팔은 인형의 그것처럼 덜렁거릴 뿐이었다.

[네놈이… 네놈이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나의 충성심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흠… 그래?”

내가 천천히 입꼬리를 올리자.

놈의 붉은 안광이 잘게 흔들거린다.

[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글쎄.”

나는 천천히 주먹을 들었다가 아바돈의 투구에 힘껏 주먹을 내질렀다.

콰자자자자작-

[크어어어억!]

투구에 주먹 모양이 뚜렷이 박힘과 동시에 아바돈은 뒤로 힘없이 나동그라진다.

[아무리… 내게 고통을 준다고 해도 나의 충성심은…….]

“그래. 네 충성심에는 눈물이 날 지경이야. 그러니 네 회복 능력과 충성심이 뛰어난지 내 힘이 뛰어난지 한번 시험해 보자고.”

[자, 잠깐…….]

몇 시간 뒤.

[그, 그만…….]

아바돈이 창조의 힘으로 만든 쇠꼬챙이밭을 구르며 괴로움을 호소했으나.

나는 놈을 심드렁하게 쳐다봤다.

“이제 충성을 맹세해야 할 존재가 누구인지 구분이 돼?”

[내가 섬기는 분은 오직… 베논 님뿐… 으허헉…….]

몇 시간째 쇠꼬챙이밭을 뒹군 탓일까.

아까보다 놈의 회복 속도가 더디어진 것 같다.

‘씁… 이만하면 슬슬 굴복해야 하는 것 아냐? 진짜 태생이 기사라 그런가 더럽게 질기네.’

아바돈이 좀처럼 복종할 생각을 않자.

나는 고민에 잠겼다.

‘아, 그냥 복종이고 자시고 소멸할까.’

곧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런 놈을 복종시켜야 더 의미가 있지. 거기다가 나중에 마계를 접수하게 되면 그땐 마계를 관리할 놈들도 필요하니까.’

하나 당장 놈이 내게 충성을 맹세할 것 같진 않았기에.

나는 놈에게 한 가지 제안을 제시했다.

“좋아. 네 충성심은 인정해. 그럼 이렇게 할까? 내가 베논을 꺾고 마계의 통치자로 등극한다면, 그땐 진심으로 내게 충성을 바쳐라.”

[네놈이… 베논 님을?]

사하하하하하하하-

내 제안이 그리도 재밌었던 걸까.

아바돈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광소를 터뜨린다.

[네놈 따위는… 결코 베논 님을 이길 수 없다. 네놈은 한 줌의 재도 남기지 못하고 소멸할 것이다.]

“아, 파멸의 기사라는 놈이 왜 이렇게 주둥이가 길어?”

[…크어어어억!]

나는 한차례 아바돈을 꼬챙이밭에 굴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베논을 내가 꺾으면 내게 진심으로 충성을 맹세할 거냐고.”

‘이번에도 거절하면 그냥 소멸해야겠어.’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마계의 주인이 바뀐다면 그땐 새로운 주인께 충성을 맹세하겠다.]

아바돈의 대답에 나는 픽 웃음을 흘렸다.

‘곧 죽어도 내게 충성하겠다는 소리는 안 하네. 뭐, 상관없어.’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좋아. 그럼 베논과 싸운 뒤 다시 널 찾아가지. 꺼져라.”

[…….]

아바돈이 몇 남지 않은 기사들을 데리고 물러나자.

“후우…….”

나는 힐끔 펠기누스를 보며 물었다.

“분명 아바돈은 강자만을 따른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기에 가장 먼저 아바돈을 굴복시키러 온 것이었건만.

[죄송해요……. 저도 놈이 그 정도로 베논을 섬기고 있는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이번 일로 적어도 아바돈이 랄프 님과 베논의 전투에 개입할 일은 없을 거예요.]

새로운 마계의 주인에게 충성하겠다는 말을 내뱉은 것만으로.

아바돈의 자존심을 건드린 것이므로 놈이 전투에 나설 일은 없다는 게 펠기누스의 의견이었으나, 내 생각은 달랐다.

‘세상만사가 어떻게 돌아갈지 어떻게 알아?’

“그건 모르는 일이지.”

나는 나지막이 한마디를 던지곤 고민에 잠겼다.

‘근데 이렇게 일일이 대악마들을 다 찾아가서 굴복시켜야 되나?’

펠기누스와 아바돈.

두 대악마를 제외하고도 남은 대악마의 숫자는 무려 열 놈이었다.

‘남은 열 놈을 다 찾아가는 건 너무 귀찮은데.’

더욱이 다른 대악마들도 아바돈처럼 격렬하게 저항할 터.

“다른 대악마들도 다 저렇게 저항할 것 같은데. 아니야?”

[아바돈만큼은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다분하긴 하죠.]

펠기누스가 부정하지 않자 나는 다시 생각했다.

‘열 놈을 다 굴복시키는 건 좀 그래.’

시간도 과다하게 소요될뿐더러.

그사이 베논이 무슨 개수작을 부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가만있자… 어차피 천계나 마계나 결국 두 신 놈들이 오랫동안 해 먹은 곳이잖아.’

그렇다면 내가 아무리 대악마들을 복종시켜도.

내게 앙심을 품고 반란을 꿈꾸는 놈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가 성립될 것이다.

‘그럼 차라리 이참에 한번 싹 정리하고 내 색깔을 새로 입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나는 송구스러워하는 펠기누스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이건 어떨 것 같아?”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나는 목걸이와 팔찌를 가리키며 계속 말했다.

“타이탄과 포세이돈은 인간계를 멸망시키려고 만들어진 병기잖아. 그렇지?”

[그렇죠.]

“근데 꼭 인간계만 멸망시키라는 법이 있나 싶어서.”

나의 말에 펠기누스의 얼굴에 물음표가 걸린다.

[…예? 그게 무슨…….]

“계속 대악마들을 찾아서 굴복시키는 것보단, 그냥 이 녀석들을 이용해서 마계를 멸망시키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나의 말에 펠기누스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겨우 입을 뗀다.

[그, 그렇다고 해도 베논이나 다른 고위급 악마들은 다 살아남을 거예요.]

“내가 원하는 게 바로 그거야.”

나는 손가락을 들어 펠기누스를 가리키며 눈을 찡긋거렸다.

“애당초 대악마들을 굴복시키려던 이유가 뭐야? 그 휘하에 있는 무수한 많은 악마들까지 내 편으로 만들려고 그런 거잖아? 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 그건…….]

머뭇거리는 펠기누스의 모습에도 나는 무심히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마계를 난장판으로 만들면 베논이 알아서 날 찾아오겠지. 왜 내가 굳이 놈을 찾으려고 했을까. 너무 단순하게 생각했어.”

[하지만 그렇게 되면 베논과는 관계가 없는 악마들까지 휩쓸리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데요.]

결정을 만류하는 듯한 펠기누스의 발언에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알 바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