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화
[아…….]
펠기누스는 그제야 이 상황이 이해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철커덩, 스스슥-
그사이 포세이돈을 옥죄고 있던 검은 사슬이 사라져 가자.
방주는 점차 하늘로 두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호오… 날 수도 있는 건가.’
내가 거대한 방주의 밑부분을 올려다보던 중.
[저 포세이돈이 위대하신 아가멤논 님의 후계자를 뵙습니다. 다시 세계를 초기화할 때가 온 것입니까?]
“…음?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세계의 멸망을 위해 절 깨우신 게 아닙니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잠꼬대를 하고 있어?’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너를 깨운 이유는 세계를 멸망하고자 함이 아니라 곧 다가올 전쟁을 위해서다.”
[전쟁 말입니까?]
“그래. 난 천계와 마계를 정복하고 신계의 질서를 재정립하려고 한다.”
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쏴아아아아-
포세이돈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던 거대한 포신에서 물줄기가 하늘 위로 쏘아져 올라갔다.
그리고 물줄기가 지면에 떨어지자.
철썩-
방금 있었던 전투로 꽤나 얕아졌던 호수의 수면이 금세 차올라 갔다.
‘이건……. 아무래도 물로 세계를 멸망시켰다는 게 정말이었던 모양이네.’
내가 차오르는 호수를 내려다보며 혀를 내두르던 중.
다시금 거대한 방주에서 음성이 흘러나온다.
[후계자님의 거룩하신 뜻에 따르겠습니다!]
‘좋네.’
이로써 타이탄과 포세이돈.
아가멤논이 소유했던 두 가지 유산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만하면 신들과 붙어도 손색없겠지?”
나의 물음에 펠기누스가 미소를 머금는다.
[물론이에요. 결코 신들을 얕봐선 안 되겠지만요.]
“아가멤논의 유산만 손에 넣으면 무조건 이길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
[지금도 우리의 승리를 확신해요. 다만, 놈들도 우리의 행보를 보고 대비책을 세웠을 테니 조심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었어요.]
계속 말을 이어 가는 펠기누스.
[그러니 당장 신들과 전면전을 치르기보단, 베논의 수족부터 잘라 내는 게 어떨까 싶어요.]
“수족이라면… 대악마들을 말하는 건가?”
[맞아요.]
그녀의 대답에 난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 왜 먼저 마계를 치자는 건데?”
[기본적으로 악마들은 자신들보다 강한 존재를 숭배해요. 그러니 대악마들을 굴복시킨다면 대악마는 물론이고 놈들이 통제하던 악마들도 우리 밑으로 들어올 거라고 봐요.]
‘흠… 악마들이 강자에게 철저히 복종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대악마들이 순순히 넘어올까?’
그래도 명색이 마계의 통치자들이 순순히 주인을 배신하고.
새 주인을 섬길지는 의문이었다.
“천계의 위계질서도 마계와 비슷한가?”
[대천사들이 휘하의 천사들을 통제하는 방식은 비슷하지만, 그 외에는 악마들과 차이가 있죠. 놈들은 맹목적으로 레바논만을 섬기거든요.]
“흠… 그래?”
‘그렇다면 펠기누스의 말대로 마계부터 공략하는 게 나을 것 같네.’
베논의 수족들을 잘라 낸 뒤.
그 뒤에 베논을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나아가 천계까지 공략하는 것이 좋을 터.
“그럼 마계부터 침공하는 걸로 할까. 근데 마계에 가는 방법은 있고?”
나의 물음에 펠기누스가 빙긋 웃는다.
[걱정 마세요. 제가 곧장 1계층까지 안내해 드릴 거니까요.]
“1계층? 아…….”
마계는 총 5개의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계층에는 베논과 대악마들을 비롯하여 고위급 악마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문헌에서 본 기억이 있다.
“그런데 원래는 5계층부터 시작해서 하나씩 올라가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원래는 그렇죠. 하지만 저도 한때는 대악마였어요. 1계층으로 가는 것 정도는 쉬운 일이에요.]
자신감 넘치는 그녀의 대답에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럼 며칠 정도는 정비를 하고 마계로 이동하자고.”
* * *
한편 같은 시각.
마계의 제1계층.
[…….]
수백 개의 무기들이 장식처럼 박혀 있는 의자 위.
그 위에서 한참을 사색 중이던 베논이 돌연 몸을 움찔거린다.
[이건……. 설마 반피르가 당한 건가.]
포세이돈에 걸었던 소멸의 힘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걸 봐선.
흑남이 반피르와의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봐야 할 터.
[위험을 감수하고 풀어 준 보람이 없군.]
그래도 놈이 한때 신계를 호령했던 신수였기에.
당연히 흑남을 작살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심연에서 풀어 준 것이건만.
[반피르가… 당했습니까?]
옆에 있던 아몬이 조심스럽게 물어 오자.
베논은 무심히 대답한다.
[더 이상 놈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다. 당했다고 봐야겠지.]
[…이제 어쩌실 계획이십니까?]
[고민 중이다.]
평소와 달리 베논의 말투에서 깊은 고뇌가 느껴진 탓일까.
그의 눈치를 살피던 아몬이 조심스럽게 권유한다.
[아무래도 놈의 성장세가 저희의 예상을 넘어선 것 같습니다. 내키시지 않으시겠지만… 지금이라도 레바논과 손을 잡고 놈을 소멸하는 건…….]
쾅-
베논의 대검이 아몬의 발치에 떨어지고.
그의 낮은 으르렁거림이 대전을 울린다.
[아몬, 아무리 네 녀석이라고 해도 헛소리를 지껄인다면 용서치 않겠다.]
[하지만 마신이시여,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놈을 막기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아몬의 간곡한 호소에도 베논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년은 언제든 날 배신할 수 있다. 하물며 그년이 흑남에게 천계를 바치고 목숨을 구걸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야.]
[그렇다고 해도…….]
[됐다. 도망갈 계획이나 구상하는 어리석은 년과 내가 손잡을 일은 없다.]
베논은 단호히 아몬의 제안을 묵살하곤.
그를 보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무기고에서 둠 이터를 꺼내 와라.]
[…예?!]
갑작스러운 명령에 크게 당황해하는 아몬.
[하나, 마신이시여! 그 검은…….]
[나는 반문을 허하지 않았다.]
베논이 뜻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이자.
아몬은 천천히 머리를 숙인다.
[마신님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계층을 통치하는 군주들을 모두 소집해라.]
[예.]
* * *
3일 뒤.
드넓은 평원 위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온다.
“준비가 끝나거든 바로 시작해.”
내가 펠기누스를 보며 고개를 까딱이자.
그녀가 한 가지 의문을 표한다.
[그런데 정령들과 정령신들은 오지 않는 건가요?]
“그래. 그들에게는 따로 부탁한 게 있어서 오지 않을 거야.”
[따로 부탁한 거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계속 말했다.
“혹시라도 천계에서 마계를 도우러 올 수도 있으니 그걸 최대한 훼방 놓으라고 했다.”
[아아, 현명하시네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어.”
나의 덤덤한 대답에 그녀가 빙긋 웃는다.
[그럼 이제 문을 열게요.]
새하얗고도 검은 펠기누스의 날개가 천천히 벌어지다가 한순간 양옆으로 크게 펼쳐지자.
쩌저저저저적-
우리의 앞에 커다란 균열이 생겨났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마계로 이동하게 될 거예요.]
‘후… 이제 시작인가.’
나는 목걸이와 팔찌가 된 타이탄과 포세이돈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균열을 보며 천천히 입을 뗐다.
“들어가자.”
나는 균열 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쩌저저저적-
이윽고 균열 밖으로 나오자.
‘으음…….’
짙은 어둠이 하늘에 깔려 있는 낯선 환경이 나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확실히 인간계랑은 느낌이 달라.’
어두운데도 주변이 제법 잘 보이는 것도 그렇거니와.
그 흔한 나무 한 그루조차 이곳에선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삭막하네.”
[그럴 수밖에요. 이곳은 아바돈이 통치하는 지역이거든요.]
‘아바돈이면…….’
파멸학파 흑마법사들이 섬기는 대악마로서.
오직 베논의 명령만을 따르는 비정한 기사라고 들었다.
‘악마가 기사라는 게 좀 우습긴 하지만 그의 외관을 본따 데스나이트를 만들었다고 하니.’
나는 옛 기억을 떠올렸다가 나지막이 입을 뗐다.
“아바돈은 삭막한 걸 좋아하는 모양이야?”
[그는 단조로우면서도 단순한 걸 좋아해요. 그래서 그의 통치 구역에선 뭘 짓거나 만드는 게 불가능하죠.]
“근데 그의 영역으로 온 이유가 있어?”
나의 물음에 그녀가 빙긋 웃어 보인다.
[그는 대악마들 중에서 가장 단순하거든요. 누구보다 힘의 논리를 따르는 악마기도 하고요. 그러니 가장 설득하기 쉬울 거라 생각했어요.]
‘단세포라 꺾기만 하면 우리 편이 된다, 이건가?’
내가 펠기누스의 선택을 납득하던 그때.
따각, 따각, 따각-
전방 저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저건…….’
검은 안개.
아니, 검은 아우라를 자욱이 흘려 대는 수백의 기사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생긴 건 진짜로 데스나이트를 닮았네. 아닌가, 저들을 모방해서 데스나이트를 만든 건가?’
내가 죽음의 기사들을 보며 생각을 이어 가던 중.
사아아아아-
유독 남달리 거대한 말을 타고 있던 기사의 입에서 음습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펠기누스.]
[오랜만이에요, 아바돈.]
[어째서… 베논 님을 배신한 거지? 베논 님께서는 누구보다… 네년을 총애하셨다…….]
죽음의 기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명백한 분노였으나.
펠기누스의 표정은 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애당초 내가 섬기는 존재는 오직 한 분뿐이었어요.]
[네년이 섬겼어야 할 존재는… 베논 님이다.]
[아니요. 내가 섬겨야 할 존재는 아가멤논 님뿐이에요. 그리고 당신 또한 그래야 할 거고요.]
펠기누스가 눈짓으로 나를 가리켜 보이자.
사하하하하하하-
죽음의 기사들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섬기던 군주를 배신하고도… 잘도 입을 놀리는군. 애당초 베논께서 네년 같은 배신자를… 받지 않도록 설득했어야 했다.]
[배신이 아니라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간 것뿐이죠.]
펠기누스의 대답에 더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판단한 걸까.
검은 아우라 뒤로 가리어져 있던 붉은 안광이 나를 주시한다.
[흑남… 다른 놈들은 몰라도 네놈만큼은 베논 님을 배신해선 안 됐다.]
“배신? 난 배신한 적이 없는데?”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애당초 내 목숨을 이용해서 재앙의 문을 열려고 했던 건 베논이야.”
[그분께서 원하셨다면 응당 그 목숨을 바쳐서라도… 명령에 따랐어야 했다.]
아바돈의 대답에 나는 어이가 없어 실소를 흘렸다.
“이야, 충신이네. 그런데 난 그 정도의 충성심은 없어서 말이야.”
[…어리석은 놈.]
아바돈의 빈정거림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보다, 계속 낡은 배에 타려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베논 말이야. 놈은 곧 침몰할 배나 마찬가진데 계속 놈을 따를 거냐고.”
일순간 붉은 안광에 분노가 차오르는 듯했으나.
나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 갔다.
“곧 침몰할 배에 타는 것보단 단단한 배로 갈아타는 게 맞지 않겠어?”
[지금 내게… 배신을 권유하는 건가.]
“그래. 배신이 뭐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냥 눈 한번 딱 감으면 되는 일이잖아? 안 그래?”
나는 입꼬리를 올린 채 아바돈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금이라도 베논을 저버리고 나를 섬겨라.”
[…….]
사하하하하하하하-
다시금 죽음의 기사들의 입에서 스산한 광소가 터져 나오더니.
[들을 가치가… 없군.]
스르릉-
아바돈을 필두로 검을 빼 들기 시작하는 죽음의 기사들.
이윽고 놈들의 붉은 안광이 번뜩이기 무섭게.
아바돈이 죽음의 고성을 내지른다.
[네놈들의 피로… 마계의 질서를 재정립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