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화
[…타이탄을 깨웠다고?]
[그래, 이 얼빠진 놈아!]
평소와 달리 잔뜩 흥분하여 소리치는 레바논과 달리.
베논은 무심히 의문을 표했다.
[그게 뭐지?]
[그게… 뭐냐고?]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으로 베논을 본 레바논이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예전에 아가멤논이 세계를 멸망시키기 위해 만든 병기야. 그걸 놈들이 깨워서 가져간 거고. 이제 이해가 돼?]
그러나 흥분한 레바논과 달리 베논은 덤덤히 말한다.
[그 사실을 왜 말하지 않았었지?]
[뭐가?]
[그만한 병기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 타이탄을 찾는 걸 최우선으로 했을 것이다.]
베논의 대답에 픽 실소하는 레바논.
[그야 나도 타이탄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으니까.]
[여전히 무능하군.]
[…뭐라고?]
레바논이 쌍심지를 치켜세웠으나.
베논은 아랑곳 않고 제 할 말을 이어 간다.
[그런데 그게 그리 흥분할 일인지 모르겠군. 놈들이 타이탄을 깨웠건 뭘 깨웠건 찾아내어 소멸하면 그만이다.]
[다 소멸한다고? 진짜 어이가 없네. 너, 타이탄이 얼마나 강력한 병기인지 모르나 본데, 어지간한 잡신은 농락할 정도로 강하다고.]
[우리는 그 어지간한 신들보다도 더 강하다.]
그에 레바논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아가멤논의 후계자와 타이탄, 이 둘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겠어? 난 어렵다고 보는데.]
[타이탄을 이쪽으로 회유할 수는 없나?]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타이탄은 아가멤논의 말밖에 따르지 않아.]
레바논의 말이 끝나자.
크게 당황한 건지 찌푸리고 있던 베논의 눈에 점점 경악감이 차오른다.
[잠깐, 그 말은……. 그럴 리가 없다. 펠기누스가 아가멤논의 후계자였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인데…….]
펠기누스가 아가멤논의 후계자가 아니라면.
정황상 유력한 후보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그런 거였나. 흑남을 잡아 오지 않고 도피를 시킨 것도 그놈이…….]
[뭐야. 이제 눈치챘어? 그 배신자년이 연거푸 배신한 이유가 뭐겠어? 딱 봐도 흑남이 아가멤논의 후계자니까 그런 거잖아.]
멍한 표정으로 한참을 서 있던 베논의 입가가 조금씩 꿈틀거리더니.
[크하하하하하하하하!]
이내 그의 입에서 광소가 터져 나온다.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군. 이건 정말… 생각도 못 했어. 크하하하하하하하!]
[이 얼간이 같은 놈이……. 웃을 일이 아니야. 우린 아가멤논의 후계자와 타이탄까지 상대해야 하는 거라고.]
[이미 벌어진 일이다. 이제껏 눈치 못 챈 우리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일인데 누굴 탓할까.]
껄껄 웃는 베논과 달리 레바논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다.
[어쩔 거야?]
[어쩌긴. 놈이 칼을 겨누거든 나가서 싸우면 될 뿐이다.]
[그렇게 간단히 이야기할 사안이 아니잖아!]
레바논의 역정에도 베논은 냉담하게 말한다.
[그럼 어쩌자는 거지? 전투 말고 우리에게 방법이 있나?]
그에 물끄러미 베논을 바라보던 레바논이 슬며시 손을 내민다.
[예전 일은 다 잊고 지금이라도 손을 잡는 건 어때? 너와 내가 힘을 합쳐야 그나마 승산이 있을걸?]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설령 내 목이 잘려 나간다고 하더라도 신뢰를 깬 네년과 손잡을 일은 없을 거다.]
베논이 낮게 으르렁거리자.
레바논은 손을 거두며 한숨을 내쉰다.
[협력이 불가능하다면 재앙의 문을 열고 도망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지.]
[싸워 보지도 않고 도망치자, 이 뜻인가?]
베논의 물음에 레바논은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재앙의 문을 타고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것도 엄연한 방법이야. 물론 매개체 없이 문을 열려면 우리의 존재에 지대한 타격이 오겠지만.]
[들을 가치도 없는 방법이군. 실행하려거든 네년 혼자 실행해라. 난 적을 놔두고 도망친 적이 없다.]
[그럼 이대로 두 손 놓고 있으려고?]
그럼에도 잠잠히 서 있던 베논의 눈에 돌연 빛이 들어찬다.
[아가멤논이 만든 병기를 이용하는 것도 괜찮겠군.]
[…그건 또 무슨 말이야? 타이탄을 이용하자고?]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한 레바논을 보며.
베논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아가멤논이 만든 병기가 타이탄뿐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타이탄만 있… 잠깐… 그럼 타이탄 말고도 병기가 또 있다고?]
[그래. 아가멤논이 세상을 멸할 때 사용했던 병기, 포세이돈 말이다.]
베논의 차분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레바논의 얼굴에 걸린 물음표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포세이돈의 존재를 몰랐던 건가? 우습군.]
한 방 먹였다는 듯 기분 좋은 미소를 짓는 베논.
[그러는 너도 타이탄의 존재조차 몰랐잖아? 비긴 셈으로 치고, 그 포세이돈이 뭘 어쨌다는 건데?]
[간단하다. 놈의 행적을 미루어 봤을 때, 놈은 분명 타이탄에 이어 포세이돈까지 회수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놈이 포세이돈을 회수하려 할 때 놈을 처치하는 거지.]
베논이 차분히 계획을 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레바논의 표정은 시큰둥했다.
[아, 그래? 근데 포세이돈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안다.]
[그래, 모르겠… 뭐?]
당황한 레바논을 보며 무심히 말하는 베논.
[포세이돈은 나의 수중에 있다.]
[그게 뭔……. 아니, 그 병기가 네 손에 있다고? 근데 왜…….]
[대륙 멸망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그걸 사용할 수 있는 건 아가멤논뿐이다.]
그제야 납득한 듯 레바논이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놈이 포세이돈을 회수하러 올 때 협력해서 놈을 치자 이거지? 상황은 대충 이해했어. 근데… 협력할 생각 없다며?]
[물론이다. 네년의 도움이 없어도 놈을 처리하는 것 정돈 쉬운 일이다.]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 보지?]
그에 베논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녀를 보며 말한다.
[심연에 잠들어 있는 군주를 깨울 것이다.]
[…뭐라고?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심연에 잠들어 있는 군주라 함은.
과거 아가멤논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던 괴물이잖은가?
[잘 생각해. 놈을 봉인하려고 우리가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잊었어?]
[희생 없인 결과도 없다. 아가멤논을 상대하려면 그 정도 괴물은 꺼내야 한다.]
[하… 그래, 네 말대로 그 괴물이 아가멤논의 후계자를 죽인다고 치자고. 그 뒤에는?]
레바논의 우려에 베논이 픽 웃는다.
[그 뒤의 일은 그때 생각하면 된다.]
[…….]
* * *
한편, 같은 시각.
인적조차 없는 한적한 평원.
[…….]
“음…….”
흑탑보다도 거대한 불의 거인을 보며 나는 고민에 잠겼다.
‘타이탄을 깨운 건 좋은데, 이거… 너무 눈에 띄는데?’
지금이야 바알의 힘을 사용해서 신들의 이목 차단했다고 해도.
사람들의 이목까지 가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곳에 방치해 둘 수도 없고.’
방치해 뒀다가 신들의 집중 공세에 타이탄이 소멸되는 일은 사절이었기에.
나는 거듭 고심하다가 입을 뗐다.
“타이탄, 지금보다 몸을 작게 만들 수는 없어?”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나의 군주시여.]
그 말을 끝으로 갑자기 거인의 몸이 점점 작아지더니.
스스슥-
이윽고 붉은 목걸이가 되어 바닥을 구르는 것 아닌가?
‘오오, 이게 되네?’
나는 기쁜 마음에 얼른 목걸이가 된 타이탄을 목에 걸었다.
그러던 중.
[이제 최소한의 준비는 한 것 같네요.]
펠기누스가 내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며 말을 걸어왔다.
“그래. 근데 정말 우리만으로 이길 수 있다고 보는 거야?”
[물론이죠. 다만, 좀 더 신중히 움직이고 싶으시다면 병기를 하나 더 깨우는 것도 좋다고 봐요.]
그에 나는 당황하여 그녀를 바라봤다.
“이런 병기가 또 있다고?”
[아가멤논 님께서 물로 세상을 쓸어버리셨다고 말했었잖아요? 그것까지 깨우는 거죠.]
“호오…….”
‘아가멤논이 직접 멸망시킨 게 아니라 그마저도 병기를 이용했던 건가?’
어쨌건 아군은 많을수록 좋았기에 나는 나지막이 물었다.
“그 병기는 어디에 있는데?”
[마지막으로 방주의 호수에서 종적을 감췄다고 들었어요.]
“방주의 호수? 그곳이라면…….”
나는 지도를 꺼내어 호수의 위치를 살폈다.
“검은 대지에 있는 호수잖아?”
[맞아요.]
“흠…….”
나는 깊이 생각에 잠겼다.
‘이미 흑마법사들 사이에 내가 베논을 저버렸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상관없겠지.’
“좋아. 바로 이동하지.”
* * *
2주 뒤.
나는 대륙을 벗어나 다시 검은 대지로 돌아왔다.
‘지도상으론 거의 다 온 것 같긴 한데. 이곳에서 잠깐 쉬었다가 갈까.’
나는 방주의 호수로 이동하던 중.
인근의 마을에 있는 작은 선술집으로 들어섰다.
“여기 마른 빵 두 덩이랑 고기 그리고 물을 줘.”
“예!”
그러곤 가벼운 식삿거리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사이.
“들었나? 흑마법사님들께서 레바논의 잡것들을 상대로 분투하시는 중이라더군.”
“난 그보다 마법사들이 걱정이야. 놈들이 레바논과 손을 잡았다고 하던데. 별일 없었으면 좋겠구만.”
“그러게 말이야. 전쟁이 빨리 끝나야 우리도 한숨 돌릴 텐데.”
선객들의 대화 소리가 넌지시 나의 귓가를 울려왔다.
“그것도 그렇지만 난 아직도 흑남님이 우리를 배신했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네.”
“것참… 아직도 근거 없는 소문을 믿는 건가?”
“하지만 대부분의 흑마법사님들이 동요하신 걸 봐선 정말일 수도 있지 않은가?!”
‘역시…….’
아무래도 베논이 나의 이탈 여부를 흑마법사들에게 알린 모양이었다.
‘뭐, 당연한 거지.’
내가 베논이었어도 똑같은 결정을 내렸을 터.
나는 조용히 덮고 있던 로브를 더 깊이 눌러썼다.
[많이 신경 쓰이시나요?]
나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펠기누스가 조심스레 물어 오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딱히. 어차피 두 신만 처리하면 다 해결될 문제야.”
[그건 그렇죠.]
‘그래. 그러면 해결될 일이야.’
* * *
우리는 이틀에 걸쳐 동쪽 방면으로 걸었고.
마침내 목적지인 방주의 호수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호수치곤 엄청나게 크네.”
나는 방주의 호수를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바다와 호수의 차이를 모르는 이가 이 광경을 봤다면.
분명 바다라고 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호수의 크기는 방대했다.
“이번에도 타이탄을 깨웠을 때처럼 하면 되는 거지?”
[맞아요. 그럼 포세이돈이 모습을 드러낼 거예요.]
펠기누스의 확답에 나는 주저 없이 호수로 몸을 날렸다.
첨벙-
나는 천천히 잠수해 들어가며 점점 호수의 밑바닥을 향해 내려갔다.
얼마나 밑으로 내려갔을까.
‘여기가 호수의 바닥인가.’
곧 땅에 나의 발이 닿자.
스스숙-
나는 전과 마찬가지로 아가멤논의 힘을 발현하기 시작했다.
웅웅웅웅웅웅웅-
이윽고 흐르는 물결 사이로 기이한 귀곡성 같은 소리가 들려온다.
‘이건… 병기가 깨어나는 소린가?’
하나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계속 아가멤논의 힘을 호수로 흩뿌려 나갔다.
그러던 그때.
번쩍-
노란 달덩이 두 개가 돌연 모습을 보이는 것 아닌가?
‘저게 병기라고? 이상하네, 분명 펠기누스한테 들은 바로는…….’
쿠르르르르르릉-
그러나 갑자기 발밑에서 피어오른 거대한 회오리로 인해.
나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 가지 못했다.
‘이건…….’
삽시간에 나의 몸이 회오리를 타고 올라가 수면 밖으로 튕겨져 나가기 무섭게.
돌연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가 빛을 발한다.
철썩-
회오리를 타고 내가 공중으로 치솟던 그때.
[반피르! 아버지의 원수!]
어느덧 제 모습을 갖춘 타이탄이 고성을 지르며 수면을 향해 주먹을 내지른다.
콰아아아아아아앙-
그러자 천지가 찢어질 것 같은 굉음이 호수 일대를 울림과 동시에.
[제 주인 하나 못 지킨 놈이 아직도 살아 있었을 줄이야.]
타이탄에 버금가는, 아니.
그보다 거대한 생명체가 수면을 찢고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