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화
“…도망을 가라고? 무슨 의미지?”
[말 그대로예요. 기회를 줄 때 도망쳐요.]
그러나 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날 죽이러 온 게 아니었나?”
[차라리 그 편이 제게 나을 수 있겠지만… 바알의 힘이 있다면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지 않겠어요?]
‘영문 모를 소리만 하고 있어, 답답하게시리…….’
도대체 펠기누스가 왜 태도를 바꾼 건지.
나는 답답한 마음에 그녀에게 말했다.
“어차피 우리의 목소리는 신들에게 닿지 않아. 그러니 네가 그러는 이유를 말해.”
[…….]
그에 잠시간 머뭇거리던 펠기누스가 깊은 한숨을 토해 낸다.
[베논이 당신의 목숨을 이용해서 재앙의 문을 열려고 해요. 그래서 전 베논의 명령을 받고 당신을 데리러 왔죠.]
“그런데 왜 내게 도주를 권유하는 거지?”
[후우… 원래는 당신을 죽일 생각이었어요.]
그녀의 고백에 나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베논의 명령을 어기고 날 죽이려 했다고?’
그렇다는 말인즉.
나를 죽여 베논이 재앙의 문을 열지 못하게 하려 했다는 것 아닌가?
“베논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날 죽이려고 했던 이유가 뭐지?”
[…아가멤논 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이 망가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죠.]
‘잠깐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왜 갑자기 그녀의 입에서 아가멤논의 이름이 나온단 말인가?
“아가멤논… 이라고?”
[그래요. 당신은 모르겠지만 과거에는 신들의 신이신 아가멤논 님께서 세상의 모든 것들을 통치하셨죠. 전 그분을 따르던 대천사였고요.]
‘…뭐라고?’
그녀의 말에 난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아니, 잠깐… 그럼 원래 펠기누스가 아가멤논의 수하였다는 건가?’
그렇다면 그녀는 어째서 레바논을 따랐다가.
또 지금은 베논을 섬기고 있는 걸까?
[전 이제껏 그들을 따르며 아가멤논 님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있었어요. 혹시라도 그분을 되살릴 수 있는 작은 단서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말이죠.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죠.]
입술을 꽉 다문 그녀의 얼굴에 슬픔이 번져 갔다가.
작은 희망이 물결친다.
[하지만 최근에 저는 작은 가능성을 봤어요. 그분의 후계자가 어딘가에 있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
“후계자라……. 그럼 두 신이 눈을 부릅뜨고 후계자를 찾으려 하겠군.”
[그랬죠. 하지만 베논은 그보다 쉬운 길을 택했죠.]
‘쉬운 길이라면… 내 목숨을 이용해 재앙의 문을 여는 걸 말하는 건가.’
나는 차분히 상황을 정리해 나가며 고민했다.
‘그래. 어느 정도 상황은 납득이 가.’
베논이 재앙의 문을 열고자 하는 것도.
펠기누스가 날 찾아온 것도 말이다.
‘납득이 가긴 하는데…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인 거고 거짓인 건지 모르겠네.’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네요. 이해해요. 저도 이런 말을 들었다면 의심부터 했을 거니까요.]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 가는 펠기누스.
[더 자세히 이야기를 해 주고 싶지만 그럼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겠죠. 대화는 이쯤에서 마무리하기로 하고, 당신은 얼른 도망치도록 해요.]
“내가 도망치면? 너는 어떻게 되는 건데?”
나의 물음에 펠기누스가 힘없이 웃는다.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요? 그래도 명색이 대악마이니 베논도 쉽게 절 내치지는 않겠죠.]
‘흠…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단 말이지.’
구태여 그녀가 위험을 감수하며 나를 도망치게 하려는 것도 그렇거니와.
정황상 펠기누스가 내게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어 보였다.
‘좋아. 그렇다면…….’
“아가멤논의 힘이라면 이런 걸 말하는 건가?”
화아아악-
내가 한쪽 손에는 파멸의 힘을, 다른 손에는 창조의 힘을 발현하자.
[잠깐… 어떻게 당신이 그 힘을…….]
펠기누스는 경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야 내가 네가 찾던 아가멤논의 후계자니까.”
[…뭐라고요? 어떻게 그게…….]
“설명하려면 며칠은 걸릴 테니까 우연과 우연이 맞물렸다 정도로 치부하자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이제껏 두 신의 이목을 아… 바알…….]
혼자 질문하고 결론을 내는 그녀를 보며.
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바알의 힘 덕에 이제껏 잘 숨어 살 수 있었지. 그것도 슬슬 한계가 온 것 같지만.”
[…그렇군요.]
마침내 생각의 정리가 끝난 걸까.
펠기누스는 아까보다 진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당신을 도망치게 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네요.]
“도망이라……. 너와 내가 힘을 합쳐도 두 신을 상대하기 버겁나?”
[물론이죠. 상대해야 할 건 두 신만이 아니라 대천사와 대악마들 그리고 천계와 마계의 군세들까지니까요.]
‘그건 그렇지.’
펠기누스의 말대로 두 신도 문제긴 했으나.
무엇보다 천계와 마계의 병력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들 중에서 너와 비슷한 사상을 가진 친구들은 없고?”
혹시나 펠기누스처럼 여전히 아가멤논을 추종하는 세력이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있긴 해요.]
“호오… 그래? 누구지.”
[하지만 천계와 마계에 소속된 자들은 아니에요.]
‘천계나 마계 소속이 아니라고? 그럼 남은 건 지상계나 다른 신들 정도밖에 없을 텐데?’
그에 나는 의문을 표했다.
“인간들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 알고 지내던 신들이 있는 건가?”
[아니요. 제가 말한 세력은 인간도, 신도 아니에요.]
“그럼 누구지?”
그에 펠기누스가 단호히 대답한다.
[아가멤논 님의 옛 부하들이요.]
“…옛 부하? 아가멤논과 관련된 자들은 다 소멸한 게 아니었어?”
나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들은 불멸의 땅에 잠들어 있어요. 오직 오늘 같은 날만을 기다리면서 말이죠.]
“호오… 근데 불멸의 땅은 어디에 있는 거지?”
그에 펠기누스가 눈을 번뜩인다.
[대륙 최남단에요. 그들을 깨운다면 분명 당신에게 큰 도움이 될…….]
쩌저저저저적-
그러던 그때.
갑자기 그들을 가리고 있던 검은 장막에 커다란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두 신이 나선 모양이네요.]
나를 보며 황급히 말을 이어 가는 펠기누스.
[불멸의 땅으로 가세요. 그리고 그들을 깨우세요.]
“너도 함께 가야지.”
그러나 그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 당신이 할 일을 하세요.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테니까요.]
“그건…….”
[당신을… 아가멤논 님의 후계자를 뵐 수 있어서 기뻤어요.]
그 말을 끝으로 펠기누스가 두 팔을 좌우로 벌리자.
쩌저저저적-
내 발밑으로 커다란 균열이 생겨났다.
‘이런…….’
내가 균열의 존재를 인지했을 때는.
이미 내 몸이 균열 속으로 들어간 뒤였다.
“펠기…….”
* * *
[꼭 살아남아 아가멤논 님의 복수를 해 줘요. 반드시…….]
펠기누스가 균열이 있었던 자리를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그때.
파창-
박살 난 검은 장막 사이로 검은 기둥과 새하얀 기둥이 동시에 떨어져 내린다.
[…….]
잠시간 말없이 주변을 살피는 베논과 레바논.
[펠기누스, 흑남은 어디로 갔지?]
이윽고 베논이 차가운 목소리로 묻자.
펠기누스는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죄송합니다. 놓쳤습니다.]
[놓쳤다고? 네가?]
어이가 없었는지 실소를 흘리는 베논.
[놈이 바알의 힘을 갖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충분히 놈을 붙잡아 놓을 수 있었을 텐데.]
[…….]
펠기누스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자.
[설마… 그깟 정 때문에 놈을 놓아준 건 아니겠지?]
베논의 얼굴에 한기가 서려 간다.
[어머, 이미 두 번 배신한 년이 세 번은 못 할까?]
옆에 있던 레바논이 넌지시 추임새를 넣자.
베논이 죽일 듯 그녀를 노려본다.
[네년은 닥치고 있어라.]
[부하 간수도 못하는 놈이 어디 주둥이를 놀리고 있어?]
협력 관계가 완전히 박살 난 탓일까.
두 신은 한참이나 서로를 노려보다가 동시에 펠기누스를 바라본다.
[그냥 솔직하게 얘기해. 네게 배신은 쉬운 일이잖니?]
[어머니…….]
[어머니? 아직도 날 그렇게 부르다니, 우습네. 널 창조한 아가멤논에게 가서 그렇게 부르지 그래? 아 참, 이제 아가멤논은 없지?]
레바논의 빈정거림에 베논이 몸을 움찔거린다.
[펠기누스를… 아가멤논이 창조했다고?]
[어머, 아직도 내가 펠기누스를 창조했다고 생각했어? 무식하기도 해라.]
그에 베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저년의 말이… 사실이냐, 펠기누스.]
[…….]
[사실이냐고 묻고 있다. 대답해라!]
베논의 역정에도 펠기누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푸하하하하하하하하!]
베논의 입에서 광소가 터져 나왔다.
[그런 거였나. 그런 거였군.]
[…제가 아가멤논의 손에 빚어진 건 사실이지만, 베논 님을 배신하려는 의도는…….]
[닥쳐라, 그 주둥이를 찢어 버리기 전에.]
입을 꾹 다문 펠기누스와 달리.
레바논은 그저 이 상황이 즐거웠는지 빙글빙글 웃으며 베논을 응시한다.
[배신자는 처단해야지. 그게 네가 세운 규율이잖아? 당장 저년의 목을 쳐.]
[…….]
그러나 레바논의 자극에도 베논은 대검을 빼 들지 않았다.
아니, 빼 들 수 없었다.
만에 하나 펠기누스와 레바논이 동시에 그를 공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 혹시 내가 옆에서 있어서 그런가? 원한다면 난 물러나 있을 게.]
옆에서 레바논이 빈정거림을 이어 갔으나.
베논은 가볍게 그녀의 말을 무시하곤 펠기누스를 노려봤다.
[펠기누스, 네년은 내가 내린 명령을 완수하지 못했다. 따라서 네년은 더 이상 대악마도 무엇도 아니다. 앞으로 네년을 보게 된다면 그땐 주저 없이 네년의 목을 칠 것이다.]
[…….]
쩌저저저적-
그 말을 끝으로 베논이 균열 속으로 자취를 감추자.
[칫…….]
레바논은 뭔가 아쉬웠는지 나지막이 혀를 차곤 펠기누스를 응시했다.
[흑남이 바알의 힘을 쓰는 것도 그렇고, 참 기묘한 하루야. 그렇지?]
[그건…….]
[마계에서도 쫓겨났으니 이제 어디로 가려고? 갈 곳이 있긴 한가?]
그에 그녀가 입을 떼려던 찰나.
싱글싱글 웃던 레바논이 정색하며 말한다.
[내 눈앞에서 꺼져, 더러운 배신자 년.]
[…….]
스슥-
머뭇거리던 펠기누스 또한 삽시간에 자리에서 사라지자.
[하아… 그냥 계속 구경이나 할걸, 의도치 않게 배신자 년을 살려 줘 버렸네.]
레바논은 짜증스럽게 한마디를 내뱉으며 검은 뚜껑이 있었던 하늘을 응시한다.
[그보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을 어디서 찾아야 하나.]
* * *
한편, 같은 시각.
“적들을 척살해라!”
“더러운 흑마법사들을 대륙에서 몰아내야 한다!”
“더 이상 대륙의 주인은 레바논이 아니다! 대륙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보여 줘라!”
노란 평원 위로 격렬한 고함 소리가 울리고.
그어어어어어-
거대한 충격음이 연신 대지를 뒤흔든다.
“죽어라!”
“으아아아아아!”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열한 전투 속에서 피어오른 짙은 피 냄새가.
흑마법사 수뇌부들이 자리하고 있던 막사 안까지 흘러들어 온다.
“전황은?”
“놈들도 사력을 다하여 우리의 진군을 저지하고 있는 터라 팽팽한 상황입니다.”
악마 병단장의 보고에 레논 부탑주는 이맛살을 찌푸린다.
“후… 확실히 레바논은 다르군. 쉽지가 않아.”
놈들과의 싸움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곳곳에서 다수의 피해 보고가 올라왔다.
“역시 최대 강적들인 것 같습니다.”
“다른 것보다도 우리의 피조물들이 성마법에 취약한 점도 큰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 군세의 기세가 강렬하니 계속 두들기다 보면 결국 놈들은 무너지겠지요.”
간부들의 대답에 레논 부탑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모든 하수인들은 들어라. 나는 너희의 마신, 베논이다.]
막사 안에 있던 모든 흑마법사들의 머릿속에 베논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이, 이건……. 방금 들으셨습니까?”
“베논께서…….”
“혹시 전황을 유리하게 끌고 갈 방법을 알려 주러 오신 건 아닐까요?”
황급히 입을 다문 흑마법사들.
그들은 귀를 바짝 세우고 베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흑남이 나를 배신했다.]
“…뭣?”
“그게 무슨…….”
베논의 목소리에 간부들이 눈에 띄게 당황하는 가운데.
마신의 음성이 계속 들려온다.
[놈은 더 이상 나의 신자도, 충실한 종도 아니다. 흑남을 보거든 반드시 그를 죽여라. 알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