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연합군을 떠나겠다라……. 마이브,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요.”
백탑주 겔런이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하자.
덤덤히 말을 이어 가는 마이브.
“얼마 전에 보고가 들어왔어요. 죽었던 세계수가 다시 되살아났다고 말이죠.”
“…….”
“그래서 우리 드루이드들은 이 전쟁을 더 이어 갈 명분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어요.”
너무도 무덤덤한 그녀의 모습 때문일까.
겔런은 불쾌감을 드러내며 입을 뗀다.
“명분이 없다니… 허허… 대륙의 운명이 걸린 이 전쟁에서 지금 드루이드들만 꼬리를 말고 도망가겠다는 거요?”
“도망이라니요? 말은 똑바로 하시죠. 당신들이 페이트에 메테오를 떨어뜨리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우리는 명분을 잃었어요. 그런데 명분도 없는 전쟁을 지속할 이유가 있나요?”
마이브 또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출하자.
겔런이 비웃듯 대답한다.
“명분이 없다니요? 대륙을 침공한 흑마법사들을 몰아내는 게 명분이 아니라면 뭐가 명분이라는 건지 모르겠군요.”
그에 씁쓸히 백탑주를 응시하는 마이브.
“아, 그래서 무고한 페이트의 국민들을 죽이려고 한 건가요? 메테오가 사라져서 망정이지, 수천, 아니! 수만의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뻔했어요!”
“…무고? 푸하하핳! 도대체 뭐가 무고하다는 건지 모르겠군. 이보게, 마이브. 저들은 흑마법사와 결탁한 악마의 종자들이네. 그런데 어떻게 저들이 무고하다고 할 수 있는 거지? 그것이 드루이드들의 사고방식이라고 한다면 참 안일한 생각이라 말해 주고 싶군.”
겔런 백탑주가 빈정거리듯 말하며 그녀를 도발했으나.
마이브의 표정은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당신이 뭐라고 하건 우리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어요. 드루이드 그리고 엔트들은 이 시간 이후로 전장에서 떠날 겁니다.”
“참으로 안일한 결정이군. 분명 언제고 자네는 이 결정을 후회하게 될 걸세.”
“아니요. 오히려 이날을 떠올리며 잘했다고 생각하겠죠. 적어도 내 눈에는 당신이나 흑마법사들이나 다를 바가 없어 보이니까요.”
그 말을 끝으로 마이브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를 떠나자.
휘하의 드루이드들 또한 황급히 그녀의 뒤를 쫓는다.
“겔런 님, 저들을 이대로 보내실 겁니까? 저들이 전선에서 이탈한다면 우리의 힘도 크게 약화될 텐데요…….”
“흥, 애당초 큰 도움도 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멍청한 년.”
“하지만 우리와 도미닉의 병사들만으로 전쟁을 지속할 수 있을지…….”
부탑주가 우려를 표하자.
겔런은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골렘 공방에서 남은 골렘들을 모두 데리고 와라.”
“페이트를 계속 침공하는 겁니까?”
부탑주의 물음에 고개를 젓는 겔런.
“골렘들이 도착하는 데로 우리는 레바논으로 향한다. 레바논과 힘을 합쳐 흑마법사들을 완전히 몰아내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겔런은 지그시 지도에 있는 비취 숲을 노려보며 중얼거린다.
“그 뒤에는 가식적인 놈들도 이 대륙에서 치워 버려야겠어.”
* * *
한편, 같은 시각.
마계.
[음…….]
세상을 오시하던 베논의 입에서 작은 침음이 흘러나오자.
[걱정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옆에 있던 아몬이 우려를 표한다.
[분명 비취 숲에서 아가멤논의 힘을 느꼈다. 하나 놈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군.]
그저 보이는 것이라곤 후계자가 살린 세계수와 축제를 벌이는 드루이드들뿐.
그 어디에서도 아가멤논의 후계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다시 세계수를 없애는 건 어떻겠습니까?]
[지금 내게 개입을 요구하는 것이냐.]
[아… 저는 그게 아니고…….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부디 아량을…….]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아몬을 보며.
베논은 무심히 대꾸한다.
[이미 레바논과의 관계가 틀어진 이상, 필요 이상의 개입은 자제하는 편이 낫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하나 후계자가 다른 곳으로 도망치기 전에 페이트와 드루이드들은 몰살해야 한다고 봅니다.]
[네 말이 옳다. 그러나 레바논 그년이 어떻게 움직일지 알 수 없으니 나도 섣불리 행동하기가 어렵군.]
그에 아몬이 눈을 번뜩인다.
[베논 님의 충실한 종인 흑남에게 명령을 내리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에 다시금 지상을 응시하는 베논.
“악마들을 한 놈도 남김없이 모두 죽여라!”
“레바논 님의 이름으로 돌격!”
“어리석은 놈들에게 대륙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깨닫게 해 줘라! 데스나이트들을 전진시켜라!”
콰과과과과광-
군세와 군세의 격돌.
그리고 성마법과 흑마법의 발현으로 이미 아수라장이 된 전장을 보던 베논이 슬며시 시선을 거둔다.
[지금 하수인들은 내가 내렸던 명령을 수행 중에 있다. 지금 저들을 움직이기엔 어려워 보이는군.]
[으음…….]
아몬의 두 눈동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타오르던 불길이 일순간 위로 치솟는다.
[아니면 이러한 방법은 어떠십니까. 하수인들을 잃는 손해를 감수하시더라도 재앙의 문을 열어 버리는 방법입니다.]
[계속해라.]
[하수인들이 대륙을 멸망시키려면 지금껏 소모한 시간 그 이상의 시간이 소모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찰나의 시간이겠으나, 그사이 아가멤논의 후계자도 더욱 성장하겠지요. 그러니 차라리 약간의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재앙의 문을 여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몬의 말은 굉장히 타당했다.
특히 아가멤논의 후계자가 어디까지 성장할지도 모르는 판국이니 시간을 끄는 것도 좋지 않은 선택일 터.
[확실히 하수인들의 진군 속도가 나의 예상보다 느리긴 하다. 음… 모든 것을 취할 수는 없겠지.]
마침내 마음의 결정을 한 것일까.
베논이 아몬을 보며 선포한다.
[좋다. 재앙의 문을 열겠다.]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다만…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이 있다면, 흑남이 고분히 명령에 따를지 모르겠습니다.]
아몬이 조심스레 걱정의 뜻을 내비치자.
베논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간다.
[녀석이 나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을 거라 보나?]
[그럴 일은 없겠으나, 인간의 속은 알 도리가 없는 탓에…….]
[펠기누스.]
베논의 나지막한 울림이 공간을 울리자.
쩌저적-
곧 열두 장의 날개를 가진 타천사가 균열 속에서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절 찾으셨나요, 마신이시여.]
[가서 흑남을 데리고 재앙의 문으로 가라. 만약 녀석이 거부한다면 팔다리는 없어도 되니, 목숨만 붙어 있는 채로 데리고 가도 좋다.]
[…….]
베논의 명령에 펠기누스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해 갔다.
[목숨만… 붙어 있는 채로 말인가요?]
[그래. 왜 그러지? 잠시간 녀석과 계약했다고 그사이에 정이라도 든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펠기누스는 굳어 있던 표정을 풀곤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마신님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 * *
3일 뒤.
돌연 연합군이 물러난 덕인지.
페이트의 왕성은 축제 분위기였다.
“허 참…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이라니요? 주신께서 저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신 것이지요!”
“으허허허허, 참으로 은혜로운 날입니다!”
귀족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면면에 미소를 짓고 있었고.
여왕 또한 오늘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인자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 그 모든 게 나의 덕분이지. 더 찬양해라. 찬양해.’
나는 그런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제 페이트에서의 일은 얼추 마무리가 된 건가.’
메테오도 소멸했고 연합군도 물러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페이트의 국교를 주신교로 정하게까지 했으니 이제 페이트에서 할 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나중에 페이트가 주신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흑마법사들이 탄압을 할 수도 있긴 하겠지만… 그건 내가 어떻게 최대한 대비를 하면 되겠지.’
내가 속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던 그때.
[흑남이여, 나의 하수인들이 레바논에서 접전을 벌이고 있는데 넌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돌연 베논의 목소리가 나의 머릿속을 울려왔다.
‘음… 아가멤논의 후계자에 대한 건 때문인가? 슬슬 뭔가 신들에게서 반응이 올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좀 늦은 감이 있네.’
[저는 이곳에 남아 베논 님의 하수인들이 될 인간들을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그깟 하수인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럼 뭐가 중요한데?’
신도를 늘리는 건 신에게 있어 굉장히 중요한 일이건만.
그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니?
[너는 지금 당장 대륙의 최북단으로 이동하도록 해라.]
[…예?]
‘갑자기 최북단으로 가라고?’
그곳은 사람이 살기 어려울 정도로 추워 어떠한 왕국도 있지 않건만.
‘거긴… 가만, 그곳은…….’
심지어 최북단에는 재앙의 문이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왜 갑자기 나보고 그곳으로 가라는 거지? 설마 이 새끼가…….’
흑마법사들로 대륙을 멸망시키는 것을 포기하고 재앙의 문을 열기로 결정한 걸까.
하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입을 열었다.
[하나 마신이시여, 그곳에는 점령할 왕국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 명령에 의문을 갖지 마라. 너는 그저 나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면 될 뿐이다. 최북단으로 가라.]
그 말을 끝으로 베논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고.
나는 얼굴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이 미친놈이 진짜 재앙의 문을 열려고 하나 보네. 설마 내가 메테오를 없애고 세계수를 재탄생시켜서 그런가?’
아무래도 그 일들로 인해 어느 정도 아가멤논 후계자에 대해 인지했을 것이고.
그에 두려움을 느껴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 같았다.
‘씁… 예상했던 것 중에서 가장 골치 아픈 길로 흘러가네.’
설마 베논이 내가 생각한 가장 최악의 수를 택해 버릴 줄이야.
나는 거듭 고민했다.
‘어떻게 해야 되나……. 슬슬 두 신과 손절 각을 봐야 하나.’
이제 신도들의 수도 어느 정도 확보했고, 오리하르콘으로 힘도 충분히 증강했다.
‘이만하면 이제 두 신과 맞붙어 봐도 되지 않을까? 거기다가 놈들은 개입까지 해서 힘도 약화됐잖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피식 실소를 흘렸다.
‘응, 안 가.’
* * *
내가 특단의 결정을 한 지 어느덧 3일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페이트 왕성에 체류하며 그들과 함께 축제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그래도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겠지.’
별관으로 돌아온 나는 의자에 앉아 멍하니 생각했다.
‘내가 계속 명령을 거부하면 베논 쪽에서도 뭔가 대책을 마련할 테니까. 아마도 그 대책은…….’
쩌저저적-
갑자기 방 안의 한쪽에 균열이 생기더니.
백색과 흑색이 섞인 날개를 가진 타천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펠기누스…….”
[오랜만이네요.]
갑자기 튀어나온 펠기누스를 보며 난 눈살을 찌푸렸다.
“널 부른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스스슥-
그에 펠기누스는 커다란 창을 꺼내어 들곤 씁쓸히 나를 바라본다.
[당신을 데려가려고 왔어요.]
“나를 데리러 왔다? 분명 넌 나와 계약을 했을 텐데. 내게 무기를 겨누는 건 엄연한 계약 위반이야.”
[애당초 대가가 없는 계약이었잖아요? 지불할 대가가 없으니 계약을 종료해도 돌려줘야 할 게 없는 거죠.]
‘음… 설마 펠기누스에게 명령을 내렸을 줄이야.’
아무래도 내가 베논의 명령을 듣지 않아.
나를 잡으러 펠기누스를 보낸 모양이었다.
나는 지팡이를 꺼내어 들며 그녀에게 말했다.
“꼭 이렇게 해야겠어?”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쯧. 펠기누스를 상대하려면 힘깨나 소모해야 할 텐데. 좋지 않네.’
분명 이 상황을 두 신이 주시하고 있을 것이고.
내가 힘을 과다하게 소모한다면 아가멤논의 후계자라는 게 까발려질 수도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언제고 맞닥뜨려야 하는 상황이다.
다만 그 언제가 오늘일 뿐.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수를 쓰는 수밖에.’
내가 손을 하늘로 뻗어 바알의 힘을 구현하자.
사사사사사삭-
별관 주변으로 검은 장막이 덮여 가기 시작했다.
[이건… 바알의 힘을 어째서 당신이…….]
“뭐 그리 궁금한 게 많아? 덤벼.”
나는 펠기누스를 향해 손을 까딱여 보였다.
[…….]
그러나 어째선지 나의 도발에도 그녀는 가만히 검은 장막을 바라보다가.
돌연 창을 거두어들인다.
‘…뭘 하려는 거지?’
어째선지 그녀에게서 뚜렷한 적의가 느껴지지 않자.
괜히 머릿속이 복잡해져 갔다.
‘내 방심을 유도하는 건가?’
[바알의 힘이 있다면 신들의 이목을 피해 살아갈 수 있겠네요.]
“…뭐?”
나의 반문에도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보이며 입을 뗐다.
[어디로든 도망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