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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65화 (165/200)

◈ 165화

하나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럴 가능성이 낮아 보이기도 했다.

‘신들이 머저리도 아니고 설마 그걸 모를까? 아마도 아가멤논만이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특성 같은 거라 다른 신들은 사용하지 못하는 방법일 수도 있긴 한데…….’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두 신이 오리하르콘을 없애지 않았는지도 의문이었다.

‘흠… 아가멤논이랑 오리하르콘이 연관되어 있는 걸 모르지 않고서야, 없애지 않을 이유가 있나? 뭐, 어쨌건 신들이 모르면 나한테는 좋은 일이니까.’

나는 어떻게 해야 이 정보를 유의미하게 사용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두 신의 힘을 동시에 반감시킬 수 있을 만한 방법이 있으면 좋을 텐데.’

선뜻 그런 방법이 잘 떠오르질 않는다.

‘아니면 반감이 아니라 내 세력을 늘릴 만한 방법이라도… 가만…….’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내 뇌리를 훑고 갔다.

‘어쩌면 내 창조의 힘으로 세계수를 복구할 수도 있는 것 아냐?’

적의 적은 동료라고 했다.

만약 내가 레바논이 부쉈던 세계수를 복구한다면 정령들과 드루이드들도.

그 위에 자리하고 있는 정령신들 또한 나의 편으로 돌아설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설령 개입을 해서 몸에 균열이 생긴다고 해도 오리하르콘으로 회복하면 그만이고. 이거… 해 볼 가치가 있겠는데?’

* * *

다음 날.

나는 몰래 왕성을 떠나 드루이들의 거처인 비취 숲으로 이동했다.

‘경계가 제법 삼엄하네.’

세계수를 잃은 탓인지.

드루이드들의 경계는 그 어떤 왕성보다도 철저했다.

‘하지만 이 정도 경계야 우습지.’

그러나 이미 준신의 경지에 올라 있던 내게는 큰 영향이 없었다.

“…….”

소멸의 힘으로 나의 기척을 완전히 차단한 덕일까.

그 어떤 드루이드도 나를 의식하지 못했다.

‘어디… 세계수가 있었던 자리가……. 지도상으로는 분명 이 근처 어디쯤인데.’

나는 지도를 한번 내려다보곤.

다시 고개를 들어 드루이드의 마을을 쓱 훑었다.

‘이상하네. 여기가 아닌… 가만…….’

그러던 그때.

나는 거대한 나무 밑동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봤다.

‘설마 저건가?’

주변의 다른 나무와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크기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나무 밑동 주변으로 누군가를 추모하는 것처럼 꽃들이 한가득했다.

‘아무래도 저게 세계수였던 건가 보네.’

나는 천천히 밑동 앞으로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이야… 아주 그냥 깔끔하게도 잘라 놨네.’

내가 맨들맨들한 밑동을 보며 혀를 차던 그때.

스스슥-

나의 피부에 무언가 이질적인 감촉이 느껴져 왔다.

‘이 느낌은 정령인가? 주변에 정령은 없는 것 같은데……. 뭐, 상관없겠지.’

주변에 정령이 있건 없건 나는 나의 일을 하면 될 뿐이다.

나는 손바닥을 비비곤 나무 밑동을 응시했다.

‘좋아. 시작해 볼까.’

내가 두 손을 들어 밑동을 향해 창조의 힘을 발현하자.

웅웅웅-

새하얗고도 강대한 기운이 내 손을 떠나 밑동에 스며들어 갔다.

하나 몇 분이 지나도 밑동에서는 별 반응이 없었다.

‘씁… 잘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그래도 이미 저지른 일이니 끝장은 봐야 할 터.

‘흐으으읍!’

나는 다시 최대한 힘을 끌어내어 밑동에 퍼부었다.

하나 그럼에도 잘린 세계수에선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씁… 안 되는 건가. 이론상으로는 무조건 가능할 거라 봤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

내가 아쉬움에 속으로 혀를 차던 그때.

쿠구구구궁-

갑자기 발에 떨림이 느껴질 정도로 지면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건…….’

하나 당혹감도 잠시뿐.

콰드드드득-

밑동에서 사람만 한 줄기가 피어오르더니.

실시간으로 급속도로 성장해 나갔다.

화아아악-

이윽고 밑동만이 있던 자리에 거대하고도 푸르른 나무가 들어서자.

‘워…….’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인데, 확실히 엄청나긴 하네.’

왜 세계수가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나무라는 소문이 돌았는지.

난 이제야 납득할 수 있었다.

스스스스슥-

‘음…….’

그 와중, 개입의 여파로 몸 곳곳에 균열들이 생겨나자.

나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메테오에 개입했을 때보다 균열이 더 많이 생겼네. 세계수를 살린 게 메테오를 없앤 것보다 더 큰 개입이라는 건가.’

내가 균열을 보며 생각하던 중.

[까르르르르륵.]

어디선가 아이의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오더니.

화아아아아악-

나무에 형형색색의 빛들이 가득 들어서는 것 아닌가?

‘호오… 설마 저 빛들이 다 정령들인가? 어마어마하네.’

생에 흔히 보기 어려운 장관일 수도 있겠으나.

크기만 다를 뿐 나는 저 광경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었다.

‘그래. 꼭 연말의 크리스마스트리가 저거랑 비슷했었지.’

나의 시답잖은 생각과 달리.

세계수의 재탄생이 그리도 기뻤던 것인지 정령들은 계속 나무 주변을 맴돌며 환한 웃음소리를 냈다.

심지어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금의 진동은 대체…….”

“설마 노아스 님께서 진노하시기라도 한… 허억!”

“맙소사… 저, 저것 좀 보게! 세계수가… 세계수가 부활했어!”

진동을 느끼고 밖으로 나온 드루이드들 또한.

자리로 돌아온 세계수를 보곤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정령신들께서 우리를 가엽게 여기셔서 세계수를 소생시켜 주신 게 분명해!”

드루이드들이 세계수를 올려다보며 눈물을 글썽이는 사이.

나는 그들과 조금 거리를 벌린 채 생각했다.

‘여하튼 세계수를 부활시키는 데 성공했으니, 이러면 정령신들도 내게 호의를 갖겠지?’

물론 그들이 나와 손을 잡고 두 신들과 싸울지는 의문이었으나.

적어도 그들의 환심을 사기엔 충분했으리라.

‘일이 다 잘 풀리긴 했는데… 정령신들은 어떻게 만나지?’

솔직히 이쪽에서 세계수를 부활시키면 뭔가 반응이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어째 정령신들은 잠잠했다.

‘씁… 다시 세계수를 분질러야 되나.’

내가 세계수를 보며 고민에 잠겨 가던 그때.

[아버지, 저를 창조해 줘서 고마워요.]

갑자기 웬 여인의 목소리가 나의 머릿속에 울려왔다.

‘이건…….’

나는 직감적으로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세계수의 목소리인 건가. 근데… 아버지?’

아버지라니?

아직 결혼도 안 한 총각에게 이 무슨 무례한 발언인가?

[내가 너를 부활시키긴 했어도, 난 너의 아버지가 아니야.]

[하지만 아버지께서 저를 탄생시키셨는걸요?]

[내 필요에 의해서 한 일일 뿐이야. 그리고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고 랄프라고 불러.]

나의 대답에 다시 세계수가 웅웅거린다.

[아버지께서 원하신다면 그렇게 할게요.]

[그래. 그보다 다시 태어난 기분은 어때?]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정령들과 세계의 기운을 유지시키는 게 저의 사명이자 제 존재 이유라는 건 알 것 같아요.]

‘그래. 그게 네 사명인 건 알겠는데, 내가 알고 싶은 건 그게 아니야.’

[그래. 네 사명은 잘 알겠어. 근데…….]

내가 말을 이어 가려던 중.

까르르륵-

자그마한 정령 몇이 하루살이처럼 내게 달라붙어 내 옷을 잡아당긴다.

‘아오… 이 귀찮은 놈들은 왜 자꾸 달라붙어?’

[훠이! 훠이!]

나는 손을 휘저어 달라붙은 정령들을 쫓아내곤 계속 말했다.

[정령신들이 널 복구하는 건 불가능했던 건가?]

[그건 저도 잘 모르겠…….]

[그건 불가능하다.]

갑자기 또 다른 여인의 목소리가 우리의 대화 사이에 끼어들자.

나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여자는… 누구지?’

내가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걸친 여인을 경계의 눈빛으로 응시하자.

세계수가 나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듯 답한다.

[아버지, 저분은 실피드 님이세요.]

[흠…….]

‘호오… 드디어 나타난 건가.’

내 예상대로 정령신들 중 하나가 모습을 보이자.

나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며 실피드를 주시했다.

[불가능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창조의 힘은 오직 신들의 신이셨던 아가멤논 님만이 사용할 수 있는 힘이었습니다. 물론 그 후계자이신 랄프 님께서도 사용하실 수 있겠지만요.]

[호오… 아가멤논을 아나?]

나의 물음에 세계수에서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온다.

[전에 있던 세계수를 창조하신 분도 아가멤논 님이세요.]

[호오…….]

‘역시 신들의 신이다 이건가.’

[그러나 베논과 레바논이 힘을 합쳐 아가멤논 님을 공격했고, 아가멤논 님은 결국 소멸당하셨지요.]

[그건 알고 있다. 그런데 아가멤논을 소멸했으면 아가멤논이 갖고 있던 힘도 두 신에게로 갔을 텐데?]

[그렇습니다. 레바논은 창조와 회복의 힘을 택했고, 베논은 파멸의 힘을 택했습니다.]

실피드의 대답에 나는 한 가지 의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레바논이 세계수를 재창조하는 것도 가능하겠군.]

[그건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하다고?]

똑같은 창조의 힘일 것인데 어째서 레바논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일까?

[그들은 아가멤논 님의 힘을 완전히 흡수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권능은 완벽하지 않아요.]

[흠… 완벽하지 않다라…….]

실피드의 대답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놈들이 아가멤논의 후계자를 찾아서 죽이려고 하는 건가.’

잠재적인 위협이 되는 건 당연하고, 어쩌면 후계자를 죽여 완전한 아가멤논의 힘을 얻으려고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군.]

[…두 신과 싸울 생각이신가요?]

[그래야지, 당장은 아니지만. 아 참, 그리고 세계수를 없앤 게 베논이 아니라 레바논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나?]

나의 물음에 실피드가 빙긋 웃어 보인다.

[물론 알고 있죠.]

[그래? 그런데 왜 흑마법사들을 공격하는 거지?]

[어차피 둘 다 상대해야 한다면 공공의 적인 흑마법사들부터 처리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을 뿐이에요.]

나름 일리 있는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런가.]

[언제고 후계자님께서 흑남의 신분을 버리고 두 신과 싸우고자 하실 때, 저희를 부르세요. 저희 정령들은 기꺼이 후계자님을 돕겠어요.]

그녀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너무 보여 준 게 많아서 걱정이었는데, 다행이군.]

[오히려 많은 걸 보여 주셨기에 후계자님을 지지하는 거예요. 만약 랄프 님께서 아가멤논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진작 공격했겠죠.]

‘흑남인 줄로만 알았던 내가 세계수를 살려서 아가멤논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 덕에 내 편에 서겠다? 거참… 상황 묘하네.’

[어쨌건 고맙군. 아, 그리고 한 가지 너희에게 부탁할 게 있다.]

[말씀하세요.]

몇십 분 뒤.

나는 실피드와의 대화를 끝마친 뒤 페이트 왕국으로 복귀했다.

* * *

일주일 뒤.

연합군의 막사.

“허어… 아직도 도저히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어떻게 메테오가 소멸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저쪽에 겔런 님에 버금가는 고위급 마법사가 있다고 해도, 발현된 메테오를 막는 건 불가능했을 텐데 말이지요…….”

메테오가 사라진 지 제법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은 여전히 소멸한 메테오를 두고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정말 놈들의 뒤에 고룡이 있는 것 아닙니까? 저번에 흑마법사들이 페이트를 공격할 당시에 메테오가 떨어졌다고 하지 않았었습니까?”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그 오만한 고룡이 저들의 뒤를 봐줄 이유가 있습니까?”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후우…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군요.”

마법사들이 한없이 어두운 표정으로 거듭 한숨을 내쉬던 중.

드루이드들의 수장인 마이브가 무거운 표정으로 운을 뗀다.

“오늘 이 시간 이후로 우리 드루이드들은 연합군을 떠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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