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화
베논의 강압적인 발언에 레바논은 벙찐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뭐라고요? 그게 왜 내가 져야 할 책임이라는 거죠?]
[그럼 네년이 저지른 실수를 나보고 치우라는 건가?]
[실수라고요?! 그건 우리를 위해서, 흑마법사들을 위해서 한 일이었다고요!]
레바논의 반박에 베논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린다.
[아직도 그런 변명을 늘어놓다니. 내가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당히 의심해요. 웃으며 넘겨 주는 것도 한계가…….]
[네년이 나와 정령신들의 싸움을 유도했다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레바논이 꾹 입을 다물자.
베논은 눈을 치켜뜬 채 차갑게 말한다.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네년이 나를 돕는 것 정돈 충분히 가능하겠지.]
[…돌려 말하지 말고 딱 말해요.]
[만약 네년이 정령신들과의 전투에서 날 돕지 않는다면, 세계의 멸망 이전에 네년과 관련된 모든 것들부터 소멸할 것이다.]
[…정말 어이가 없네요.]
[내가 등 뒤에 적을 남기고 싸우는 등신처럼 보였나?]
애써 미소를 유지하는 레바논을 보며.
베논은 낮은 으르렁거림을 이어 갔다.
[그러니 선택해라, 나를 도와 함께 정령신들을 처리하든지, 아니면 그때에 이어 승부에 종지부를 찍든지.]
[…….]
한참 입술만 깨문 채로 가만히 서 있던 레바논의 입가에 서서히 비웃음이 번진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
[그렇잖아? 애당초 세계 멸망이라는 계획을 짠 건 네놈이야. 그럼 네가 모든 결과에 책임을 져야지, 왜 나한테 떠넘겨?]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베논을 보며.
레바논은 빈정거림을 이어 갔다.
[왜? 내 말이 틀려? 틀리다고 생각하면 옛날 방식대로 하든가.]
그 말을 끝으로.
쩌저적-
레바논은 열린 균열 사이로 사라져 버렸고.
베논은 그녀가 있던 자리를 가만히 응시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옛 방식이라……. 이기는 쪽이 정의라는 건가. 어이가 없군.]
그녀의 말대로 계획의 대부분을 그가 수립한 건 맞았다.
하나, 상의도 없이 세계수를 부순 건 그녀이지 않은가?
그럼 당연히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건만 그녀는 그저 상황을 면피하려고 들었다.
아니, 오히려 한술 더 떠 이제는 동맹을 파기하고 그에게 칼을 겨누려 한다.
[재미있군.]
분명 자신을 돕지 않는다면 세계 멸망을 떠나 먼저 그녀와 전투를 치르겠다고까지 했건만.
아무래도 그녀에겐 그의 경고가 가벼운 압박 정도로밖에 들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레바논… 네년은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 반드시 그 선택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 * *
4일 뒤.
‘흠… 이상하네.’
나는 의자에 앉은 채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슬슬 입질이 올 때가 됐는데 왜 아직도 잠잠한 거지?’
메테오는 하루하루를 지나 점점 완성이 되어 가고 있건만.
어째서 두 신은 아직도 잠잠한 것일까.
‘설마 둘 다 끝까지 방관할 생각은 아니겠지?’
실현 가능성 낮은 이야기긴 하지만 아주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니면 내가 알아서 병력을 물릴 거라 생각하고 있는 건가? 아오…….’
어느 쪽이 됐건 두 신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남는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결국 내가 움직여야 하나.’
내가 속으로 혀를 차던 그때.
[흑남은 들어라.]
돌연 베논의 무거운 음성이 나의 머릿속을 울려왔다.
‘오, 드디어 왔구나.’
[말씀하시지요.]
[뭘 하고 있지?]
[하하, 메테오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 중이었습니다. 혹시 그에 대한 조언이라든지, 혹은 도움을 주실…….]
내가 웃으면서 말하던 중.
베논이 내 말을 끊으며 딱 잘라 말한다.
[그런 사소한 일은 제쳐 둬라.]
‘그래, 제쳐 둬… 음? 제쳐 두라고?’
베논의 말인즉슨.
메테오가 흑마법사들의 머리 위에 떨어지게 놔두라는 뜻인 걸까.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깟 메테오가 중요한 게 아니다.]
‘…미친놈인가? 지금 그것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는데?’
나는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실소를 억누르곤.
무심히 질문을 이어 갔다.
[그럼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당장 전 병력을 이끌고 레바논으로 이동해라.]
[…예?]
뜬금없는 명령에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아니, 이 새끼가 갑자기 왜 이딴 명령을 내리는 거야? 가만… 설마 레바논과의 사이가 틀어지기라도 한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갑자기 베논이 이런 상식 밖의 명령을 하진 않을 터.
‘뭐, 레바논으로 가는 거야 상관없긴 한데…….’
만약 흑마법사들이 군세를 돌려 레바논으로 향한다면.
페이트 왕국만 커다란 피해를 입는 셈이었으니 말이다.
‘갈 때 가더라도 최소한 인간의 도리는 하고 가야지 싶은데.’
[베논이시여, 레바논으로 가더라도 메테오의 발동은 저지하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걸 왜 네가 신경 쓰는 것이지? 그깟 왕국이 망하건 말건 개의치 마라. 네가 신경 써야 할 것은 그깟 마법이 아니라 나의 명령뿐이다.]
‘망할…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어떻게 내 예상에서 조금도 빗나가지 않는 대답을 할 수 있는 건지.
내가 속으로 고개를 젓는 사이, 계속 말하는 베논.
[준비 기간을 단축하진 않겠다. 하나 최단시간 내로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레바논으로 이동해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베논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아니… 이보쇼! 이보쇼! 아오, 골 때리네.’
황당하기 짝이 없는 명령에 잠깐 두통이 밀려왔으나.
나는 최대한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자 했다.
‘근데 베논이 저렇게 나오는 걸 봐선, 확실히 두 신의 관계에 균열이 생긴 것 같긴 한데……. 아니, 그래도 메테오는 해결하고 가야 할 것 아냐!’
나는 한숨을 내쉬곤 고민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되나…….’
이대로 레바논으로 넘어가는 일?
솔직히 이행해도 상관없긴 했으나.
메테오가 작렬한다면 페이트 왕국은 아수라장이 될 것이고, 무수히 많은 사망자가 속출할 게 뻔했다.
‘나도 상도덕이 없는 놈이긴 하지만 이건 아니지. 후… 별수 없나.’
한참의 고민 끝에 나는 마침내 결론을 내렸다.
‘어쩔 수 없지.’
* * *
일주일 뒤.
덜그럭, 덜그럭-
그어어어어어-
모든 언데드 군세가 출정 준비를 끝마친 가운데.
아직 말에 오르지 않은 레논 부탑주가 내게 다가온다.
“랄프 님, 이렇게 적들을 놔두고 레바논으로 이동해도 되는 겁니까?”
걱정 가득한 레논의 물음에 나는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허… 눈앞에 적들이 저리도 많은데 이렇게 레바논으로 가야 한다니…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저도 납득이 가질 않지만 어쩌겠습니까, 그게 베논 님의 명령인 것을요.”
나의 대답에 레논이 깊이 한숨을 내쉰다.
“힘겹게 정복한 페이트를 내놓는 건 둘째 치더라도, 등을 돌리고 도망치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레바논으로 향하는 걸 알면, 놈들도 우리를 뒤쫓아 올 겁니다. 애당초 놈들의 목적은 페이트 왕국이 아니라 우리잖습니까?”
“그렇기야 합니다만…….”
말꼬리를 흐리다가 슬며시 나를 응시하는 레논.
“그런데 흑남께선 정말 함께 가지 않으셔도 괜찮으신 겁니까?”
“베논께서 맡기신 일을 끝마치면 저도 곧장 뒤따라가겠습니다.”
“저희가 떠나거든 귀족들이 랄프 님을 핍박할 수도 있을 텐데…….”
레논이 거듭 걱정하며 발길을 돌리지 못하자.
나는 그런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을 겁니다. 설마 베논께서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런 신탁을 내리셨겠습니까? 시간이 많이 지체됐습니다. 이만 가시지요.”
“…알겠습니다. 부디 무탈하시길…….”
고개를 숙여 보인 레논이 군세를 향해 힘껏 소리친다.
“전군! 출정하라!”
레논이 나를 대신하여 군세를 이끌고 사라지자.
나는 어느덧 점이 되어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일단 과제 하나는 해결됐고. 이제부터가 관건인데…….’
나는 아직 불씨가 남아 있는 전란의 땅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과연 놈들이 어떻게 나오려나.’
이대로 드루이드와 마법사들이 메테오 발현을 취소하고 흑마법사를 쫓아간다면 다행이겠으나.
놈들이 어떻게 나올지는 아직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남은 거긴 하지만… 별일 없이 잘 마무리가 됐으면 좋겠는데…….’
* * *
다음 날, 점심.
연합군의 막사.
“…그게 정말입니까?”
어째선지 평소와 달리 막사엔 들뜬 감정들이 맴돌고 있었다.
“정말입니다! 간밤에 흑마법사들이 군세를 이끌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허어… 그것참 희소식이로군요!”
전령이 전해 온 소식 덕분일까.
수뇌부들의 면면에 미소가 가득하다.
“푸하하하하! 아무래도 메테오에 주눅이 들어 도망간 게 분명합니다!”
“그렇습니다! 겔런 님의 계략이 적중했다고 봐야겠지요.”
마법사들이 백탑주의 계획을 칭송하던 중.
드루이드들의 수장, 마이브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한다.
“한데 당장 놈들을 추격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지금 놈들의 뒤를 친다면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것 같은데…….”
“안 됩니다. 일에도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일단 이곳에서의 일부터 마무리를 지어야 합니다.”
그러나 겔런의 공백을 대신하여 자리에 있던 부탑주가 그녀의 의견에 반대했다.
“이미 흑마법사들이 물러났는데 이곳에서 뭘 더 할 수 있다는 거죠?”
“저희 탑주님께서는 제게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스산한 표정을 한 채 말을 이어 가는 부탑주.
“이미 페이트는 흑마법사들에 의해 오염되었으니, 정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이지요.”
“…뭐라고요? 잠깐만요. 그 말은…….”
“우리의 계획은 속행될 겁니다.”
부탑주의 말이 끝나자.
연합군 수뇌부들은 당혹감을 금치 못했다.
“아니… 이미 적들이 다 떠났는데,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요?!”
“계획을 속행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다면 우리가 흑마법사들과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드루이드들이 목소리를 높여 거칠게 반발을 했으나.
부탑주를 비롯하여 백탑의 마법사들의 표정은 단호했다.
“왜 반대를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우리가 죽이려 하는 건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흑마법사들의 사상에 물든 예비 흑마법사들입니다.”
“저들이 흑마법사의 사상에 물들었는지 어떻게 압니까!?”
그에 부탑주가 이죽거린다.
“여러분은 얼마 전에 페른에 흑탑이 들어섰던 건 잊으신 모양입니다. 이대로 페이트를 놔둔다면 페이트 또한 페른과 같은 절차를 밟게 되겠지요. 여러분은 그런 결과를 원하시는 겁니까?”
“아니… 그것이…….”
부탑주의 말이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일부 수뇌부는 입을 다물고, 마이브가 버럭 소리친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분명 저들 중에는 흑마법사들의 사상에 영향받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텐데요? 그런 사람들마저도 죽일 생각인가요?”
“어떤 일을 진행하던 간에 반드시 희생은 나오는 법입니다. 희생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게슴츠레한 눈으로 마이브를 응시하며 말을 이어 가는 부탑주.
“그러니 저들이 흑마법사들의 시종이 되기 전에 정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다들 아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