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61화 (161/200)

◈ 161화

“지, 진심이신가요?”

당황한 마이브의 물음에 백탑주는 싸늘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럼 지금 족장의 눈에는 내가 농담이나 하는 것처럼 보입니까?”

“지금 백탑주께선 크게 흥분하셨어요. 일단 감정을 좀 가라앉히고…….”

“마이브, 난 충분히 냉정하네.”

그에 마이브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방금 전까지 메테오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심사숙고한다던 양반이 저리 갑자기 결정을 내리니.

누가 봐도 감정적인 결정이라고밖엔 생각이 되지 않았다.

“일단 누가 백탑을 습격했는지 범인을 찾는 게 우선 아닐까요?”

“찾을 것도 없네. 흑마법사들 말고 범인이 또 있겠는가?”

“그건 그렇지만…….”

이미 백탑주의 눈이 완전히 뒤집어져 버린 탓일까.

마이브는 차마 더 이상 그를 말릴 수 없었다.

“그런데 메테오가 바로 발동할 수 있는 마법은 아니지 않나요?”

마이브의 질문에 겔런 백탑주가 고개를 끄덕인다.

“고룡들이야 바로 쓸 수 있겠지만, 우리는 준비 기간이 필요하네.”

“얼마나요?”

“마법사들의 상태와 재료의 질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세 달을 넘기진 않을 걸세.”

그에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는 마이브.

“그럼 메테오를 준비하는 사이에 놈들이 도망칠 수도 있겠네요. 아니면 오히려 그 기간 동안 우리를 공격하러 올 수도 있을 테고요.”

“도망친다면 우리가 빈 땅을 점령하면 될 것이고, 공격하러 나온다면 드루이드들이 잘 보호해 주지 않겠나? 그 정도는 가능할 거라고 보네.”

한 치의 망설임조차 느껴지지 않는 겔런의 태도에 결국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마이브.

“…그러죠.”

“놈들은 반드시 백탑을 건든 대가를 치러야만 할 것이야.”

* * *

3일 뒤.

페이트 왕궁에 위치한 별관.

‘흠… 희한하네.’

나는 지도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갑자기 놈들이 공세를 멈춘 거지?’

세계수가 소멸했어도 공격을 이어 가던 놈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아니면 뭔가 다른 계략이라도 꾸미고 있는 건가. 뭐가 됐건 상관없긴 한데.’

나는 곧 지도를 멀리 치워 버리곤.

느긋하게 걸으며 정원으로 나갔다.

‘가끔은 휴식도 필요한 법이지.’

내가 사람 한 명 없는 정원을 거닐던 그때.

스스스스스슥-

갑자기 하늘 위에 커다란 원이 그려지기 시작하더니.

그 안으로 기이한 도형들이 천천히 들어서 갔다.

‘저 술식은…….’

분명 책에서 본 기억이 있다.

‘호오… 설마하니 메테오를 준비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네.’

메테오.

마법이 작렬한 일대를 불지옥으로 만드는 대마법이긴 했으나.

저 대마법에는 뚜렷한 단점 또한 존재했다.

‘발동까지 더럽게 시간이 많이 걸릴 텐데. 설마 이쪽이 맞을 거라 생각하고 사용한 건 아닐 테고.’

저번에 떨어진 메테오는 고룡이 곧바로 술식을 발현하여.

흑마법사들이 이렇다 할 대처를 못 했으나, 지금의 상황은 그때와 너무도 달랐다.

‘막을 시간도 충분하고, 무엇보다…….’

나는 슬쩍 하늘을 올려다봤다.

‘만약 메테오가 완성될 때까지 병력들을 물리지 않으면 어떻게 되려나?’

흑마법사들을 체스 말 삼아 대륙을 멸망시키길 원하는 두 신이 과연 어떻게 나올까.

그대로 메테오를 방관할까?

아니면 개입을 하여 메테오를 막아 주려고 할까.

‘뭐, 기껏 진행한 계획을 망가뜨리고 싶진 않을 테니, 개입할 확률이 높겠지.’

나는 하늘에서 천천히 완성되어 가는 술식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어쨌건 메테오는 신들이 알아서 처리하게 하고, 난 저 상황을 좀 이용해 볼까.’

* * *

이주일 뒤.

“정말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걸까? 저것 봐! 며칠 전보다 더 진해진 것 같지 않아?”

“그러니까 말이야. 전쟁에다가, 이제는 저 이상한 그림까지……. 진짜 불안해 죽겠어.”

“이러다 진짜 다 죽는 것 아냐?”

메테오 술식이 점차 뚜렷해질수록.

페이트 왕궁 주변에 거주 중이던 사람들의 불안감 또한 점차 커져 나갔다.

“후우… 모르겠다. 진짜 주신님의 말씀대로 혼란의 시기가 찾아온 건지…….”

“음?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주신 랄프 님 말이야. 설마 모르는 거야? 이 새끼 이거… 설교 시간에 졸았던 티 내네.”

친우의 핀잔에 남자는 얼른 그를 독촉한다.

“아씨… 그보다 혼란의 시기는 또 무슨 말이냐고!”

“주신께서 신도들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다잖아. 세상에 혼란의 시대가 도래할 거라고. 그러니 철저히 대비하고 또 대비하라고.”

“그런 말씀을 하셨어? 나는 못 들었는데…….”

남자가 말꼬리를 흐리자 친우가 피식 웃는다.

“다 들으면 그게 신탁이겠어? 어쨌건 이렇게 걱정하기보단, 신전에 가서 기도라도 올리는 게 어때?”

여왕의 명령하에 건립된 주신 랄프의 신전.

그곳에 가서 기도라도 올린다면 이 불안한 감정이 조금은 해소될지도 모른다.

“…그럴까? 그런데 우리가 들어가도 괜찮은 거지?”

“그럼!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고 여왕께서 직접 선포하셨잖아!”

“후우… 그래. 가서 기도라도 올려 보자.”

낯선 상황에 불안감을 느낀 것이 비단 두 남자뿐만이 아니었던 것인지.

“주신이시여! 주신이시여! 저희를 보우하소서!”

“저희 왕국을 버리지 마세요!”

이미 신전 앞은 사람들로 바글거리고 있었다.

흐허허허허허헝-

특히 주신의 모습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신상 아래에서는.

절규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그러던 그때.

신전 한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왔다.

“너희가 진심으로 진심으로 그분을 갈구한다면, 그분께선 너희가 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기꺼이 들어 주실 것이다! 의심하지 마라! 마음을 가리고 있는 의심을 지워라! 의심이 지워져야 비로소 기적이 시작되는 법이다!”

어째선지 가면을 쓰고 있는 남자가 수많은 군중을 향해 연설을 하고 있었는데.

신전의 신관들도 그를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저 사람은 뭔데 신관님들도 제쳐 놓고 설교를 하고 있는 거래?”

“신관님이 말씀하시기론, 사도님들만이 갖고 있던 증표를 갖고 있었다던데.”

“…증표?”

“왜, 제1사도 제이나 님이 공언하셨던 증표 있잖아. 그것 말이야.”

남자는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아아, 잠깐… 그럼 저 사람도 사도라는 건가?”

“아무래도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조용히 설교를 듣고 있는 것 아니겠어?”

남자들이 수군거리던 사이.

가면을 쓴 남자가 계속 연설한다.

“하늘에 떠 있는 저 이상한 문양을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주신님, 단 한 분뿐이다.”

“주신님을 믿습니다! 주신께서 저희를 구원하실 것을 믿습니다!”

“그분을 진정으로 따르고 섬기는 너희의 가정에 구원이 있을 것이다.”

“오오! 주신이시여!”

군중이 목 놓아 주신의 이름을 부르짖자.

가면을 쓰고 있던 남자의 입가가 희미하게나마 올라갔다.

* * *

한편, 같은 시각.

페이트 왕궁.

“흑남님은 찾았나?”

“그게… 왕궁 곳곳은 물론이고 외성도 샅샅이 둘러봤지만, 도무지 보이시질 않습니다.”

“흐음…….”

신하의 보고에 여왕의 표정은 한없이 어두워져 갔다.

“마법은 점점 완성되어 가는데 도대체 그는 어디로 간 건지……. 후우…….”

설마 메테오가 무서워 무책임하게 도망간 것은 아닐까.

“해결책을 찾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하기엔 흑마법사들도 그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 것 같던데. 아닌가?”

여왕의 말에 귀족들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하면… 지금이라도 백성들을 피신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늦었다간 황금 같은 기회마저 놓쳐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처는 백성들을 피신시킨 뒤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나 귀족들의 발언에도 여왕은 쉽사리 승낙을 내리지 못했다.

[나를 향한 너의 믿음이 굳건하다면 페이트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전날, 주신 랄프의 음성이 그녀에게 내려온 탓일까.

“아니. 피신은 없다.”

그녀는 좀처럼 의견을 꺾지 않았다.

아니, 꺾을 수 없었다.

“여왕이시여!”

“자칫 잘못했다간 수많은 백성이 죽게 될 것입니다!”

“지금 피신을 시작하더라도 결코 빠른 것이 아닙니다! 여왕이시여!”

이미 주신의 뜻에 따르고자 결정한 그녀였기에.

그 어떤 조언도 그녀의 귀에 닿지 않았다.

“이미 결정한 사안이다. 더 듣지 않겠다!”

“아아…….”

일부 귀족들이 한탄에 가까운 한숨을 내뱉었으나.

여왕은 아랑곳 않고 고개를 돌려 레논 부탑주를 응시했다.

“레논 부탑주, 흑남님은 아직도 돌아오시지 않은 겁니까?”

“예. 하지만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명쾌한 해답과 함께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정예 병력을 운용하여 메테오를 준비 중인 시전자를 찾고 있으니 너무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흐음…….”

* * *

같은 시각.

쩌저적-

허공에서 페이트 왕궁을 응시하고 있던 레바논이 힐끔 고개를 돌린다.

[오랜만이네요. 그날 이후로 처음 보는 건가요?]

[그래.]

균열에서 나온 베논은 덤덤히 대꾸하다가.

레바논의 몸에 자리하고 있는 균열들을 보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딘가에 개입한 모양이군.]

[작은 일이 있었네요.]

[세계수를 부순 게 작은 일은 아닐 텐데?]

베논의 물음에 레바논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당신의 하수인들이 밀리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 도와준 것뿐이에요. 원래 당신이 했어야 할 일인데 당신이 부재중이어서 어쩔 수 없이 내가 나선 거죠.]

[그것뿐인가?]

[…뭐라고요?]

레바논이 되묻자 베논은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이유가 그것만이냐고 묻고 있는 거다.]

[그것뿐인데요? 그럼 내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 그런 줄 알았나요?]

[아니라는 건가?]

그에 레바논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아니죠.]

[그런가. 그렇군.]

베논이 자꾸 묘하게 불쾌감을 주자.

레바논은 괜히 꺼림칙한 마음이 들어 넌지시 말을 돌렸다.

[그보다 저건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뭘 말하는 거지?]

[흑마법사들 말이에요. 머지않아 저들 머리에 메테오가 떨어지게 생겼는데, 저대로 놔둘 거냐고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베논.

[흑남이 아둔한 놈도 아니니 알아서 잘 처신하지 않겠나?]

[너무 긍정적인 것 아닌가요? 만약 흑남이 병력을 물리지 않으면요? 그럼 당신의 하수인들은 꼼짝없이 괴멸당할 거고, 우리의 계획에도 지장이 가는데요?]

레바논의 반박에도 베논의 표정은 별반 변화가 없었다.

[그런 낌새가 보인다면 명령을 해야겠지. 그런데…….]

흘끔 레바논을 보며 입가를 올리는 베논.

[애당초 마법사들을 건드린 건 네년이잖나. 왜 백탑에 기사들을 보낸 거지?]

[그건 또 무슨 말이죠?]

[내전을 벌이던 놈들이 갑자기 백탑을 칠 생각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 분명 네년의 입김이 들어갔겠지. 아닌가?]

스산한 말투로 베논이 계속 말한다.

[설마 내 하수인들이 전멸하길 원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그랬다면 내가 왜 세계수를 없앴겠어요. 전부 우리의 계획을 위해서 행동한 것뿐이죠. 그보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베논을 째려보는 레바논.

[내가 왜 당신의 추궁을 받아야 하는 거죠?]

[추궁을 받을 이유는 없지. 하지만 네년이 한 행동에 따라올 결과에 책임은 져야지.]

[책임이요?]

그에 베논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세계수를 잃은 정령들이 점점 광폭해지고 있다는 건 네년도 잘 알고 있겠지.]

[그래서요. 뭐 어쩌라고요?]

[나를 도와 정령신들을 소멸해라. 그게 네년이 져야 할 최소한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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