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60화 (160/200)

◈ 160화

“…….”

일순간 회의장에 정적만이 흐르던 중.

일부 간부가 실소를 흘린다.

“고문도 정도껏 했어야지. 미친놈이 무슨 말을 못 하겠나?”

“하, 하지만 정말입니다! 포로 한 명만이 아닌 여럿이 똑같이 말했었습니다!”

“…뭐라고?”

도무지 납득하기 어려웠던 것인지.

수뇌부는 전령의 말을 믿기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세계수가 파괴됐다라……. 그럼 엔트들이 갑자기 힘을 못 쓴 것도 말이 되긴 해.’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전장을 휩쓸던 놈들이 어느 순간부터 빌빌거렸으니 말이다.

‘진짜로 레바논 그 정신 나간 여신이 세계수를 없애 버릴 줄이야.’

물론 내가 모르는 다른 세력이 세계수를 제거했을 가능성도 있겠으나.

그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너무도 낮았다.

‘어떤 미친놈이 세계수를 건들 것이며, 드루이드들은 또 어떻게 뚫을 건데? 세계수는 레바논이 없앤 게 확실해. 가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차피 레바논이 한 일이라면 그 업적을 내 걸로 해도 상관없는 거잖아?’

레바논이 세계수를 부쉈는지 누가 알긴 하겠는가?

나는 생각을 끝마치고 입을 열었다.

“세계수가 파괴된 건 분명한 사실이다.”

“허… 정말입니까?”

“그런데 흑남께선 어찌 그리 확신을 하실 수 있는 건지…….”

좌중의 물음에 나는 덤덤히 대답했다.

“그야 내가 시킨 일이니까.”

“허어… 흑남께서 주도하신 일이었습니까? 저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레논 부탑주가 크게 놀라워하며 혀를 내두르자.

“이대로 가다간 전쟁의 균형이 크게 밀릴 것 같아 비밀리에 별동대를 조직했습니다. 사전에 부탑주께 말씀을 드리지 못한 부분은 사죄하겠습니다.”

나는 부탑주에게 가볍게 사과했다.

“사죄라니요?! 저였어도 비밀 유지를 위해 같은 방법을 사용했을 겁니다. 그보다 정말 굉장한 계략을 세우셨습니다. 저는 세계수를 부순다는 생각은 감히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말이지요.”

“흑남님의 판단과 결정으로 전쟁의 판도도 크게 뒤바뀌지 않았습니까?”

수뇌부가 나를 한껏 추켜세우던 중.

레논이 내게 넌지시 말을 걸어온다.

“그런 위험천만한 임무를 수행한 별동대에게도 포상을 내려야겠군요.”

“이미 제 나름대로 적절히 포상을 했으니 괜찮습니다. 그보단…….”

나는 수뇌부의 면면을 쓱 훑으며 말했다.

“이제 전세는 우리 쪽으로 점차 기울 테니, 기세를 몰아 연합군을 완전히 박살 내도록 합시다.”

“예!”

* * *

몇 시간 뒤.

페이트 왕궁.

“흑마법사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까? 세계수가 무너졌다더군요.”

“듣긴 했습니다만, 농담이겠지요. 설마 정말로 세계수가 무너졌겠습니까?”

“허허, 그렇겠지요?”

귀족들이 소문을 대수롭지 않은 일 정도로 치부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덜컹-

여왕의 등장에 그들은 입을 꾹 다물고 허리를 조아렸다.

여왕은 그런 귀족들은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을 연다.

“흑마법사들에게서 희소식이 들어왔다.”

“희소식이라 하심은…….”

“드루이드들의 정신적 지주인 세계수를 성공적으로 소멸했다고 하더군.”

여왕의 말이 끝나자.

귀족들은 멍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그게 정말 입니까?”

“어떻게 세계수를…….”

“도대체 누가 그런 무모한 짓을 감행한 거랍니까?”

당황한 귀족들의 질문 세례에 여왕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흑남의 명령이었다더군.”

“흑남이… 허어… 어떻게 그런 무모한 계획을 실현할 생각을 한 건지 모르겠군요.”

“비밀리에 상대의 본진에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귀족들이 흑남의 무모함과 과감성을 두고 의견을 교환하던 중.

한 귀족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한다.

“흑남의 공로는 인정하지만… 우리도 조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심하다니요? 이미 우리는 그들과 한배를 탔는데 조심할 게 뭐 있습니까?”

“누가 세계수를 부쉈을 거라 보십니까? 전 드루이드들의 경계를 뚫고 세계수에 다가갈 자들은 숙련된 암살자 말곤 없다고 봅니다.”

의제를 던진 귀족의 말에 대부분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겠지요.”

“드루이드들의 눈조차 속이는 실력을 가진 암살자들이 어디선가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으십니까?”

“…….”

그의 말이 끝나자.

일부 귀족들은 괜히 천장을 보거나 주변을 힐끔거렸다.

“의심은 그쯤 하여라. 쓸데없는 의심은 불안을 야기할 뿐이다.”

보다 못한 여왕이 손잡이 부분을 내려치며 말을 이어 간다.

“중요한 건 저들이 세계수를 제거했다는 것이고,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는 너희도 잘 알 것이라 생각한다.”

귀족들의 눈을 뚜렷이 응시하는 여왕.

“이제 더 이상 레바논은 대륙의 패자가 아니다. 진정한 대륙의 패자가 흑마법사들이 될 수도 있는 이 상황에서 아직도 우리가 흑마법사들에게 대항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나?”

“…….”

연합군과 흑마법사를 지지하며 두 파벌로 갈리었던 전과 달리.

오늘만큼은 그 어떤 귀족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기에 우리 페이트 왕국… 아니, 지부는 지금과 같이 흑마법사들과의 동맹 관계를 유지해야만 할 것이다.”

여왕의 선포가 회장을 울리자.

“참으로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흑마법사들은 떠오르는 태양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저들을 더욱 가까이하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만 합니다!”

귀족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옳다구나 하며 여왕의 뜻에 동조했다.

“최대한 저들의 환심을 사야만 합니다! 무기와 방어구는 물론이요, 식량 또한 지속적으로 지원을 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감옥에 있는 사형수들을 싹 다 죽여 시체를 지원해 주는 건 어떻습니까?”

* * *

페이트 왕궁에서 흑마법사들의 환심을 살 방법을 논의하던 그 시각.

연합군의 막사.

“…….”

흑마법사들을 몰아내고 대륙의 정의를 되찾겠다는 명분하에 모인 그들이건만.

어째선지 막사의 분위기는 차갑기 짝이 없었다.

누구 하나 선뜻 입을 열지 못하던 중.

“여러분은 이게 말이 된다고 보십니까?”

백색 로브를 입고 있는 젊은 남자가 드루이들을 노려보며 포문을 열었다.

“분명 병력의 숫자는 엇비슷했습니다. 그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질적으로는 우리가 더 우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우리가 밀려야 하는 겁니까.”

남자의 내면에 쌓여 있던 분노가 상당했던 것일까.

“애당초 이렇게 흘러갈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당신들만 제 몫을 해 줬어도 우리는 진작 놈들을 대륙에서 몰아낼 수 있었을 거란 말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본진이 파괴되고, 거기다가 세계수까지 잃을 수가 있답니까?!”

열린 포문에서 쏟아져 나온 포탄들이 드루이드들을 직격했다.

“그게… 우리도 정말… 당혹스럽다는 말밖에는 못 드리겠네요. 비취 숲의 경계는 그 어떤 성보다 철저하고 또 견고했어요.”

“아아, 그렇게 견고한 성이 그리 쉽게도 뚫렸답니까?”

드루이드들의 수장 마이브를 보며.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정령과 엔트들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 탓에 우리 백탑의 피해와 피로도만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는 건 아십니까?”

“그건…….”

남자가 끊임없이 드루이드들을 질타하던 그때.

“부탑주, 그쯤 하게.”

백탑주 겔런이 허허롭게 웃으며 남자를 만류했다.

“하나, 탑주님!”

“악마들의 저항이 거셀 거라는 건 충분히 예상한 일이잖은가? 더욱이 지금 우리가 서로 싸우는 것보단 대책을 마련하는 게 더 시급한 일일세.”

“하지만 지금 마땅한 대책이 없지 않습니까?”

부탑주의 물음에 백탑주의 눈가가 싸늘하게 내려앉는다.

“방법이 왜 없겠나? 다만 그만한 희생이 따르니 배제하고 있었을 뿐이네.”

“그 방법이 뭔가요?”

드루이드의 수장 마이브가 관심을 보이자.

겔런 백탑주는 차갑게 웃으며 대답한다.

“지금 흑마법사들의 정예가 페이트에 상주 중인 상황에 만약… 페이트를 송두리째 날려 버린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그 말은… 아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마이브가 기가 질린 표정으로 묻자.

겔런 백탑주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충분히 가능하지요.”

“어떻게 그런…….”

“간단합니다. 페이트 왕국 위에다가 메테오를 떨어뜨리는 겁니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여러 개를 말이지요. 허허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백탑주와 달리.

좌중은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계획이 성공한다면 확실히 흑마법사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는 있겠지만…….”

“무고한 백성들 또한 엄청나게 죽어 나가겠지요. 그래서 제가 쉽사리 결단을 내리고 있지 못하는 겁니다.”

겔런 백탑주는 표정을 풀곤 초연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

“으허허허, 그렇게들 딱딱하게 굳어 계실 것 없습니다. 그 방법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최후의 방법입니다. 거기다가 우리가 분전하고 있으면 레바논 왕국에서 지원병이 오지 않겠습니까? 현실적으로 그 방법을 쓸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하시니… 안도감이 들면서도 조금 아쉽네요. 페이트 왕국은 놔두고 흑마법사들만 싹 쓸어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 *

한편, 같은 시각.

‘으음…….’

나는 손으로 턱을 괸 채 지그시 지도를 응시했다.

‘확실히 세계수의 존재 유무가 엄청나게 차이가 나긴 하네.’

밀렸던 전선이 단시간 내에 복구될 거라곤 솔직히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도 일단 전쟁을 최대한 질질 끌면서 신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기다려야지.’

이미 베논에게는 약을 풀었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회복한 베논이 어떤 행동을 할지 기다리는 게 우선이었다.

‘만약 정말 베논이 레바논과 생사투라도 벌여 준다면…….’

나는 스산한 미소를 지었다.

‘둘 중 살아남은 놈이랑 싸우면 될 텐데, 두 연놈이 어떻게 나오려나…….’

* * *

한 달 뒤.

연합군의 막사.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째 놈들이 나올 생각을 않는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요. 이 정도로 공격한 데다가, 심지어 우리가 밀리는 상황이니 나와서 반격을 할 만도 한데… 참 희한하네요.”

한 달이 지났음에도 전선에 커다란 변화가 없던 탓일까.

연합군의 수뇌부는 좀처럼 성 밖으로 나오지 않는 흑마법사들의 태도에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놈들은 페이트만 차지할 생각이었던 게 아니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 페이트를 안정화하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테니 말일세.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소극적인 것 같긴 하군.”

연합군 수뇌부가 풀리지 않는 의문을 두고 고심하던 그때.

“겔런 님! 겔런 님!”

갑자기 하얀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고함을 지르며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음? 안슨? 네가 왜 이곳에 온 것이냐?”

분명 백탑에 있어야 할 마법사가 이곳까지 그를 찾아온 탓일까.

겔런의 얼굴에 불안감이 맺혀 갔다.

“그것이… 그것이…….”

안슨이라 불린 마법사는 숨을 헐떡이는 와중에도 울 것 같은 얼굴로 힘겹게 말한다.

“백탑이… 백탑이 습격을 당했습니다.”

“…뭐라고?”

백탑이 습격을 당했다니.

대륙에서 가히 최고의 마탑이라 자부하는 백탑이 어찌 습격을 받는단 말인가?

“그럴 리가 있나! 정예 마법사들이 나와 있다고 해도 그렇지, 백탑이 그깟 습격자들 하나 처리 못 하는 게 말이나 되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부탑주가 호통치듯 말하자.

소식을 들고 온 마법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게… 3천이 넘는 습격자들이… 백탑을… 백탑을 급습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계속 말하거라.”

겔런 백탑주가 부릅뜬 눈을 까딱이자.

마법사는 힘겹게 말을 이어 갔다.

“백탑에 있던 마법사 대부분이… 몰살을 당했습니다……. 저는 겨우 데이비 부탑주님의 도움으로 나왔지만…….”

끝내 말을 잇지 못하는 마법사를 보는 겔런의 표정이 점차 딱딱하게 굳어 갔다.

“습격자들의 정체는… 파악했나?”

“죄송… 합니다. 워낙 경황이 없었던 탓에…….”

“됐다. 쉬어라.”

겔런 백탑주는 마법사를 내보내곤.

한참을 앉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흑마법사들의 소행인 게 분명해요.”

그 와중 마이브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한다.

“놈들이 왜 소극적으로 나왔는지 이제야 이해가 가네요. 놈들은 이곳에서 시간을 끌고 뒤로 우리의 본진에 타격을 입힐 생각이었던 거예요!”

“암살자들의 정체도 파악이 안 됐다는데, 놈들이 했다는 보장이 있답니까?”

부탑주의 반문에 마이브가 헛웃음을 흘린다.

“그럼 이 상황에 백탑을 칠 사람이 또 있을까요?”

“뭐, 그건 그렇긴 합니다만…….”

그러던 그때.

“허허허허헣! 으허허허허허헣!”

갑자기 겔런 백탑주가 실성한 사람처럼 미친 듯이 웃어 젖히기 시작한다.

“배, 백탑주님?”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아랑곳 않고 한참을 웃는 겔런 백탑주.

“…….”

이윽고 웃음을 그친 그는 서리가 내려앉은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메테오를 준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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