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도와준다고? 갑자기? 이제껏 잠잠하던 년이 왜 이러는 걸까.’
물론 레바논과 베논이 한배를 타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으나.
다른 이도 아닌 레바논이 이리 갑작스럽게 도와준다고 하니 괜히 의심이 피어올랐다.
‘베논이 지금 휴식 들어가서 이년이 대신 움직이는 건가? 아니면 뭔가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나?’
나는 거듭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어떻게 절 도와주신다는 겁니까?]
[흑마법사들이 비교적 드루이드와 마법사는 잘 상대하던 반면에 엔트들에겐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 같던데, 아닌가요?]
[뭐, 그건 그렇죠.]
정령들과 마법은 어느 정도 흑마법으로 상쇄를 했던 것에 반해.
엔트들의 전진은 쉽사리 막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었다.
‘엔트들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으니……. 그래서 스켈레톤과 누더기 골렘들이 엔트들을 잘 상대했어야 했는데.’
엔트들의 무력이 누더기 골렘보다 조금 우위에 있었기에.
스켈레톤으로는 엔트들의 전진을 막아 내기가 어려웠다.
‘누더기 골렘과 데스나이트의 수량만 엇비슷했어도 그럴 일은 없었겠지만.’
내가 속으로 혀를 차던 중.
레바논이 다시금 내게 말을 걸어왔다.
[만약 당신이 원한다면 엔트들은 내가 해결해 주죠.]
[…어떻게 해결해 주신다는 겁니까?]
설마 레바논이 직접 개입하려는 걸까?
[그건 두고 보면 알게 될 거예요.]
‘나야 나쁠 건 없긴 한데, 도대체 뭘 하려는 거지? 설마 레바논 왕국이 우릴 돕도록 만들진 않을 테고. 뭐 세계수라도 분지르려고?’
세계수.
드루이드들에게도 신성시되는 나무였으나.
무엇보다 엔트들에게는 어머니 그 자체 같은 존재였다.
‘만약 세계수를 제거하면 엔트들의 힘도 크게 약화되겠지.’
엔트들에게도 저마다의 의지가 있긴 했으나.
그들을 통제하는 건 세계수라고 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저희를 도와주려 하시는 겁니까?]
[그야 저도 당신이 전쟁에서 승리하길 원하기 때문이죠.]
[그렇습니까? 그런데 제가 승리하면 레바논 왕국에겐 악재와도 같은 일일 것 같은데요.]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질문하자.
잠시 침묵이 맴돌다가 다시금 레바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깊이 파고들려 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내 뜻을 다 알게 될 테니까요.]
‘이미 다 알고 있는데 알긴 뭘 알아?’
레바논의 궁색한 변명에 나는 속으로 비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요.]
[크흠흠, 아 참. 그리고 마법사들은 물론이고, 특히 드루이드들은 확실하게 짓밟도록 하세요.]
[드루이드들을 말입니까? 이유가 있습니까?]
나의 질문에 레바논의 날카로운 음성이 울려온다.
[말했죠? 너무 깊이 파고들지 말라고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레바논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고.
나는 생각에 잠겼다.
‘레바논이 나선 거야 그렇다고 쳐도… 왜 드루이드를 콕 집어 언급한 거지?’
거기다가 엔트들까지.
이건 누가 봐도 레바논이 드루이드들을 싫어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단순히 싫어하는 것만으로 저렇게 나서진 않을 거고.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가만…….’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다가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드루이드들도 섬기는 신들이 있잖아.’
이프리트.
노아스.
실피드.
엘라임이 바로 그들이었다.
‘정령신들과 레바논의 사이가 안 좋다고 한다면, 레바논이 저렇게 나오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닌데……. 음… 근데 만약 우리가 드루이드를 상대로 기세를 잡게 되면, 저쪽 신들도 나서는 것 아냐?’
물론 이 모든 것들이 단순한 추측에 불과하긴 했으나.
가능성이 없는 가설도 아니었다.
‘그렇게 된다면…….’
네 정령신과 레바논이 아닌, 베논과 맞붙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될 수도 있었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만약 정말 일이 그렇게 돌아간다고 가정한다면……. 이년 봐라?’
레바논의 목적이 대강 가늠이 되었기에.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아무래도 베논이랑 정령신들을 싸움 붙이려는 게 목적인가 보네.’
베논이 정령신들을 상대로 혈투를 벌이면 승패를 떠나 당연히 힘이 쇠약해질 것이고.
그때를 노린 레바논이 베논을 소멸한 뒤 베논의 힘을 흡수하려 들지도 모른다.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야.’
오히려 그들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럴 확률이 높아 보였다.
‘어쩐다. 솔직히 둘이 맞붙는 것도 나쁘지 않긴 한데…….’
베논과 레바논이 맞붙어 양쪽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 내게 있어 최상의 시나리오긴 했으나.
과연 휴식에 들어간 베논이 그녀와 맞붙을 수는 있을지 의문이었다.
‘흠… 어떻게 해야 내가 득을 보는 그림이 나올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 * *
한편, 같은 시각, 마계.
부글부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방.
그 중심에 있는 검은 호수에서 간헐적으로 기포가 올라오던 그때.
촤아악-
검은 물 안에서 다부진 체격을 갖춘 남자가 수면 위로 솟구쳤다.
[흠…….]
긴 장발에 묻은 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으나.
베논은 아랑곳 않고 물 밖으로 걸어 나가 자신의 몸을 내려다봤다.
몸 곳곳에 균열이 있었던 예전과 달리, 균열은 조금 희미해져 있었다.
[마신이시여, 몸은 좀 어떠십니까.]
그 와중 늙은 집사의 모습을 하고 있는 대악마 아몬의 물음에 베논은 무심히 대답한다.
[날 걱정하는 건가? 너에게 걱정받을 정도로 쇠약해지지 않았다.]
[허허,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래도 이제 개입은 자제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위험성이 너무도 큽니다.]
아몬의 진심 어린 충고에 베논은 무심한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내가 결정한 일이다. 더 이상 그 일을 거론하지 마라.]
베논이 딱 잘라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몬은 거듭 우려를 표한다.
[저는 그저 베논 님의 상태가 악화되어 있을 때를 노리고 레바논이 우리의 뒤통수를 칠까 우려가 돼서…….]
[그럴 일은 없다. 적어도 아가멤논의 후계자를 찾아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래도……. 알겠습니다.]
베논의 표정을 본 아몬이 깊숙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상황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지?]
[베논 님의 하수인들이 조금 열세인 상황이긴 하나 아직까지는 팽팽하다고 생각합니다.]
[…열세?]
그에 아몬은 흑마법사들이 처한 작금의 상황을 차분히 설명했고.
베논은 그제야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놈들이 움직였군.]
[만약 마신님의 하수인들이 놈들마저 처리한다면 더 이상 베논 님의 뜻에 거역할 존재는 없을 것입니다.]
[놈들은 아직 잠잠한가?]
질문의 저의를 이해한 아몬이 얼른 고개를 끄덕인다.
[예. 이프리트만이 잠깐 화산 지대에서 모습을 보였을 뿐, 다른 놈들은 아직 잠잠한 것 같습니다.]
[그런가. 아직 변수는 없겠군.]
베논이 무심히 대꾸하던 그때.
[베논이시여, 위대하신 마신이시여. 마신님의 안위를 위협할 큰 변수가 발생했습니다.]
흑남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울려왔다.
[흠… 변수라…….]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흑남이 변수가 생겼다는군.]
베논의 대답에 아몬은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마도 흑마법사들이 밀리고 있는 상황 때문에 마신께 기도를 올린 모양입니다.]
[이해할 수가 없군. 어차피 결국 멸망을 피할 수 없을 터인데, 왜들 발악을 하는지.]
베논은 고개를 젓곤 흑남을 질타하기 시작했다.
[내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열세에 처하다니. 너의 능력에 의문이 들기 시작하는구나.]
[제가 말하려는 건 그깟 전장의 상황이 아닙니다.]
전장을 그깟 것으로 취급하는 흑남의 발언에 호기심이 동한 베논.
[그럼 무슨 변수가 생긴 거지?]
[레바논이 베논 님을 해할 계략을 세우고 있습니다.]
흑남의 발언에 베논은 몸을 움찔거렸다.
[…자세히 말해 봐라.]
[레바논은 베논 님이 정령신들과 함께 소멸하길 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계속해라.]
베논의 명령에 계속 말을 이어 가는 흑남.
[베논께서 정령신들을 상대로 승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부상을 입으실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레바논은 바로 그때를 노리려는 모양입니다.]
[네 말은 알겠다. 하나, 확실한 건가?]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레바논이 제게 도움을 주겠다고 한 말을 토대로 제 나름대로 추측을 해 봤습니다.]
흑남의 말이 끝나자.
베논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다시금 말을 꺼낸다.
[확실하지 않다는 말이군.]
[그렇긴 하지만…….]
[네 말은 잘 알겠다.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하도록 하지. 너는 레바논의 계략을 신경 쓰기 전에 너의 본분에 집중해라.]
그 말을 끝으로 베논은 흑남과의 연락을 끊어 버렸다.
[계략이라…….]
[흑남이 뭐라고 했습니까?]
아몬의 물음에 베논은 대수롭지 않아 하며 대답한다.
[레바논이 정령신들과 나를 맞붙이려 한다더군.]
[워낙 속이 음험한 년이라 무슨 짓거리를 할지 모르긴 합니다. 그의 말을 무조건 믿을 수는 없겠으나 최소한의 대비 정도는 해 둬야 한다고 봅니다.]
[대비라…….]
말꼬리를 흐리는 베논을 보며 아몬은 계속 조언을 이어 갔다.
[그렇습니다. 최소한 네 정령신이 베논 님과 싸우게 된다면, 적어도 레바논도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절대로 마신께서 혼자 놈들을 상대하셔서는 안 됩니다! 아니면 차라리 저희를 내보내시지요!]
아몬의 진정 어린 충언에 마음이 흔들린 것일까.
베논은 잠시 말이 없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펠기누스는 어디에 있지?]
[그녀는 마신님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 중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녀가 소멸한 여타 잡신들의 숫자만 해도 세 자릿수에 가까울 것입니다.]
[펠기누스를 불러와라. 아니, 모든 대악마들을 소집해라.]
베논의 말에 아몬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 말씀은…….]
[펠기누스에게 네 정령신을 맡기겠다.]
* * *
일주일 뒤.
쩌저적-
고요함만이 가득한 비취 숲에 커다란 균열이 생기더니.
그 안에서 웬 여인이 걸어 나온다.
[뒤따라올 이득을 생각하면, 이 정도 개입 정도는 괜찮겠지.]
그녀가 눈앞에 있는 거대한 나무 앞으로 다가가자.
[레, 레바논? 당신이 여긴 왜…….]
거대한 나무에서 깜짝 놀란 음성이 들려왔다.
[글쎄. 내가 왜 여기에 왔을까.]
[우리를 도우러 온 거군요! 정말, 정말 잘 오셨어요! 지금 대륙은 너무도 엉망이에요. 이대로 가다간 대륙은 꼼짝없이 베논의 손에 떨어지고 말 거예요!]
세계수의 의지가 부르르 떨듯 말하자.
레바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놈은 결국 내 손에 소멸할 거거든.]
[정말 믿음직스러우시네요! 그런데 레바논 왕국은 언제 움직이는 건가요? 아직까지 그들이 내전을…….]
콰드드드득-
갑자기 레바논이 세계수에 손을 뻗어 힘을 발현하자.
[아아아악! 지, 지금… 뭘……!]
세계수의 의지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 댔다.
[뭘 하긴, 내가 반쪽짜리 신에서 진정한 신으로 거듭나려고 하는 거지.]
[다, 당신이… 도대체 왜…….]
[시끄러워.]
레바논의 손에서 찬란한 빛이 발현되자.
콰작-
세계수의 밑동에서 기괴한 음성이 울리더니.
[다, 당신이 어떻게… 아아…….]
세계수가 옆으로 천천히 허물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앙-
둔탁한 굉음이 비취 숲을 뒤흔들던 중.
사사사삭-
레바논의 몸에 희미한 균열이 생겨 갔다.
[으으… 겨우 이만한 개입에 이 정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니. 후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레바논.
이윽고 그녀는 다시금 균열 속으로 사라졌고.
“무슨 소리였지?”
“마, 맙소사…….”
“세, 세계수가… 세계수가 무너졌다! 세계수가 무너졌어!”
드루이드들의 당황한 음성만이 비취 숲을 메아리치듯 울렸다.
* * *
5일 뒤.
“흑남님! 승전보입니다! 제5, 제6 악마 병단이 애덤성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안트라성에서도 적들의 공세를 훌륭히 저지했답니다! 특히 엔트들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고 합니다!”
“호오… 그래?”
‘겨우 며칠 내로 전쟁의 판도가 이렇게 바뀌었다고?’
딱히 이쪽에선 한 것이 없건만.
‘정말로 레바논이 뭘 하긴 한 것 같은데…….’
설마 그녀가 직접 세계수에 개입하기라도 한 걸까.
‘그건 아니겠지. 그년이 그만한 위험성을 안으려 하겠어?’
내가 속으로 고개를 젓던 중.
“급보입니다! 급보입니다!”
흑마법사 한 명이 황급히 회의장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그것이… 허억, 허억… 잡은 포로들을 심문하던 중, 엄청난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엄청난 정보?”
나의 물음에 흑마법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수가… 세계수가 파괴됐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