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오리하르콘 광산을… 말입니까.”
‘뭐지?’
어째서인지 안드레이아 3세의 표정이 썩 밝지 못하자.
나는 불현듯 의구심이 들었다.
‘설마 뭐, 이제 와서 채굴이 불가능하다는 헛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것 같군. 설마 그사이에 변심이라도 한 건가?”
“허허, 흑탑의 도움을 잊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잠시 머뭇거리던 안드레이아 3세가 어색하게 입을 뗀다.
“약간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
“그렇습니다. 그것이… 얼마 전 오리하르콘 광산을 점거당했습니다.”
‘점거당했다고?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분명 오리하르콘 광산은 페른 왕국의 관리하에 비밀스럽게 운영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었건만.
‘진짜 약속을 지키기 싫어서 되도 않는 변명을 하려는 건가?’
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안드레이아 3세를 응시했다.
“약속을 어길 생각인 건 아니겠지?”
“설마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점거를 당했다면 다시 되찾아오면 됐을 텐데?”
추궁에 가까운 나의 질문에 안드레이아 3세의 표정은 어두워져 갔다.
“우리 또한 최선을 다해 광산을 되찾으려 했습니다만, 광산을 점거한 놈들이 우리가 감히 어찌할 수 없는 존재들인지라…….”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
도대체 어떤 놈이 내가 침을 발라 둔 광산을 점거했기에.
왕이 저리도 쩔쩔매는 것일까.
“그 존재가 누구지?”
“그게… 드래곤들입니다.”
‘…음?’
드래곤이라 하면.
보통 자신의 레어에 처박혀 모습조차 잘 안 드러내는 게으름뱅이들 아닌가?
‘그런데 왜 놈들이 갑자기 오리하르콘 광산에 관심을 보인 거지?’
“이유는?”
“딱히 저들의 심기를 건든 적도 없어서 정말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또한 굉장히 난처한 상황입니다.”
‘흠… 이건 조금 변순데.’
설마하니 드래곤들이 오리하르콘 광산을 점거할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기에.
나는 고심에 잠겼다.
‘드래곤들이면 강하긴 할 텐데, 얼마나 강할지 감이 안 오네.’
문헌에야 몇 시간 만에 성 하나를 작살낼 정도로 강한 존재라 적혀 있었으나.
그 정도는 나도 마음만 먹는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할 수 없나, 일단 드래곤을 만나 보는 수밖에. 그리고 만약 놈들이 별 같잖은 이유로 광산을 점거한 거라면…….’
놈들은 내가 채굴할 광산에 손을 댄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었다.
“좋다. 그럼 일단 광산으로 날 안내해라.”
“…예? 하나…….”
내 발언에 깜짝 놀랐는지 말까지 더듬는 늙은 왕을 보며.
난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상대가 드래곤들이라고 해도 내 광산에 침입한 침입자라면 토벌해야지.”
“아… 예. 한데…….”
흑남께 드린 것은 오리하르콘의 채굴권뿐인데, 라며 웅얼거리는 왕의 모습에도.
나는 덤덤히 입을 열었다.
“광산으로 안내해.”
* * *
다음 날.
“저곳이 광산이 있는 곳입니다.”
안내인 격으로 나를 안내하던 귀족이 뻥 뚫린 입구를 가리키며 말하자.
나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저택은 광산을 숨기기 위해 지은 건가?”
광산의 주변으로는 대저택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비교적 잘 관리되어 있는 정원에 괜히 눈길이 갔다.
‘정원이 잘 관리되어 있는 걸 봐선, 확실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살고 있었던 모양이네.’
그렇다는 것은 정말 안드레이아 3세의 말대로.
드래곤들에게 광산을 탈취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일 터.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광산의 중요성이 워낙 높은 탓에……. 하하.”
어색하게 뒤통수를 긁적이던 남자가 조심스럽게 내게 질문을 해 온다.
“그런데… 정말 안으로 들어가실 겁니까?”
“안 들어갈 이유가 있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사실 저희가 이곳에 온 것만으로도 드래곤들의 심기를 거슬리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남자가 말꼬리를 흐리자.
나는 손을 까딱였다.
“수고했다. 이만 돌아가도 좋다.”
“예? 아, 알겠습니다. 그럼…….”
남자가 도망치듯 허겁지겁 저택을 벗어나자.
나는 광산 입구를 보며 생각했다.
‘어디…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 한번 들어가 볼까.’
난 광산 주변을 슬쩍 살핀 뒤,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호오… 제법 밝네.’
천장마다 박혀 있는 보석 같은 것이 은은한 빛을 뿜어 대어.
어두웠어야 할 광산을 잔잔히 비추고 있었다.
‘근데 오리하르콘도 드래곤도 안 보이는데,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되나.’
받아 왔던 지도를 따라 몇십 분은 걸었건만.
무엇 하나 보이는 것이 없었기에 나는 더욱 밑으로 내려갔다.
그러던 중.
깡- 깡-
어디선가 작고 맑은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저긴가.’
나는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깡- 깡-
곧 하나의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키이이!”
“흐으… 흐으…….”
오크, 고블린, 오우거 등.
갖가지 이종족들이 곳곳에서 채굴을 하며 종족을 초월한 노동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음… 이것들 봐라.’
엄연히 채굴을 할 권리는 나에게 있건만.
온갖 잡것들이 광산을 건들고 있으니 심기가 불편해졌다.
‘일단 나가서 놈들을 다 족칠까? 아니다.’
저놈들은 어차피 드래곤의 명령하에 움직이는 일꾼들 정도이지.
결국 저들을 움직이는 것은 드래곤이다.
‘그래. 일단 놈들보다 드래곤들을 찾는 게 우선이야. 근데 이놈들이 있을 만한 곳이…….’
내가 바위 뒤에 숨은 채로 지도를 살피던 그때.
“정말 이게 맞는 거야? 시간 낭비만 하고 있는 게 아니고?”
“그럼 어쩌자고? 이것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뭔데?!”
광산 안쪽에서 젊은 세 여인이 언성을 높이며 나왔다.
“키긱…….”
그에 이종족들이 채굴을 멈추고 머리를 바닥에 처박자.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생각했다.
‘설마 저 어린놈들이 드래곤들인가?’
나는 겨우 흑카데미 학생뻘이나 될 법한 아이들을 지그시 주시했다.
“그래도 다른 방도가 있을 수도 있는 것 아냐?”
금발 머리 소녀의 물음에 적발의 소녀가 코웃음을 친다.
“다른 방도? 어르신들도 놈을 이기지 못했어. 근데 다른 방도가 있을 것 같아?”
“그래도 이곳에서 시간을 죽이는 것보단 나을 수 있잖아!”
“아니. 이것 말고 방법은 없어.”
적발 소녀가 딱 잘라 말하자.
금발 소녀가 그를 흘겨보며 퉁명스럽게 말한다.
“그래. 네 말대로 이곳에서 얻은 광물로 무기를 만든다고 치자. 그걸로 뭘 어쩔 건데? 오리하르콘이 신에게 타격을 줄 수 있다고 해도, 네 말대로 어르신들도 못 이긴 존재를 우리가 어떻게 쓰러뜨리냐고! 무기가 있으면 뭐가 달라져?!”
“그럼 어쩌자고!”
두 소녀의 발언이 점점 격해지자.
“일단 다들 진정해. 우리끼리 싸워 봐야 바뀌는 것도 없잖아.”
푸른색의 머리를 한 소녀가 그들을 중재한다.
“그럼 이건 의미가 있고? 이 말도 안 되는 짓거리가 의미가 있긴 한 거냐고!”
금발의 소녀가 다시 짜증 내자.
“네가 더 좋은 의견을 내보든가. 아무 의견도 안 냈으면서 왜 자꾸 짜증을 내!”
적발의 소녀 또한 언성을 높인다.
“다들 진정하라니까. 나이드, 어쨌건 너도 동의한 거잖아. 그러니까 일단 레티의 말을 따르자.”
“이딴 헛짓거리를 할 줄 알았으면 난 동의 안 했어. 왜 내가 인간들을 위해서 무기를 만들어야 하는 건데?”
금발의 소녀가 계속 불만을 표출하자.
푸른 머리의 소녀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본다.
“그게 더 가능성이 높으니까. 어르신들의 최후가 어땠는지는… 너도 봤으니 잘 알잖아. 우리는 신을 이길 수 없어.”
“그럼 인간들은 이길 수 있고?”
“그것도 불가능에 가깝지. 하지만 조각만 한 가능성 정도는 있다고 봐.”
그에 나이드라 불린 금발의 소녀가 두 소녀에게 비웃음을 던진다.
“아, 그래? 그럼 너희 마음대로 해. 나는 내 마음대로 할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그녀가 홱 몸을 돌려 사라지자.
“하아… 쉽지 않네.”
푸른 머리의 소녀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다.
“그냥 놔둬. 멍청한 게 고집만 세 가지고.”
“나이드도 답답해서 그런 거겠지.”
‘흠…….’
씁쓸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두 소녀를 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베논이 고룡들을 싹 죽여서 복수를 하려고 이곳에 찾아왔던 건가?’
오리하르콘으로 만든 무기를 인간들에게 건네어.
베논을 죽이게 하는 게 아무래도 저들의 계획인 모양이었다.
‘뭐, 계획 자체는 나쁘지 않네.’
실제로 오리하르콘은 신들의 신, 아가멤논의 신체가 형상화된 것이니.
오리하르콘 무기로 베논에게 타격을 주겠다는 저들의 생각은 굉장히 그럴듯해 보였다.
‘근데 왜 하필 내가 채굴할 광산에서 저 난리야?’
어디 근처에 놈들의 레어라도 있었던 것일까.
‘음… 어쩔까.’
지금이라도 나서서 불청객들을 처리하는 게 맞긴 하겠으나.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나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아니면 어차피 내가 광산에 계속 있기는 힘드니까 놈들을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한데.’
약간의 보수를 주고 놈들을 광부로 부리며 오리하르콘을 채굴하게 하여.
나에게 보내게 하는 것도 썩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것도 괜찮아 보이네. 그럼… 일단 대화라도 시도해 볼까.’
마침내 내가 마음의 결정을 하고 슬그머니 모습을 보이자.
“…인간?”
“넌 뭐지? 분명히 이곳에 들어오지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아무래도 네가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두 소녀는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며 나를 노려봤다.
“일단 진정들 하지.”
“…뭐? 인간 따위가 감히…….”
붉은 머리 소녀의 얼굴에 분노가 어리어 가던 중.
“레티, 잠깐 진정해. 저 인간… 뭔가 이상해.”
푸른 머리의 소녀가 얼른 그녀를 제지한다.
“그냥 인간일 뿐이잖아. 뭐가 이상하다는 건데.”
“뭔가… 뭔가 느낌이 안 좋아. 꼭…….”
갑자기 푸른 머리의 소녀가 몸을 흠칫하더니.
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당신… 인간이 아니군요.”
‘호오… 붉은 쪽보다 제법 눈치가 빠르네.’
“적어도 아직까지는 인간이지.”
“그 말은…….”
두 소녀의 얼굴에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했고.
스슥-
삽시간에 무기를 쥔 채 나를 노려보는 소녀들.
“마신이 시켰나요?”
“…마신?”
‘뭐, 설마 내가 베논이 보내서 온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마신과 연관이 없다고는 못 하겠지만 오늘 이곳에 온 건 다른 이유 때문이다.”
“…다른 이유 때문이라고요?”
“그래. 너희가 무단으로 침입한 이 광산의 소유권이 나한테 있거든.”
나의 말에 벙찐 표정으로 서로를 응시하는 소녀들.
“당분간 이 광산은 나의 소유물이 되었다. 그 와중에 너희가 무단으로 침입한 거고. 이제 상황이 이해가 됐나?”
“…그렇군요.”
“정말 마신의 종은 아니겠지?”
붉은 머리의 소녀가 좀처럼 의심을 풀지 않자.
나는 그녀를 보며 실소를 흘렸다.
“내가 베논의 종이었다면 진작 너희를 죽이려 들었겠지.”
“…혹시 신명을 들을 수 있을까요.”
푸른 머리 소녀의 물음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주신이다.”
“주신? 아…….”
“뭐야. 주신이면 얼마 전 갓 탄생한 신이잖아.”
레티라 불린 붉은 머리의 소녀가 헛웃음을 흘리자.
“레티, 그래도 상대는 신이야. 조심해야 돼.”
푸른 머리의 소녀가 그녀를 만류하곤 조심스럽게 입을 뗀다.
“먼저 당신의 광산에 무단으로 침입한 건 사죄할게요. 저희에게도 사정이 있었던지라…….”
“고룡들이 전멸한 건 이미 알고 있다.”
내가 엿들은 대화 내용을 슬며시 언급하자.
“역시… 알고 계셨네요.”
힘없는 미소를 짓는 푸른 머리의 소녀.
“이 광산이 당신의 소유지인 줄 알았다면 오지 않았을 거예요. 죄송해요.”
‘호오… 당연히 꺼지라고 소리칠 줄 알았는데, 의외네.’
내 정체를 알아서였을까.
소녀들은 의외로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였다.
“오늘 내로 이곳을 정리하고 자리를 비울게요.”
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지금처럼 채굴을 해도 상관없어.”
“정말인가요?”
“하일리, 조심해. 뭔가 우리한테 원하는 게 있으니까 저렇게 호의를 베푸는 걸 거야.”
붉은 머리의 소녀가 나를 노려보며 낮게 속삭였으나.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이어 갔다.
“단, 조건이 있다.”
“역시…….”
“조건이요?”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채굴을 하되 일정량의 오리하르콘을 나한테 보내라. 그게 조건이다.”
나의 말이 끝나자.
두 소녀는 작게 속삭이다가 대표로 푸른 머리의 소녀가 한 발 앞으로 걸어 나온다.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지금까지 너희가 채굴한 오리하르콘은 내가 전부 가져가겠다. 이 또한 동의하겠지?”
내가 쌓여 있는 오리하르콘을 가리키자.
두 소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게 하세요.”
“좋아. 그럼 당분간 광산의 운영은 너희에게 맡기지. 하지만 만약 너희가 약속을 어긴다면…….”
내가 지그시 그녀들을 응시하자.
하일리라 불린 소녀가 황급히 고개를 젓는다.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선조들께서 지어 주신 저희의 이름을 걸고 약속은 반드시 이행할 거니까요.”
“좋다. 믿어 보지.”
나는 두 소녀의 손을 한 번씩 잡고 악수를 하며 생각했다.
‘안 그래도 오리하르콘 광산에 계속 머물 수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이제 굳이 내가 광산을 방문하지 않더라도.
저 어린 드래곤들이 알아서 내게 오리하르콘을 가져다 바칠 터.
‘개꿀인데?’
* * *
그날 밤.
나는 광산을 나가 인적 없는 숲으로 들어갔다.
촤르르르륵-
그러곤 아공간 주머니에서 가죽 주머니들을 꺼내어 풀자.
바닥에 오리하르콘이 우르르 떨어진다.
‘크… 그렇게 구하기 어려웠던 오리하르콘이 이렇게 많다니.’
이만한 양을 흡수한다면 어떻게 될지 나조차 감이 오질 않았다.
‘후우… 좋아. 일단은 흡수를 해 볼까.’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곤.
오리하르콘 더미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