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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56화 (156/200)

◈ 156화

불신이 그들의 사이에 팽배해진 탓일까.

두 신이 서로를 죽일 듯 노려보던 그때.

척-

베논이 먼저 대검을 거두어들인다.

[이번만 넘어가도록 하겠다. 하나 다음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면…….]

[넘어가고 자시고, 일이나 잘 처리하지 그래요? 아가멤논의 후계자를 찾으려면 인간들을 싹 다 죽여야 하는데, 지금 페이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았죠? 일은 그딴 식으로 처리하면서 날 의심한 건가요? 오히려 내가 당신을 의심해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러나 베논은 그녀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곤.

[이번만이다.]

데리고 온 군세를 끌고 균열 사이로 사라졌다.

그러자.

[하여간 이 도마뱀 새끼들도 참, 입이 더럽게 가볍네.]

레바논은 베논이 있었던 자리를 응시하며 혀를 찼고.

옆에서 그녀의 시중을 들던 천사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그러게 말이에요. 그래도 베논의 몸에 난 흔적들을 보셨나요? 고룡들이 조금은 놈한테 피해를 입힌 것 같던데요.]

[도마뱀 새끼들이 피해를 입혀 봐야 얼마나 입혔을까. 그래도 놈들한테 개입해서 그만한 대가를 받은 거지.]

레바논의 대답에 천사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럼 방금이 베논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 아닌가요?]

[놈이 아무 생각도 없이 이곳까지 찾아왔을 것 같아? 그만한 부상을 안고도 나와 싸울 수 있다고 판단했으니 온 거지.]

[그럼 아직 때가 아니라는 말씀이신 건가요?]

천사의 물음에 레바논은 이마를 찌푸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놈이 나서기 어려울 정도로 타격을 입었을 때, 놈을 소멸해야지. 그 전까지는 방심해선 안 돼. 일단 놈이 운신하기 어려울 정도로 좀 더 타격을 입혀야겠다.]

[좋은 방법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그에 픽 실소를 흘리는 레바논.

[불신을 더 키워야지. 정령신들을 이용해서 놈의 하수인들에게 타격을 입힌다면, 이번처럼 눈깔이 뒤집혀서 정령신들을 찾아가겠지.]

[하지만… 과연 그들이 움직일까요?]

[그러니 불신을 키워야 하겠다만 일단 지금은 굳이 내가 나설 필요는 없어 보이는구나.]

레바논은 그 말을 끝으로 슬며시 고개를 들어 세계를 오시했고.

그녀의 시선 끝에는 비취 숲에 서식 중인 드루이드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만약 드루이드들이 흑마법사들에게 대량으로 몰살한다면 정령신들도 나설 수밖에 없겠지.]

* * *

5일 뒤.

“제1 악마 병단 모든 출정 준비를 끝마쳤습니다!”

“제2 병단도 마찬가지입니다!”

“2주 정도면 모든 스켈레톤의 수리를 끝마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비를 끝마친 각 병단에서 출전 준비가 완료됐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나는 레논을 비롯하여 휘하 흑마법사들과 함께 회의를 시작했다.

“다음은 도미닉 왕국이군.”

“그렇습니다.”

이미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도미닉으로 결정 난 상태였는데.

여전히 내전을 벌이고 있는 레바논을 건들 필요가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만약 도미닉까지 정복한다면 대륙의 대부분을 우리가 차지하게 되겠군요.”

레논이 조금 고양된 목소리로 말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복만 안 했을 뿐이지 페른과 크라켄 왕국도 우리 편이니 그렇게 봐도 무관할 겁니다.”

내 대답에 레논은 물끄러미 지도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 변방의 악마 취급이나 받던 우리에게 이런 날이 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입니다. 도미닉은 페이트와는 상황이 다를 겁니다. 페이트가 무너지는 걸 지켜봤으니 철저히 대비를 했을 겁니다.”

“아마 그렇겠지요. 그러니 더 사력을 다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잠시 레논과의 이야기를 중단하곤 힐끔 지도를 응시했다.

“도미닉까지는 흠… 한 달 정도 이동하면 도착하겠군요.”

“다만… 우려되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레논의 대답에 나는 의문을 표했다.

“행군을 하는 것뿐이잖습니까?”

“도미닉 왕국에 가기 위해선 이곳, 비취 숲을 지나야만 합니다. 하나 그곳은 드루이드들의 영역입니다.”

“흠…….”

‘설마 우리 지나가는 데에 꼬장을 부리려나?’

물론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비취 숲을 점령하려는 줄 알고 사력을 다해 우리를 저지하려 할지도 모른다.

“드루이드의 수가 몇이나 되는지 대략적으로 아십니까?”

“암살자들의 말에 의하면 대략 1만 정도라고 합니다.”

“1만이라…….”

‘1만 드루이드면… 조금 부담될 수도 있겠는데.’

드루이드들과 정면으로 맞붙는다면야 우리의 승리를 확신하겠으나.

놈들이 비취 숲을 무대로 난리를 친다면 피해가 얼마나 나올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럼 비취 숲을 돌아서 가면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약 두 달 정도 걸릴 것으로 판단됩니다.”

“한 달은 더 늦군요.”

‘진군은 빠를수록 좋긴 한데…….’

나는 고민에 잠겨 있다가 입을 뗐다.

“그럼 일단 드루이드들에게 길을 내줄 걸 요구해 보죠.”

“만약 놈들이 거부한다면 어쩌실 생각입니까?”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긴 한데…….’

현실적으로 봤을 땐 돌아가는 편이 맞았으나.

그랬다간 수십만의 언데드 군세가 겨우 1만의 드루이드에게 겁을 집어먹었다는 소문이 돌지도 모른다.

‘그러면 흑마법사들의 사기에도 영향이 갈 테고… 씁…….’

“그땐… 싸우는 수밖에 없겠지요.”

마침내 내가 결단을 내리던 그때.

[흑남은 들어라.]

돌연 베논의 음성이 나의 머릿속에 뚜렷이 울려왔다.

‘갑자기 베논이 왜……. 근데 뭐지? 뭔가 평소보다 목소리에 맥이 없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말씀하시지요.]

[도미닉 왕국을 침공하기 전에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게 뭡니까?]

나의 물음이 끝나자.

다시금 베논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페른, 페이트 그리고 크라켄 왕국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죽인 뒤, 전쟁을 이어 가라.]

‘…뭐라고?’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다. 너희가 정복한 땅에 서식하고 있는 모든 생명체를 죽여라.]

[그건…….]

‘씁…….’

[하나, 말씀하신 명령을 수행하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모됩니다. 또한 그리하면 지금은 잠잠하던 정복지의 백성들이 무기를 들고 일어날 것입니다. 그럼 저희가 입을 피해가 엄청날 것이고 심지어 패배할 가능성도…….]

내가 나지막이 반론을 펼치던 중.

분노한 베논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내 말에 거역하려는 것이냐!]

[그게 아니라…….]

[너희는 그저 나의 명령을 따르면 된다. 오늘 이후로 나는 당분간 휴식을 취할 것이다. 그러니 네가 맡은 사명을 충실히 이행하여라.]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베논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고.

나는 어이가 없어 실소를 흘렸다.

‘아니, 이 새끼가. 진짜 미친 것 아냐?’

세 왕국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를 죽이라니?

애당초 그게 가능하긴 한 일이란 말인가.

‘심지어 그랬다간 오히려 세 왕국이 합심해서 우리를 칠 수도 있는데? 거기다가 만약 다른 왕국들이 그 모습을 보고 지원이라도 하게 된다면…….’

흑마법사들의 패배는 당연하거니와.

다시는 일어나기 어려울 정도로 몰락하게 될 것이었다.

‘진짜 어이가 없네.’

“…무슨 고민거리가 있으신 겁니까?”

내 표정을 본 레논이 조심스레 물어 오자.

‘음… 이걸 말해야 되나. 그래, 레논도 이 이야기를 들으면 상식 밖의 일이라며 혀를 찰 사람이니까.’

나는 고심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베논에게서 신탁이 내려왔습니다.”

“오오, 그렇습니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페이트, 페른 그리고 크라켄 왕국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죽인 뒤에 도미닉으로 진군하라고 하시더군요.”

나의 대답에 망치에 맞은 듯 레논의 표정이 멍해졌다.

“…예? 하하… 농담이 조금 과하신…….”

“차라리 저도 농담이었으면 좋겠군요.”

“…….”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느낀 건지.

레논의 표정 또한 딱딱하게 굳어 갔다.

“베논께선 어째서 그런 신탁을 내리신 건지…….”

“그러게 말입니다. 일단 도미닉 왕국으로 진군하는 건 잠시 미뤄야 할 것 같네요.”

내가 이맛살을 찌푸리는 사이.

레논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해 온다.

“아무리 신탁이라고는 하나… 신탁대로 했다간 세 왕국의 빈축을 사게 될 겁니다.”

“저도 그래서 고민입니다.”

‘슬슬 두 신을 손절해야 할 시점인가.’

전에 비해 신도들도 많이 늘렸고 힘을 키우긴 했으나.

아직 두 신을 동시에 상대할 자신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신들이 얼마나 강한지 가늠이 되질 않으니. 아오, 하다못해 페이트 왕국에서 신자들이 대량으로 늘어나면 또 모르겠는데 그것도 시간이 필요하단 말이지.’

두 신이 세계의 멸망을 원하는 이상.

언제고 이런 명령을 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 시기가 너무도 빨랐다.

‘신탁을 무시해야 되나……. 아니면 일단 신탁을 따르는 척을 해야 할까.’

나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슬며시 레논을 응시했다.

“부탑주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굳이 다른 왕국의 백성들을 죽일 필요까진 없다고 봅니다. 대학살은 분란과 공포를 불러올 것이고, 나아가 우리에게 큰 변수가 될 테니까요.”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만, 그리하면 신탁을 거스르는 꼴이 되고 말겠지요.”

신탁을 거스른다.

이는 곧 베논의 뜻을 저버리는 것이었고.

흑마법사들 사이에서 이 사실이 퍼져 나가기라도 한다면 나와 레논은 심문을 당할 수도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잠깐… 분명 아까 전에 베논이 뭐라고 했었지? 휴식을 취하러 간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그 말인즉슨 당분간은 베논이 전장에서 눈길을 뗀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바알의 힘을 쓴다고 해도 내가 전장에서 사라진 걸 알게 되면, 일이 귀찮아질까 봐 자제하고 있었는데. 가만있자… 그러면… 페른으로 가야겠어.’

과거, 페른을 도와주고 얻어 냈던 오리하르콘 광산 채굴권.

나는 그걸 받아 낼 생각이었다.

‘일단 광산에서 오리하르콘을 대량으로 흡수한다면 두 신과도 붙어 볼 만하지 않을까?’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긴 했어도.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베논이 쉬는 사이에 얼른 갔다가 돌아오면 괜찮겠지.’

나는 물끄러미 레논을 보며 입을 열었다.

“스켈레톤의 수리가 2주 정도 걸린다고 했었죠?”

“예? 아, 예.”

“그러면 일단 신탁을 이행하건 말건 2주 정도는 우리에게 여유가 있다는 거군요.”

나의 말에 레논의 얼굴에 물음표가 걸린다.

“그야 그렇습니다만…….”

“그럼 잠시간 자리를 비워야겠습니다.”

“가실 곳이 있으신 겁니까?”

페른 왕국으로 간다고 정직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인적이 드문 산속에 들어가 베논께 기도를 올리려 합니다. 혹시 모르잖습니까? 간곡히 애원하고 또 요청을 드리면 베논께서 그 뜻을 바꿔 주실지도요.”

“아아… 이해했습니다.”

“그러니 당분간 병력의 운용은 부탑주님께 맡기겠습니다.”

내 말에 레논이 팔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가볍게 쳐 보인다.

“맡겨만 주시지요.”

* * *

일주일 뒤.

본 와이번과 여러 포털들을 이용하여 나는 페른 왕국에 도착했고.

페른의 국왕인 안드레이아 3세를 대면할 수 있었다.

“허허, 오랜만에 귀한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전과 달리 안색이 밝아 보이는 안드레이아 3세가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국왕도 전보다 밝아 보이는군.”

“연합군이 물러간 뒤론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요.”

안드레이아 3세가 허허 웃으며 찻잔을 든다.

“한데 우리 페른에는 어쩐 일로 방문을 하신 겁니까? 제가 알기로 지금 흑남께선 전쟁 중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약속했던 걸 받기 위해 왔다.”

“약속이라 하심은… 아아.”

나지막이 탄성을 터뜨리는 안드레이아 3세.

“그래. 오리하르콘 광산을 채굴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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