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엘런의 뜬금없는 소리에 여왕은 지그시 그를 바라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만약 여왕께서 전심을 다해 주신을 섬기신다면, 그분께선 반드시 우리를 부흥의 길로 인도하실 겁니다!”
늙은 신하의 간곡한 호소에 나밀라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보다가 픽 실소를 흘린다.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그런 잡신을 찾을 정도인 걸 보니, 페이트가 진정 몰락하긴 한 모양이로구나.”
“여왕이시여! 제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습니다! 심지어 저는 직접 주신을 만나기까지 했습니다!”
“신을… 직접 만났다고?”
다행히 여왕이 관심을 보이는 듯하자.
엘런 백작은 간곡히 호소를 이어 나갔다.
“그렇습니다! 주신께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환란의 시기를 버티고 이겨 낸다면, 페이트 왕국이 다시금 부흥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아, 그래서 지금 나보고 그 신을 믿기라도 하라는 건가?”
비웃음을 던지며 말을 이어 가는 나밀라 여왕.
“레바논도, 그녀의 뜻을 따라 세워진 왕국도 우릴 저버린 판국에 아직도 내게 신을 믿으라는 것이냐?”
“하지만…….”
“엘런, 페이트를 되살리고 싶은 네 마음은 잘 알았다. 하지만 더 이상의 잡설은 듣고 싶지 않구나. 신을 믿는다고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여왕이 더 이상의 반론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딱 잘라 말하자.
엘런은 감히 더 권유하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려 보였다.
* * *
그날 밤.
“크흠… 아무래도 여왕께서 레바논에게 큰 배신감을 느끼셔서 그런지, 좀처럼 제 말을 믿지 않으시더군요.”
나를 찾아 별관으로 온 엘런 백작이 낮에 있었던 일을 푸념하듯 내게 말해 주었다.
“흠… 그럴 만도 해. 확실히 그녀 입장에선 레바논이 그녀를 배신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말이야.”
“그래도 계속 여왕님을 설득해 보겠습니다. 그녀 또한 주신님을 만나고 나면 분명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음… 글쎄… 그건 잘 모르겠는데.”
어떠한 계기가 있지 않고서야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렇기에 내가 주신으로서 그녀에게 간다고 해도 여왕은 바뀌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뭐, 그래도 일단 열심히 포교하겠다는데 말릴 필요는 없겠지.’
“그래도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설득해 봐. 나는 나대로 방법을 강구해 보지.”
“알겠습니다.”
엘런이 자리를 떠난 뒤 나는 깊은 고민에 잠겼다.
‘뭐, 엘런이 설득한다고 해도 쉽게 넘어오지 않을 거라 예상은 했어.’
아무리 열심히 설득한다 해도 설득을 당하는 당사자가 안 들어 먹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일단 설득이 먹힐 만한 상황을 이쪽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건데…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나는 한참을 멍하니 허공만 응시하다가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이번에 검은 대지에서 추가 병력을 파병하는 걸 이용하면 어떨까. 어차피 그 정보를 아는 사람은 나랑 부탑주밖에 없으니 잘만 하면 괜찮을 것도 같은데.’
* * *
이틀 뒤.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화원에서 흑남과 이야기를 나누던 나밀라 여왕이 당황하여 언성을 높였다.
“들은 그대로야. 페이트의 백성들을 차출해서 우리의 병사로 사용하겠다.”
흑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발끈한 여왕이 소리친다.
“약속과 다르지 않습니까! 분명 백성들은 건들지 않기로 한 게 아니었나요?!”
“이봐, 나밀라 여왕.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넌 페이트 지부의 지부장일 뿐이야. 그 말인즉슨 검은 대지에서 내려온 명령은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거다.”
“…….”
피식 웃는 흑남을 그저 노려만 볼 뿐, 차마 반박하지 못하는 나밀라 여왕.
흑남은 그런 그녀를 보며 무심히 말을 이어 갔다.
“세 달을 주지. 그 안에 페이트의 백성들을 모아다가 최소한 검 정도는 휘두를 수 있을 정도로 훈련시켜라. 알겠나?”
흑남이 일방적인 선언을 끝내고 자리를 뜨자.
“아아… 아아아아아…….”
여왕은 다리에서 힘이 풀린 것인지 그만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내가… 내가 어리석었구나……. 놈들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분명 항복을 하면 왕가의 권리와 백성들의 목숨을 보장해 준다 했건만.
고작 몇 달도 안 지난 시점에서 약속을 파기하려 들 줄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차라리 끝까지 싸웠을 텐데……. 아아아아아…….”
하나 어쩌겠는가?
이미 그녀는 저들의 하수인이자 허수아비에 불과할 뿐이었다.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어째서 페이트에 이런 시련을 내리시는 겁니까……. 어째서!”
나밀라가 비탄에 젖어 하늘을 보며 탄식하던 그때.
“여왕이시여.”
슬며시 나타난 엘런 백작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지금은 너라고 해도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 물러나거라.”
조금 전의 일로 심기가 굉장히 불편해진 탓일까.
여왕의 목소리는 까칠하기 짝이 없었다.
하나 여왕의 축객령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떼는 엘런 백작.
“여왕이시여, 제가 하는 모든 말이 헛소리처럼 들릴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분명 지금 이 말 또한 헛소리라 치부하시겠지요. 하나 방금 전, 주신께서 제게 말을 걸어오셨습니다.”
“아… 그런가. 그놈의 주신이 도대체 뭐라고 했지?”
대꾸할 여력조차 없었던 걸까.
힘없이 대답하는 여왕을 보며 엘런은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주신께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흑마법사들이 우리 백성들을 병사로 차출할 것이라고 말이지요.”
“…….”
오직 흑남과 그녀만이 알고 있었던 사안을 엘런이 거론하자.
여왕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그래서… 그 뒤에는 또 뭐라고 했지?”
“주신께선 백성들을 구할 방도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게 뭐라고 하시더냐!”
여왕이 화급히 묻자.
엘런은 속삭이듯 낮게 말했다.
“여왕께서 주신을 전심으로 섬기고 따르신다면 일은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고 제게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뭐라고?”
“또한 여왕께서 일주일간 금식하시며 간절히 기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엘런의 말이 끝나자.
여왕은 한참을 갈등하다가 손을 휘적거렸다.
“…알겠다. 일단 물러나거라.”
“알겠습니다.”
엘런 백작이 자리를 뜨자.
여왕은 화원에 핀 꽃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주신을 전심으로 따르라고?’
솔직히 같잖은 소리라고밖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더욱이, 그녀가 레바논을 진심으로 따랐으나 결과는 어땠던가?
그들이 흑마법사들에게 항복을 하는 그 순간까지 지원군은커녕 그 어떤 위로의 한 마디조차 없었지 않았던가?
‘하지만… 주신은 다를까?’
주신은 레바논처럼 그녀의 기도를 저버리지 않고 정말 응답해 주는 것일까?
“하…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하나 지금 금식과 기도 이외에 달리 방법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좋다. 백성들을 살리고 페이트를 유지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하겠다.’
솔직히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화원 밖을 향해 소리쳤다.
“밖에 누구 없느냐!”
“예, 여왕님!”
“오늘부터 일주일간 금식에 들어가겠다. 그러니 일주일간 그 어떤 방문객도 들이지 말거라. 알았느냐!”
* * *
나밀라 여왕이 금식하며 기도로 나날을 보낸 지 어느덧 일주일이 지났다.
“여, 여왕이시여!”
전과 달리 눈에 띄게 수척해진 여왕이 알현실에 모습을 드러내자.
그녀의 외관을 본 귀족들은 바닥에 엎드린 채 오열하듯 소리쳤다.
하나 여왕은 그런 그들에게 한마디를 던질 뿐이었다.
“흑남 측에서 별말은 없었느냐.”
“…예? 예. 일주일간 아무 말 없이 조용했습니다!”
한 귀족의 대답에 여왕의 입가에 힘없는 미소가 스쳐 간다.
‘일주일간 간절히 부르짖고 또 부르짖었건만…….’
기도만으로 모든 악재가 해결될 리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실낱같은 희망에 걸어 보고 싶었으나.
역시 실낱은 실낱일 뿐 달라진 건 없었다.
‘결국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여왕이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던 그때.
벌컥-
돌현 알현실로 검은 로브를 차려입은 젊은 남자가 들어온다.
“흑남…….”
“이제 독대가 가능하다고 해서 찾아왔다.”
“무슨 일이죠?”
힘없이 묻는 나밀라 여왕을 보며 흑남이 무심히 대답한다.
“예정이 좀 바뀌었다.”
“예정이… 바뀌었다고요?”
그에 흑남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검은 대지에서 추가로 병력을 보내 준다더군. 따라서 페이트의 백성을 차출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 그 말은…….”
“전에 말했던 차출 건은 취소하지.”
“아아…….”
흑남의 말이 끝나자 나밀라 여왕은 고개를 푹 떨군 채 몸을 떨었다.
“왜 그러지?”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하튼 일이 그렇게 됐으니 혹여나 소집한 백성들이 있다면 돌려보내도록.”
그 말을 끝으로 흑남이 알현실을 나서자.
여왕은 두 손으로 야윈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아아… 주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엘런의 말이 사실이었다.
일주일간 금식하며 올린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졌다.
‘주신님… 앞으로 전 당신만을 바라보며 믿고 또 섬기겠나이다.’
* * *
한편, 같은 시각.
‘잘됐네.’
그녀의 기도 소리가 나의 머릿속을 맴돌자.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여왕이 나의 신도가 됐으니 페이트에도 점진적으로 내 신도들이 늘어나겠지.’
물론 당장은 흑마법사들의 눈치가 보이니.
여왕이 마음 놓고 포교 활동을 하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왕국으로 이동하면, 분위기도 느슨해질 테니까 그때 여왕에게 은밀히 포교 활동을 하라고 해야겠어.’
그리하면 신도는 급속도로 늘어날 것이고.
이는 곧 나의 힘 증가로 이어지게 될 터였다.
‘근데 그건 그렇고, 어째 레바논이랑 베논은 생각보다 잠잠하네.’
페이트를 점령했으니 뭔가 반응이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어째서인지 두 신에게서는 그 어떠한 말도 없었다.
‘설마 두 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그런 거면 좋겠는데.’
* * *
같은 시각, 천계.
[슬슬 반응이 올 때가 됐는데.]
레바논이 편히 누운 채로 세계를 내려다보고 있던 그때.
쩌저저저저적-
갑자기 천계 곳곳에 균열이 생기더니.
[레바논…….]
악마 군세와 함께 베논이 나타나 그녀를 죽일 듯 노려봤다.
[어머,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봐요? 꼴이 말이 아니시네요.]
레바논이 베논의 몸 곳곳에 난 균열을 보며 묻자.
베논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정말 몰라서 하는 소리인가?]
[정말 몰라서 물은 건데요?]
레바논이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베논이 비웃음을 흘리며 소리쳤다.
[메테오를 사용한 놈을 찾아냈다.]
[어머, 그래요? 잘됐네요! 어떤 놈이었나요?]
[고룡, 하이랜더의 소행이었다.]
베논의 대답에 레바논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다.
[그럼 그 몸의 흔적들은……. 당신… 설마 고룡에게 개입한 건가요?]
[하이랜더뿐만이 아니라 모든 고룡을 찾아내어 소멸했지.]
베논의 말에 레바논은 짐짓 놀란 듯 묻는다.
[무모함도 정도가 있지, 미친 건가요? 고룡 한 마리에게 개입하는 것도 부담이 클 텐데, 모든 고룡을 죽였다고요?]
[대답을 하지 않으면 죽여야지. 그런데 말이야. 내가 하이랜더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아나?]
[뭐라던가요?]
베논이 부릅뜬 눈으로 레바논을 노려보며 나지막이 말한다.
[네년의 명령을 받고 메테오를 썼다더군.]
[…내가 시켰다고 했다고요? 하…….]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픽 실소하는 레바논.
[그래서, 그 개소리를 믿고 병력을 끌고 찾아온 건가요?]
[그럼 아니라는 건가?]
[이미 당신과 손을 잡았는데 내가 왜 그런 짓거리를 하겠어요? 심지어 아직 아가멤논의 후계자도 못 찾았는데 내가 그런 작당을 할 것 같아요?]
의심을 받은 탓일까.
레바논도 언성을 높였으나 베논은 아랑곳 않고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
[이번 한 번은 넘어가겠다. 하나 만약 또 비슷한 일이 생긴다면 그땐 아가멤논의 후계자를 소멸하기 전에 네년부터 소멸하겠다. 이해했나?]
[하아… 정말 어이가 없네요. 아니면 그냥 지금 붙든가요. 근데… 감당할 수 있겠어요? 그 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