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53화 (153/200)

◈ 153화

노신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여왕의 얼굴에 차가운 서리가 맺혀 갔다.

“나보고… 흑마법사들의 주구와 결혼을 하라고?”

“저 미친 늙은이가 감히……! 여왕이시여! 당장 엘런 백작의 목을 치십시오!”

“그렇습니다! 나라의 안위를 위해 사투를 벌일 생각을 해도 모자랄 판국에 그는 여왕님을 팔아먹을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목을 치셔야 합니다!”

기사들과 일부 귀족들이 득달같이 일어나 사형을 외쳤으나.

늙은 신하는 꿋꿋이 말을 이어 갔다.

“지금 놈들은 알게 모르게 그 세력을 넓혀 나가고 있습니다. 이미 페른은 놈들의 속국이나 다름이 없으며, 이번에 놈들이 크라켄 왕국의 국경을 통해 넘어온 걸 봐선 크라켄 왕국 또한 놈들의 편에 붙었다고 봐야 합니다.”

“…….”

“대륙의 기세가 점점 저들에게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선택이 더 현명한 판단인지는 여왕께서 결정하셔야만 합니다!”

십 년은 늙은 것 같은 여왕이 한참을 이마만 매만지다 천천히 입을 뗀다.

“메테오를 사용했던 대마법사는 아직도 찾지 못한 것이냐?”

“수소문을 하고 있긴 합니다만 워낙 정보가 적은지라…….”

“후우…….”

유일한 희망에 가까웠던 대마법사는 신기루였던 건지.

기적 같았던 그날 이후로 그에 대한 어떠한 소식도 들려오질 않았다.

“그날은 꿈과 같은 날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꿈에서 깨어 눈앞의 현실을 마주하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라고 사료됩니다!”

“꿈, 꿈이라……. 이 모든 상황도 꿈이었다면 가볍게 잠자리를 털고 있어났으면 됐겠지.”

허공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나밀라 여왕이 힘없는 미소를 흘린다.

“제임스, 만약 항전한다면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 거라 보나?”

“이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항전을…….”

“나는 현실적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묻고 있는 거다. 저들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지?”

여왕의 질문에 이름이 불린 기사가 눈을 질끈 감는다.

“그것이… 지원군이 없다면 길어야 한 달 정도라 생각됩니다.”

“아직도 도미닉과 레바논에선 답신이 오지 않은 것이냐?”

“소, 송구합니다!”

여왕의 눈길을 받은 신하가 머리를 바닥에 처박자.

나밀라 여왕의 눈빛은 점점 고요해져 갔다.

“원군은 없는 모양이로구나.”

“하, 하나 사력을 다해 왕성을 지킨다면 필시 전국 각지에서 병사들이…….”

“그만. 그만하면 됐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밀라 여왕.

“여, 여왕이시여…….”

“죽은 병사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살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여왕이시여…….”

왕궁이 침통한 분위기로 가득해지는 가운데.

나밀라 여왕이 힘겹게 입을 연다.

“나설 채비를 갖추어라. 내가 직접 놈들을 만나러 나가겠다.”

* * *

몇 시간 뒤.

‘뭐야.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은데.’

나는 눈앞의 버팔린성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병사들이 사력을 다해 수성에 임했다면.

지금은 뭔가 분위기가 축 가라앉은 것 같았다.

‘성안에서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건가?’

내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던 그때.

슥, 슥, 슥-

갑자기 성벽 위로 백기가 하나둘 올라오는 것 아닌가?

‘저건……. 설마 진짜로 항복하려고? 함정은 아니겠지?’

버팔린성은 저들에게 있어 최후의 저지선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당연히 항전을 불사할 줄 알았건만.

‘진짜 함정인 것 아냐?’

내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백기를 응시하던 중.

그그그그긍-

반쯤 박살 나고 찌그러진 버팔린성의 철문이 천천히 지면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저건…….’

그리고 그 안에서 새하얀 의복을 차려입은 일단의 무리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오오… 아무래도 우리의 권고가 통한 모양입니다!”

옆에 있던 레논이 감탄사를 터뜨리자.

나는 그를 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런 모양입니다. 최대한 예우를 다해 저들을 맞이해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레논이 허겁지겁 전방으로 달려간 지 몇십 분이나 지났을까.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진 나밀라 여왕이 기사의 부축을 받아 말에서 내린다.

“…….”

나와 그녀가 서로의 눈만 바라보며 말이 없던 중.

나밀라 여왕이 떨리는 입술을 천천히 뗀다.

“페이트 왕국의 나밀라가 흑탑의 위대하신 흑남님을 뵙습니다. 저희 페이트는…….”

여왕은 한참이고 말을 잇지 못하다가 천천히 바닥에 무릎을 꿇는다.

“저희 페이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흑탑에 항복하려 합니다.”

“크흑…….”

“여왕이시여…….”

여왕의 뒤로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드디어 페이트 정복 전쟁이 끝난 건가.’

여왕의 항복.

이는 명실상부 전쟁이 끝났음을 알리는 보증수표나 마찬가지였기에.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여왕에게 다가갔다.

“바닥이 차가우니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지.”

나는 몸소 그녀를 일으켜 세우곤 그녀를 보며 말했다.

“너희의 현명한 판단으로 페이트 왕국은 그 명맥을 온전히 이어 나갈 수 있을 거다.”

“약속을 지켜 주시는 건가요?”

여왕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물론이지. 지도에서 지워지는 건 페이트 왕국이라는 이름뿐, 나밀라 여왕은 페이트 지부의 총 지부장이 될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지부를 통치해라.”

나의 말이 끝나자 나밀라 여왕의 측근 중 일부가 안도의 숨을 내쉰다.

‘뭐, 내뱉은 말은 지켜야지. 그리고 일단은 여왕을 놔두는 게 여러모로 통치하기에도 편할 테니까.’

만약 내가 이 자리에서 여왕과 그녀의 측근들을 쳐 낸다면.

필시 여왕의 뜻을 잇겠다며 페이트 왕국 곳곳에서 반란의 불씨가 피어오를 것이었다.

‘불길을 다 진압할 수 있겠지만 그러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 오히려 이 편이 나아.’

하지만 이쪽에서 여왕의 자리와 권리를 건들지 않고 놔둔다면.

반란도 적을 것이고, 무엇보다 다른 왕국에서 이 상황을 보고 항복을 고려하게 될 터였다.

“약속을 지켜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나밀라 여왕이 다시금 무릎을 꿇어 보이자.

나는 그런 그녀를 일으키며 미소 지었다.

“오히려 나야말로 현명한 판단을 내려 고맙다고 말하고 싶군. 그보다, 바람이 찬데 일단은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어.”

나와 레논이 군세를 이끌고 버팔린성 안으로 들어간 이날.

페이트 왕국의 이름은 대륙의 지도에서 지워지게 됐다.

* * *

이 주 뒤.

한 가지 소문이 대륙 전역을 강타했다.

“들었나? 페이트 왕국이 몰락했다더군. 이제 페이트 왕국은 사라졌고, 페이트 지부라고 부르라던데?”

“들었네. 흑마법사들이 페이트를 아주 난장판으로 만들었다던데. 정말일까?”

“내가 듣자 하니 잡은 포로들을 모두 노예로 삼아 검은 대지로 데려갔다더군.”

술집을 비롯하여 거리 어디서나 페이트 왕국의 몰락을 두고 시끌벅적했다.

“허 참… 말세로군, 말세야. 그런데, 흑마법사들이 저리 날뛰는데 대륙의 수호자라는 놈들은 대관절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뭘 하긴? 페른 정복 전쟁에서 패배하고 자기들끼리 이권 다툼을 하느라 아주 그냥 눈깔이 뒤집혔다던데.”

“레바논이 멀쩡해야 그나마 대륙의 미래도 밝을 터인데… 정말 말세인가 보군. 지금이라도 식량을 모아 둬야 하나?”

한숨을 내쉬며 술잔을 비우는 남자들.

“그런데 아무리 레바논이 지원해 주지 않았다고 해도 그렇지, 너무 빨리 무너진 것 아냐? 명색이 왕국인데?”

“이 사람 참……. 듣자 하니 이번에 페이트를 침공한 언데드들만 30만이 넘었다더군. 그만큼 버틴 게 용한 거지.”

“사, 삼십만? 어마어마하군.”

남자가 크게 놀라 혀를 내두르자.

맞은편에 있던 남자가 픽 실소를 흘린다.

“그래도 페이트도 저력이 있었던 게, 메테오를 사용했다던데.”

“…메테오를?! 아니, 페이트는 그런 대마법사를 데리고 있었으면서도 멸망했단 말인가? 계속 메테오를 사용했으면 흑마법사들을 저지할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예끼! 이 사람아! 마음먹은 대로 난발할 수 있으면 그게 대마법인가? 어쨌건 그래서 지금 그게 또 음유시인들 사이에서 큰 관심사가 됐네. 어째서 페이트는 그만한 대마법사를 보유하고도 멸망했는지 말일세.”

어디까지나 강 건너 집에 불이 난 탓일까.

남자는 심드렁하게 말을 이어 간다.

“그래도 또 희한한 게, 나라는 멸망했어도 그 명맥은 또 이어 간다고 하더군.”

“명맥을 이어 간다니? 그건 또 무슨 말인가?”

“흑마법사들이 나밀라 여왕을 죽이지 않고 그대로 페이트 지부의 지부장으로 임명을 했다고 하네.”

남자의 말에 맞은편에 있던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아니… 그럼 점령을 한 의미가 없는 것 아닌가?”

“오히려 영악한 거지. 계속 여왕을 앞으로 내세워 반란의 불씨를 사전에 제압하려고 한 걸 수도 있네. 거기다가 여왕이 계속 존재하는 이상, 페이트 왕국도 큰 불만을 갖기 힘들 거고 말이야.”

“허 참… 듣고 보니 일리가 있구만. 어떤 놈의 대가리에서 나온 건진 몰라도 참 영악하긴 하네 그려. 근데 페이트 왕국 다음은 설마… 우리 왕국은 아니겠지?”

“…설마?”

* * *

대륙에 소문이 퍼져 나가던 그 시각.

페이트 왕국의 수도, 버팔린 왕성에선.

“시체들을 모아라! 다음 달까진 출정할 수 있을 정도로 최대한 정비를 끝마쳐야만 한다!”

검은 대지에서 지원 나온 흑마법사들이 인부들을 독촉하며 미처 회수하지 못한 전장의 시체들을 회수해 나갔고.

‘음…….’

나는 그러한 광경을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

‘시체들을 다 끌어모아서 스켈레톤이랑 누더기 골렘을 만든다고 쳐도… 서부군이 잃은 병력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긴 하네.’

군세를 증강한다고 해도 1만에서 2만 남짓 정도가 더 보충될 뿐.

‘그래도 숫자가 적은 편은 아니지만… 다음 전쟁은 모르겠네.’

막말로 페이트 왕국이야 기습에 가까운 일격을 가한 덕에 단시간에 정복한 것이다.

그러니 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다른 왕국들은 더 철저히 방비를 할 터.

‘뭐, 일단 할 수 있는 걸 해야지.’

나는 점점 사라져 가는 시체들을 지켜보다가.

왕성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니까 다음 공격은 레바논으로 해야 된다는 거요! 만약 우리가 여기서 도미닉 왕국을 치면 놈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하지만 레바논을 쳤다가 뒤에서 도미닉이 공격을 해 오면 어쩔 겁니까?!”

내가 간부들이 임시 거처로 사용하고 있는 별장으로 들어서자.

보라카 부탑주와 레논 부탑주의 고성이 내 귓가를 쩌렁쩌렁하게 울려왔다.

“애당초 보라카 님이 군세를 많이 잃지 않으셨다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뭐라고?! 그건 천재지변이었네! 재앙이었다고! 오히려 내가 없었다면 그만큼 군세를 수습할 수 있었을 거라 보나?!”

‘어휴, 좀 쉬려고 했더니…….’

“두 분 다 일단 진정들 하시지요.”

“커흠…….”

“어차피 지금 우리에겐 재정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정비하는 동안 충분히 고민을 한다면 좋은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일단 우리에게 필요한 건 휴식입니다.”

나는 두 부탑주를 보며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두 분 다 잠시 머리를 식히실 겸 산책이라도 다녀오시죠.”

“후우… 그래야겠네. 고맙군.”

“그러지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두 부탑주가 서로를 흘겨본 뒤 자리를 뜨자.

‘하여간 늙은 양반들이 더 감정에 충실하다니까.’

나는 고개를 젓곤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어디 보자… 두 양반은 나갔고. 다음 전쟁까지 시간적 여유도 있는 것 같으니…….’

이제 어느 정도 본업에 충실해질 필요가 있었다.

‘나밀라 여왕에게 주신교를 국교로 지정하라고 하고 싶긴 한데… 그렇게 하면 분명 부탑주들이 날 의심할 거야.’

그리되면 내부에서부터 잡음이 생길 게 뻔할 터.

‘대놓고 말하지 않고 나밀라 여왕을 꼬드길 방법이 없나?’

솔직히 지금 페이트 왕국은 비어 있는 땅이라고 봐도 무관했다.

그러니 당연히 이 빈땅에 내가 먼저 침을 발라야 하지 않겠는가?

‘뭔가 좋은 방법이… 아, 그래! 간단한 방법이 있었잖아?’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무릎을 탁 쳤다.

‘나밀라 여왕을 내 신도로 만들면 간단하게 해결되는 것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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