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52화 (152/200)
  • ◈ 152화

    ‘…절반이나 죽었다고?’

    갓난아이가 병력을 운용한다고 해도 고작 몇 주 만에 병력의 반을 잃지는 않을 터인데.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어지간히 등신 짓을 하지 않고서야 그러기도 쉽지가 않았을 텐데… 진짜 어이가 없네.’

    심지어 서부군의 총사령관은 보라카 부탑주가 아니던가?

    ‘그 깐깐한 노인네가 그런 큰 실수를 했다는 게 이해가 안 되긴 하는데…….’

    전장에선 어떤 일이 벌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기에.

    나는 생각을 갈무리하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절반이나 죽은 이유는?”

    “그게… 믿기 어려운 이야깁니다만…….”

    한참을 머뭇거리던 전령이 힘겹게 이야기를 토해 낸다.

    “행군을 하던 군세 위로 갑자기… 거대한 운석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운석?”

    ‘이 새끼가 낮술을 처먹기라도 했나?’

    운석이 떨어져 군세의 반을 잃었다니.

    지금 그 사실을 나보고 믿으라고 하는 말인 걸까?

    “예… 물론 믿기 어렵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입니다!”

    “허…….”

    전령의 대답에 레논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어쩌면 백탑에서 메테오를 사용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만한 대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는 지금 실존하지 않는다고 회의에서 결론을 내리지 않았었습니까?”

    나의 물음에 레논 또한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저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이것 참… 뭐라고 할 말이 없군요.”

    “메테오라…….”

    10서클의 지고한 경지에 오른 대마법사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초대형 마법, 메테오.

    하나 현재 백탑에서 그만한 경지에 오른 인물은 없는 것으로 확인된 상황이었다.

    ‘만약 백탑의 마법사가 한 일이 아니라면… 설마 다른 존재가 개입한 건가?’

    그나마 가늠해 볼 수 있는 건.

    성세가 약한 여타 신들이거나 대륙에 몇 없다고 알려진 에이션트 드래곤 정도일 터.

    ‘그래. 최소한 그 정도 급은 돼야 이 상황이 말이 돼.’

    이 전쟁은 레바논과 베논의 주시하에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었다.

    한데 두 신의 이목을 피하고 대마법을 발현할 존재라면.

    신적 존재나 그에 준하는 힘을 가져 신들의 시선에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들뿐일 터.

    ‘이것 참… 변수가 크게 작용하긴 했네.’

    내가 작금의 상황이 어이가 없어 허허 웃던 중.

    레논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다.

    “이러면 페이트 왕국의 공략이 가능하겠습니까?”

    “공략은 가능할 겁니다. 다만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힘들어질 수도 있겠죠.”

    본래 페이트 왕국이 정비를 끝마치기 전에 수도를 점령하는 것이 당초의 계획이었으나.

    서부군의 군세가 급감한 지금, 과연 상황이 계획대로 흘러갈진 미지수였다.

    ‘병력 손실은 뼈아픈 일이긴 하지만 어쩌겠어?’

    그리고 박살 난 스켈레톤들과 죽은 흑마법사들에겐 미안한 말이겠으나.

    나는 이러한 상황도 아주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우리가 공격을 접고 다시 검은 대지로 돌아가게 되면, 두 신이 세웠던 대륙 멸망이라는 계획도 실패로 돌아가는 셈이니까.’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나의 사적인 생각일 뿐.

    나는 남부군 총사령관이라는 직책에 맞는 답안 또한 생각해야만 했다.

    “하나 서부군이 대패했다고 해도 아직 전력의 절반이 남아 있으니, 전투 자체는 속행해 나갈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레논을 보며 계속 말했다.

    “그러니 서부군은 더 이상 진격에 치중하기보단 페이트 서부군의 시선을 빼앗는 데 주력했으면 좋겠군요.”

    “그 말씀은…….”

    “페이트 침공을 우리 남부군만으로 끝내는 겁니다.”

    나의 말에 화들짝 놀라는 레논.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남부군이 큰 손실을 입은 건 아니니 전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확실히 그건 그렇습니다만…….”

    당초의 계획과 달리 상황이 너무도 뒤바뀐 탓일까.

    승리를 확신하던 레논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

    “너무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그에 난 씨익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가리켜 보였다.

    “위대하신 베논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 베논께선 당연히 우리에게 페이트 왕국을 선물로 넘겨주실 겁니다.”

    * * *

    한편, 같은 시각.

    [흑남이 저렇게 승리를 장담하는데 당신도 뭘 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메테오를 쓴 놈이라도 찾아내야죠.]

    허공에서 흑남을 내려다보던 레바논이 베논을 보며 심드렁하게 묻는다.

    [네년은 내가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누가 놀고 있다고 했나요? 좀 더 열심히 찾아보라는 거죠. 범인을 찾아야 단죄를 내리건 말건 하죠.]

    [그렇게 주둥이만 놀릴 건가?]

    베논이 눈을 부라렸음에도 레바논은 아랑곳 않고 어깨를 으쓱인다.

    [아무리 찾아도 단서가 안 보이는 걸 어떡하라고요?]

    [메테오를 쓸 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다. 놈들을 불러 모아 압박을 가하면 될 텐데?]

    [4대 정령신들이랑 레어에 처박혀있는 드래곤들을 찾는 게 쉬운 일이라면, 당신이 직접 해요. 시야에도 안 닿는 놈들을 어떻게 다 일일이 찾겠어요?]

    레바논이 강 건너 불구경하듯 대수롭지 않아 하자.

    베논의 얼굴에 서서히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건가?]

    [어머, 말은 똑바로 해야죠? 대륙의 힘을 약화시킨 것만으로 내 몫은 충분히 다했어요. 전쟁은 당신의 몫인데 그걸 왜 내 탓으로 돌리는 거죠?]

    [협동심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군.]

    베논이 비웃음을 던지며 싸늘하게 말하자.

    레논은 별꼴이라는 듯 그를 보며 말했다.

    [그만큼 도와줬으면 됐지 뭐 얼마나 더 도와 달라는 거죠?]

    […됐다. 네년의 도움은 필요 없다. 나 혼자 하지.]

    그 말을 끝으로 베논이 자리에서 사라지자.

    [메테오는 시작일 뿐이야.]

    물끄러미 허공을 바라보던 레바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 * *

    두 달 뒤.

    “빨리 돌을 실어라!”

    “성벽을 파괴해라!”

    우리는 다섯 개의 성을 무너뜨리고 눈앞에 있는 페이트의 심장부이자 수도를 공격 중이었다.

    ‘확실히 수도라서 그런가. 쉽사리 안 무너지네.’

    벌써 이곳에서 잃은 스켈레톤의 숫자만 3만이 넘어갔다.

    물론 사체 수급으로 스클레톤을 보충할 수 있다고는 해도 시간이 걸린다.

    ‘수도를 점령해야 점령전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텐데.’

    나는 고개를 들어 전방을 응시했다.

    콰과과과광-

    예전에는 화려했었으나 이제는 곳곳이 반파되어 흉측해진 성벽으로.

    무수히 많은 검은 구체들이 쏘아져 갔다.

    “사다리를 쳐 내라!”

    “놈들이 올라오게 놔둬선 안 된다!”

    성벽에 걸린 사다리에선 스켈레톤과 병사들의 격렬한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뭐, 하지만 함락도 시간문제지.’

    우리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계속 공세를 이어 간 탓에.

    적들은 벌써 몇 주간 편히 잠도 못 잤을 터.

    전장의 구도가 이대로만 흘러간다면 승리는 무조건 우리의 것이 될 것이었다.

    ‘그보다… 많이도 죽었네.’

    내가 시체가 즐비한 전장을 씁쓸히 바라보던 중.

    “흑남님! 흑남님!”

    전방에서 흑마법사 한 명이 말을 타고 헐레벌떡 내 앞으로 달려왔다.

    “적 측에서 전령이 찾아왔습니다!”

    “전령?”

    ‘이 시점에서 전령을 보냈다는 건…….’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항복을 하고자 하는 것일까?

    아니면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예! 협상을 하길 원하는 것 같습니다!”

    “…협상?”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먼저 나서서 협상을 거론하는 걸 보니 확실히 다급해지긴 한 모양이네.’

    “만나 보실 겁니까?”

    레논의 물음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병력을 아낄 수 있으면 좋으니 일단은 만나 봐야겠습니다.”

    * * *

    다음 날, 점심.

    양측이 병력을 물려 고요해진 전장에서.

    두두두두두-

    수백 명의 기사들이 한 대의 마차를 호위한 채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저 정도로 호위병을 대동한 걸 보니, 그래도 나밀라 여왕이 직접 나왔나 보네.’

    내가 마차를 지그시 응시하던 그때.

    끼익-

    한 여인이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나밀라 여왕은 내 수하들의 면면을 살피더니 유독 날 빤히 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쪽이 흑남인 것 같군요. 확실히 생각 이상으로 젊으시네요.”

    “그러는 그쪽도 젊은 편이긴 하지.”

    내가 대수롭지 않아 하며 어깨를 으쓱이자.

    “저… 무례한 놈이 감히…….”

    기사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그래서, 무슨 제안을 하려고 이 자리를 마련한 거지?”

    나의 물음에 여왕은 생각보다 침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당신들이 점령한 땅들 중 일부분의 소유권을 인정하겠어요. 그러니 이만 이쯤에서 전쟁을 마무리하죠.”

    “…뭐라고?”

    ‘어이가 없네. 주도권은 이쪽에 있는데 누구 마음대로 전쟁을 멈추네 마네 이러고 있어? 거기다 뭐? 점령한 땅 중 일부의 소유권을 인정해?’

    이게 정녕 저들이, 국가의 수뇌부들이 머리를 맞대어 내놓은 결과물이란 말인가?

    “하…….”

    나는 한숨을 내쉬곤 무심한 눈빛으로 나밀라 여왕을 응시했다.

    “이봐, 나밀라 여왕.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는 고작 땅 몇 조각 얻으려고 전쟁을 시작한 게 아니야.”

    “…그럼 원하는 게 뭐죠?”

    불안하게 흔들리는 나밀라 여왕의 눈을 보며 난 나지막이 대답했다.

    “우리가 원하는 건 페이트의 멸망과 복속이다.”

    “…….”

    나의 말에 여왕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가.

    입가에 비웃음이 걸려 갔다.

    “오만하네요. 서쪽에서 쳐들어왔던 당신들의 병력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는 까맣게 잊었나 보네요?”

    “그래서? 지금 너희의 앞마당 앞까지 와 있는 건 누구지?”

    입술을 잘근 깨무는 나밀라 여왕.

    “고작 땅 몇 조각 따위를 거론할 거라면 더 대화를 하는 의미가 없겠어. 우리는 이만 일어나 보지.”

    내가 그녀에게 통보하듯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나밀라 여왕이 날 붙잡듯 소리친다.

    “그럼 당신들이 원하는 걸 말해 봐요!”

    “페이트의 멸망과 복속이라고 말했잖아?”

    나의 심드렁한 대답에 여왕은 죽일 듯 나를 노려봤다.

    “원하는 게… 정녕 그것뿐인가요?”

    “그래. 그러니 얼른 선택하는 게 좋을 거야. 만약 항복을 한다면 적어도 그쪽의 왕위와 나라의 안위는 보장해 주지. 물론 페이트라는 이름은 없어지고 페이트 지부라는 이름이 들어서겠지만.”

    “…맞서겠다고 하면요?”

    여왕의 물음에 나는 눈가에 반달을 그리며 답했다.

    “뭐, 그땐 망국의 여왕으로 역사에 기록되겠지.”

    “원하는 게… 정말 그뿐인가요? 다른 걸 원한다든가…….”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지 마. 그게 전부다.”

    뿌득-

    “일단 그쪽의 입장은 잘 알겠어요. 하지만 당장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이니 시간을 주셨으면 해요.”

    “3일을 주지.”

    나의 말에 여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겨우 3일이라고요?”

    “그것도 많이 준 거다. 혹여나 시간을 끌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거야. 3일이 지날 동안 대답이 없다면 곧바로 침공을 시작할 거다.”

    “…….”

    그에 나밀라 여왕은 한참이고 말없이 나를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마차에 올랐다.

    * * *

    페이트 왕국의 수도, 버팔린의 왕성.

    “이 짐승만도 못한 새끼들이!”

    협상을 끝내고 돌아온 여왕의 고성이 왕성을 쩌렁쩌렁하게 울렸고.

    그녀가 집어 던진 물건들이 벽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났다.

    “감히… 나를 능멸해!”

    여왕의 분노가 좀처럼 가라앉질 않던 중.

    늙은 귀족이 숨죽이고 있던 귀족들을 대표하여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왕님, 분노하시는 게 응당 당연한 일입니다만, 일단 대책을 세우는 게 우선일 것 같습니다.”

    “대책? 최후의 최후까지 싸운다. 그게 대책이다. 아니면 설마 왕국이 나의 대에서 망하는 걸 지켜만 보라는 건 아니겠지?”

    여왕이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노려보자.

    늙은 귀족은 서둘러 손을 젓는다.

    “그럴 리가요? 저 또한 페이트 왕국이 천 년, 만 년이 지나도 영원하길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 우리는 충분히 고민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늙은 귀족이 나지막이 말을 이어 간다.

    “놈들은 우리가 항복하거든 왕권과 나라의 안전을 보장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무엇이 더 현명한 선택일지 고민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엘런, 지금 네놈이 감히 내게 시체나 주물럭대는 놈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라고 하는 것이냐?!”

    “그 시체를 주물럭거리던 놈들에게 나라의 운명이 달린 상황입니다.”

    늙은 귀족의 충언에 나밀라 여왕은 애써 분노를 삭인다.

    “…그럼 어쩌자는 거냐.”

    “왕권과 나라를 보장해 준다는 조건에 한 가지 조건을 더 추가한다면… 전 항복도 고려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늙은 귀족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엘런 백작! 당신이 정녕 미친 겁니까?!”

    “항복이라니요?! 최후의 최후까지 싸워야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까!”

    “여왕이시여! 제가 백작의 목을 베겠습니다!”

    곳곳에서 그를 규탄하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조용!”

    하나 나밀라의 일갈에 입을 꾹 닫는 귀족들.

    “엘런, 말해 보거라. 어떤 조건을 추가하자는 거지?”

    “그건…….”

    잠시 머뭇거리던 늙은 귀족이 여왕의 얼굴을 보며 간곡히 말한다.

    “바로 여왕님께서 저들의 우두머리인 흑남과 결혼을 하시어, 페이트 왕가와 흑탑의 결속력을 다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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