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51화 (151/200)

◈ 151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하필 적국의 귀족이, 그것도 함락해야 할 성의 성주가 날 섬기고 있다니?

‘아씨… 가만,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 아니지. 상관없나?’

어차피 상대의 요구 조건을 승낙해 주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바든성을 얻어 낼 수 있다.

‘그럼 굳이 내 신도인 바든을 건들 일도 없겠지.’

내가 생각을 끝마치고 입을 떼려던 찰나.

“다른 조건들은 몰라도 종교의 자유 보장은 불가능하다. 그렇잖습니까, 흑남님?”

레논이 단호히 반대의사를 내비쳤다.

‘…뭐라고?’

설마 여기서 갑자기 레논이 반대할 거라곤 생각을 못 했던 탓에.

나는 그를 보며 물었다.

“그리 생각한 이유가 있는 겁니까?”

“당연히 우리의 통치를 받게 되면 베논 님을 섬기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저들은 과한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아니, 일리 있는 말이긴 한데…….’

여기서 레논의 말에 반대하기도 애매했으나.

어떻게든 그를 설득하긴 해야 했다.

“부탑주님, 저 또한 부탑주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정상적으로 바든성을 함락하려면 우리 쪽도 피해가 클 겁니다. 부탑주께선 이 기회를 버리시겠다는 겁니까?”

“저는 선례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선례를 남긴다면, 앞으로 다른 성주들이 항복할 때도 이와 비슷한 요구를 해 올 겁니다. 그러니 전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바든성을 무력으로 점령해야 한다고 봅니다.”

레논이 좀처럼 의견을 굽힐 생각을 않자.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 갔다.

“부탑주님의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생각을 해 보시지요. 우리가 상대해야 할 왕국은 페이트만이 아닙니다. 도미닉 왕국, 레바논을 비롯하여 기타 소왕국들까지 점령을 해야 되죠.”

“음…….”

“그런데 만약 페이트 왕국에서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게 된다면, 우리는 대업을 완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베논께서 정녕 그러한 결과를 원하실 거라 생각하십니까?”

나의 물음에 레논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원치 않으실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일단 저들의 요구를 수락하여 성을 점령하고, 그 뒤에 차근차근 저들에게 베논 님에 대해 알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레논이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여 보인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확실히 랄프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가야 할 길이 먼데, 병력을 아낄 수 있을 때 아끼는 게 옳은 선택인 것 같습니다.”

“하하, 이해해 주셨다니 다행입니다.”

나는 밝은 미소를 보이곤 바든성에서 온 전령을 응시했다.

“좋다. 너희가 내건 조건들을 전부 수용하겠다.”

“흑남님의 위대하신 결정에 감사드립니다.”

* * *

그날 저녁.

우리는 단 한 구의 스켈레톤도 잃지 않고 바든성에 입성할 수 있었다.

“반갑네. 바든 백작이라 하네.”

“흑남이다. 이쪽은 레논 부탑주고.”

“말로만 듣던 두 사람을 직접 보게 되어 영광이군. 일단 자리에 앉지.”

어딘가 날이 서 있는 바든 백작의 목소리와 달리.

우리는 바든 백작의 호의를 받으며 식탁에 착석했다.

“바든 백작, 참으로 현명한 선택을 했군.”

내가 그를 보며 넌지시 말을 꺼내자 바든 백작은 픽 조소를 흘린다.

“이미 페이트 왕국은 기우는 배나 마찬가지네. 나는 거기에 계속 탈 수 없다고 판단을 내렸을 뿐이야.”

“허허, 다른 귀족들도 바든 백작처럼 현명한 선택을 하면 좋겠군요.”

레논이 웃으며 대화 분위기를 돋우던 중.

[…신이시여.]

‘…음?’

[주신이시여…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가 제게 찾아왔습니다. 오늘 전 이 역겨운 흑마법사들을 모조리 죽일 겁니다. 주신이시여… 제게 힘을 주십시오. 저 악의 종자들이 큰 의심 없이 차려진 음식들을 먹게 해 주시옵소서…….]

유독 누구보다 간절한 기도 소리가 나의 머릿속을 울려왔다.

‘이건…….’

나는 경악하여 바든 백작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런 니미랄…….’

아무래도 바든 백작은 항복할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만약 여기서 우리가 음식에 독이 들었다는 사실을 간파한다면…….’

바든 백작은 물론이거니와 바든성의 모든 생존자들이 분노한 흑마법사들에게 학살당할 건 불 보듯 뻔했다.

‘망할…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되지?’

바든 백작을 죽이자니 날 믿는 신도를 죽이는 꼴이고.

그렇다고 바든 백작을 옹호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쩐다…….’

정말이지, 신도와 신도가 싸웠을 때 어떻게 처리해야 될지 고민한 것 이후로.

가장 큰 고민거리가 날 찾아올 줄이야.

난 대화를 하는 둥 마는 둥하며 깊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래… 일단 식사 자리를 망쳐야겠어.’

마침내 결단을 내리곤 입을 열었다.

“잠깐!”

나는 목소리를 높여 좌중의 이목을 모은 뒤,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식사를 하기에 앞서 식욕도 돋울 겸, 잠시 눈요기를 하는 건 어떤가?”

“눈요기… 말입니까?”

사전에 계획되지 않았던 일이라 그런 걸까.

레논이 의아하다는 듯 날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이 자리를 위해 내가 따로 준비한 게 있지.”

“으음…….”

바든 백작도 관심이 동했는지 미세하게 눈을 꿈틀거렸다.

덜그럭-

그사이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스켈레톤 다섯 구를 꺼내 놓곤.

스켈레톤들을 보며 손가락을 퉁겼다.

둠칫둠칫-

그러자 두 스켈레톤이 들고 있던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덜걱, 덜걱-

남은 세 녀석은 악기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춘다.

“저건… 뭡니까?”

레논이 멍한 표정으로 날 보며 묻자.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뭐긴. 내가 할 게 없을 때 취미 삼아 했던 거지.’

한때 유흿거리로 스켈레톤을 아이돌화해 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으로 계획했었던 흑켈레톤 프로젝트.

비록 폐기된 프로젝트였으나 어쨌건 지금만큼은 시간벌이로 제격이었다.

“…흥미롭군. 춤을 추는 스켈레톤이라니.”

다행히 바든 백작을 비롯하여 좌중은 흥미롭게 스켈레톤들을 구경했고.

그사이 나는 슬며시 바든 백작 옆으로 다가가 작게 속삭였다.

“음식에 독을 타는 건 그리 현명한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

“…….”

바든 백작이 눈을 부릅뜬 채 나를 노려보자.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계속 말했다.

“그리 놀랄 것 없어. 주신 랄프께서 내게 사실을 알려 주셨다.”

그에 안 그래도 커져 있던 백작의 눈이 터질 듯 커졌다.

“일단 독이 든 음식은 치우게 해. 그리고 따로 이야기를 하지.”

“…알겠다.”

백작이 조용히 시녀를 불러 무어라 이야기를 하는 사이.

화려한 몸놀림을 선보이던 흑켈레톤의 공연이 끝났다.

짝짝짝-

“허 참… 스켈레톤이 저런 정교한 동작을 할 수 있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그리 놀랄 것 없습니다. 흑남께선 항상 여러 신기한 일들을 벌이시지요.”

좌중이 공통된 주제로 대화를 나눈던 중.

어느덧 시녀들이 음식을 가져와 식탁에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

내가 슬며시 바든 백작을 응시하자.

끄덕-

바든 백작은 말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여 보였다.

‘독이 든 음식들은 치운 건가. 후…….’

다행히 별 탈 없이 식사 시간은 끝났고.

나는 바든 백작의 집무실로 이동했다.

사사삭-

나는 바알의 힘을 사용하여 신들의 이목을 차단한 뒤에야.

비로소 바든 백작을 보며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많을 거라 생각하는데.”

“흑남은… 베논을 섬기는 성녀 같은 존재라고 들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

“공식적으로 그렇게 알려져 있긴 하지.”

난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난 베논을 섬기지 않아. 내가 섬기는 자는 오직 주신뿐이다.”

“…내가 그 사실을 어떻게 믿지?

좀처럼 경계를 풀지 않는 바든 백작을 보며 난 빙긋 웃어 보였다.

“안 그러면 네가 독을 쓸 거라고 내가 어떻게 알았을까?”

“그건… 우연히 봤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아니. 주신께서 내게 경고를 해 주셨기 때문이지.”

그에 바든 백작은 조금 놀라워하며 내게 물었다.

“경고를 하셨다고? 그럼 그분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건가?

“난 그분의 사도다. 그래서 그분과 대화하는 것도 가능하지.”

“…….”

나의 대답이 그리도 어처구니가 없었던 건지.

바든 백작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아, 이놈 참 의심 많네. 할 수 없나.’

나는 잠시 목을 갈무리하곤 바든을 주시했다.

[나의 아들, 바든아. 네 눈앞에 있는 흑남은 진실로 진실로 나를 따르는 종이다. 눈을 가리고 있는 의심을 지우고 그를 신뢰하여라.]

“허억! 주, 주신이시여!”

화들짝 놀라 식겁하는 바든을 보며,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질문했다.

“왜 그러지?”

“아, 아무것도 아니다.”

바든 백작은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며 손사래를 쳤다.

“어쨌건 아까는 정말 큰일 날 뻔했다는 건 알고 있을 거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독을 쓰려고 한 거지?”

“…거짓 항복으로 너희를 안심시키고 그 뒤에 독살을 하려 했다. 의도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바든 백작은 씁쓸히 웃음을 삼키곤 다시금 내게 의문을 내비쳤다.

“그런데 당신이 정말 주신의 사도님이라면… 왜 흑마법사들의 수장 노릇을 하고 있는 겁니까?”

방금 일로 나에 대한 신뢰가 조금은 생긴 것인지.

바든 백작의 말투도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베논의 암수를 분쇄하고자 주신께서 마련하신 계획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베논의 암수… 그게 뭡니까?”

바든의 물음에 난 고개를 저었다.

“주신님의 계획을 말해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정복 전쟁 또한 모두 주신님의 계획이라는 것만 알아 둬라.”

“허어…….”

멍하니 바닥을 바라보는 바든 백작.

“그럼… 페이트 왕국의 멸망 또한 주신님의 계획 아래에 있다는 겁니까?”

“애석하게도 그렇다.”

“…….”

바든이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흘리자 나는 그를 보며 넌지시 말했다.

“자세히 말해 줄 수는 없지만 주신님의 계획이 차질 없이 시행되어야만 이 세계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만 알아 두어라.”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참으로… 참으로 고통스럽군요.”

‘뭐… 그야 그렇겠지.’

자신의 왕국이 멸망하는 걸 지켜만 봐야 하는 걸 과연 누가 좋아하겠는가.

“나 또한 그분의 뜻을 따라 전쟁을 치러야 하는 게 참으로 쉽지 않아. 하지만 그분의 뜻을 알고 있으니 기꺼이 따르고 있을 뿐이다.”

“…….”

나의 대답에 한참이고 말이 없던 바든 백작이 천천히 고개를 쳐들며 말한다.

“주신께서… 뭘 계획하고 계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말씀하십시오.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말만으로도 고맙군. 한데 그건 그렇고, 자네는 어떻게 주신님을 섬기게 된 거지?”

“그건…….”

바든 백작의 입에서 페른 왕국 정복 전쟁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우리는 밤이 깊어질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 * *

3일 뒤.

“전군! 전진하라!”

우리는 바든 백작의 호의 아래에서 재정비를 끝마쳤고.

바든성을 나가 다음 성을 향해 이동하려고 했다.

“이제 페이트의 수도까지도 멀지 않았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바든성을 쉽게 함락한 게 참으로 컸습니다.”

내가 레논과 대화를 나누며 이동하던 그때.

키에에에에엑-

허공에서 괴음이 울려오더니 본 와이번이 우리 앞에 황급히 착지했다.

‘전령인가? 무슨 일이지?’

내가 의아한 눈으로 본 와이번에서 내리는 흑마법사를 응시하던 중.

넘어지듯 뛰어내린 흑마법사가 허겁지겁 내 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는다.

“흑남님, 부탑주님… 큰일 났습니다!”

“…큰일?”

지금 우리 군은 정한 시간보다 빠르게 성을 함락하며 이동하고 있건만 큰일이 났다니?

‘설마 서부군에 문제라도 생긴 건가? 아니면 우리가 군세를 이동시킨 틈에 레바논이 검은 대지로 쳐들어오기라도 한 건가?’

“그게… 서부군이 적들에게 크게 패배했다고 합니다!”

‘패배라……. 뭐 질 수도 있긴 한데…….’

도대체 얼마나 크게 패배했기에 전령을 급파할 정도란 말인가?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지?”

“그것이, 거의 군세의 절반가량이 타격을 입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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