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49화 (149/200)

◈ 149화

“…복습을 하고 있었다고?”

복습이라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뛰기 싫은 티를 온몸으로 표현했던 놈들이 무슨 복습이란 말인가?

“네! 저번 실습으로 저희는 흑남님의 수업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 깨달았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마음이 맞는 애들끼리 모여서 훈련 중이었어요.”

‘호오… 이것 봐라?’

애당초 학생들에게 체력의 중요성을 알려 주기 위해 그러한 실습을 계획했던 것도 사실이긴 했으나.

무엇보다 알아서 훈련을 하는 학생들을 보니 기특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네. 지금 이곳에서 땀방울을 흘려야 전쟁터에서 피를 안 흘린다는 사실도 잊지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다시금 학생들이 헉헉거리며 사라지자.

‘그래도 그 실습으로 깨달은 녀석들이 제법 있어서 다행이네.’

나는 멀어져 가는 등불을 보다가 집무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 * *

다음 날, 점심.

흑탑의 회장.

“허 참… 왜 자꾸 고집을 부리시는 겁니까? 일단 페이크 왕국을 먼저 침공하는 게 합리적인 결정입니다! 서쪽으로는 페른이 있고, 또 남쪽으로는 크라켄이 우리를 지원해 줄 터인데 왜 레바논을 먼저 치자는 겁니까?!”

레논 부탑주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언성을 높이자.

그와 언쟁을 벌이던 노마법사가 버럭 소리친다.

“그러니 오히려 레바논을 먼저 쳐야 한다는 겁니다! 페이크는 페른과 크라켄 왕국이 막아 줄 것 아니요! 만약 우리가 전군을 이끌고 페이크 왕국으로 향했다가 레바논이 뒤에서 공격을 해 오면 어쩌려고 그런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그러려면 크라켄 왕국을 넘어야 할 텐데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크라켄은 페른과 상황이 다릅니다! 아무리 동맹이라고는 해도 레바논이 거세게 압박하면 우리를 배신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부탑주! 세상에 영원한 아군은 없습니다!”

‘아주 그냥 개판이네.’

좌중은 곧 있을 전쟁을 앞두고 격렬하게 대립 중이었는데.

레바논을 먼저 치느냐, 아니면 다른 왕국을 먼저 공략하느냐를 두고 팽팽하게 의견이 나뉜 상황이었다.

하나 의견이 좀처럼 좁혀지질 않자 나는 슬며시 입을 열었다.

“전 지금 굳이 레바논을 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내 말에 페이크 왕국을 치자고 주장하던 레논이 반색하며 묻는다.

“흑남께서도 그리 생각하십니까?”

“일단은 그렇습니다.”

“그리 생각하신 이유가 있으신 겁니까?”

늙은 흑마법사가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설명을 요구하자.

나는 차분히 말을 이어 갔다.

“어차피 지금 레바논은 교황의 죽음으로 인해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왕국을 먼저 치는 게 더 낫다고 봅니다.”

“아니, 그럼 더더욱 레바논을 먼저 치는 게 맞지 않습니까?”

“만약 우리가 레바논을 친다면 놈들은 내전을 멈추고 힘을 합치려 할 겁니다. 온전한 전력을 갖춘 레바논을 상대로 우리가 승리할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봅니까?”

나의 물음에 노마법사는 잠시 고민하다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한다.

“베논께서 우리의 승리를 약속하셨는데, 당연히 우리가 승리하겠지요. 안 그렇습니까?”

‘이 썩을 늙다리가 베논을 들먹여?’

여기서 자칫 잘못 말했다간 신성모독을 한 꼴이 될 수도 있었기에.

나는 신중히 발언을 이어 갔다.

“당연히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겁니다. 하지만 불필요한 희생 또한 늘어나겠죠. 과연 베논께서 그러한 결과를 원하실 것 같습니까?”

“그럼 흑남의 말대로 페이크 왕국을 친다고 칩시다. 그럼 레바논은 가만히 있겠습니까?”

‘위기감을 느끼고 뭉칠 수도 있겠지. 물론… 내가 그렇게 놔두진 않겠지만.’

나는 전쟁을 시작하기에 앞서 레바논에 서신 한 통을 보낼 생각이었다.

‘흑마법사들이 페이크 왕국만 치고 빠지려고 한다고 정보를 흘리면, 레바논은 자기네들끼리 알아서 내전을 이어 가겠지.’

먼 산에 피어오른 불이 자기네 집으로 향할 일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면.

놈들은 분명 자신들의 집에 피어오른 불에만 집중할 게 분명했다.

“그건 걱정할 것 없습니다. 내전이 하루아침에 끝나지 않는 이상, 놈들이 다른 왕국에 개입할 가능성은 낮으니까요.”

“으음…….”

노마법사가 입을 꾹 다물던 그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가란이 슬며시 대화에 끼어든다.

“확실히 흑남의 말이 일리가 있는 것 같군. 내전을 치르고 있는 왕국을 구태여 먼저 건들 필요는 없겠지.”

“그 말씀은…….”

“페이크 왕국부터 침공하는 걸로 하지. 대신 병력은 둘로 나누어 페른과 크라켄에 보내어, 페이크 왕국의 서쪽과 남쪽을 일시에 공략하는 것으로 한다.”

“예!”

* * *

흑마법사들이 차근차근 전쟁을 준비하던 그 시각.

[그래도 흑남이 아주 머리가 안 돌아가진 않네요. 만약 레바논을 먼저 쳤다면 분명 엄청난 피해가 나왔을 텐데 말이죠.]

허공에서 흑마법사들의 회의를 지켜보고 있던 레바논이 계속 말한다.

[아무래도 흑마법사들이 당신이 한 말 때문에 자신감이 엄청 오른 것 같은데, 신관과 성기사들을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닌가요? 심지어 상극이잖아요?]

[어쨌건 결과적으로 페이크부터 공략을 하기로 결정 났으니 잘됐군.]

[페이크 왕국에 아가멤논 후계자가 있으면 좋겠네요.]

레바논의 나지막한 한마디에 베논이 비웃음을 던진다.

[이제 와서 대륙을 멸망시키는 게 부담되기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누가 부담이 된다고 했나요? 내 신도들까지 싹 다 죽이는 게 아쉬워서 그렇죠. 그리고 솔직히 대륙이 멸망하면 당신만 좋은 거잖아요. 대륙이 멸망해도 흑마법사들만큼은 살아남을 테니까요.]

[그래서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기로 했을 텐데?]

베논의 물음에 실소를 흘리는 레바논.

[재앙의 문을 갖는 것만으론 성이 안 차서 그래요.]

[그럼 내가 가져도 되나?]

[뭐라고요? 누가 준다고 했나요?! 말이 그렇다는 거죠.]

잠시 말다툼을 벌이던 두 신이 다시금 흑탑의 회장을 주시하며 대화를 이어 간다.

[근데 만에 하나 대륙을 싹 멸망시켰는데도 아가멤논의 후계자를 못 찾으면 어떡하죠?]

[그럴 일은 없겠다만 만약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베논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땐 우리가 나서서 대륙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을 한번 쓸어 내야겠지.]

[뭐… 아무래도 그래야겠죠.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심심해지겠네요.]

[대륙에 새 생명들이 자리를 잡으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 그 뒤로는 흑남을 이용해서 재앙의 문 안으로 들어가 봐야지. 정말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세계의 신을 굴복시키는 것도 재미있을 거다.]

생각보다 장대한 베논의 계획에 레바논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계획은 마음에 드네요.]

[계획뿐일까? 결과도 좋을 거다.]

* * *

다음 날.

덜그럭, 덜그럭-

그어어어어어어!

“대열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이동시켜!”

“이번 주 내로 모든 병력을 이동시켜야 한다! 속도를 올려!”

마침내 수십만의 언데드 군세가 흑마법사들의 통제하에 대대적인 이동을 시작했다.

“장비들을 점검해라! 전장에서 믿을 건 동료의 등이 아니라 너희가 들고 있는 지팡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예! 병단장님!”

또한 각 학파의 병단들 또한 무기와 방어구를 점검하며 곧 다가올 약속의 날을 대비해 나갔고.

“오, 세상에… 저게 대체 몇 마리야?”

“못해도 십만은 넘는 것 같은데……. 놈들이 다시 성마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 건가?”

“얼른 이 사실을 본국에 알려야겠어.”

환호하는 군중 사이에 끼어 있던 첩자들은 서둘러 이러한 사실을 본국에 전했다.

* * *

2주 뒤.

흑마법사들의 전쟁 준비가 막바지에 치달았다는 소식이 각 대륙의 수뇌부들에게 전달됐을 무렵.

“빌어먹을… 빌어먹을…….”

새하얀 의복을 입은 노인이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복도를 질주했다.

“로이어! 로이어!”

노인이 다급히 고함을 내지르자.

“무슨 일인가?”

교황의 자리에 앉아 있던 노인이 무심히 방문객을 쳐다본다.

“후우, 후우… 소문 못 들었나? 흑마법사들이 전쟁을 준비한다고 하네! 심지어 이미 준비 막바지 단계라더군!”

“그렇군.”

“그렇군이라니?! 곧 놈들이 레바논을 향해 쳐들어올 터인데 대비를 해야 하지 않겠나!”

하나 어째서인지 로이어 대신관은 대수롭지 않아 하는 모습이었다.

“괜찮네. 우리가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인가?! 흑마법사들이 움직이는데 신경을 쓰지 않다니?”

“바로 어제, 갈프 신관에게서 서신이 왔었네.”

로이어 대신관의 말에 노인이 눈을 번뜩인다.

“오오, 그간 갈프 신관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는데, 참 고마운 일이군. 그래서 뭐라고 서신을 보내왔던가?”

“놈들의 목표는 페이크 왕국이라더군. 아무래도 페이크 왕국이 놈들의 심기에 거슬리는 일을 했던 모양이야. 그러니 우리는 페이크 왕국에 적당히 원군만 보내는 척하면서 생색만 내면 되네.”

로이어 대신관의 말에 노인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참… 다행이라 하긴 뭐하지만 다행이군.”

“그러니 놈들에게 신경을 쓸 필요 없네. 그보다 우린 카란 대신관을 죽이는 데 집중하면 되네.”

“후우… 얼른 이 내전이 끝나야 바깥 정세에도 신경을 쓸 터인데…….”

* * *

그렇게 시간이 지나 어느덧 3주가 흘렀다.

둥-둥-둥-

장대한 북소리가 흑탑 앞의 대광장을 울리고.

누더기 골렘들이 부는 거대한 뿔피리 소리가 하늘로 널리 퍼져 나가자.

척, 척-

각 학파의 병단들이 열을 맞추어 행진을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흑마법사님들! 꼭 이기고 돌아오세요!”

“베논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흔히 볼 수 없는 장엄한 광경이 펼쳐지자.

몰려든 군중은 들고 온 꽃을 흑마법사들의 머리 위로 뿌리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척-

그에 손을 들어 환호에 답하는 병단 소속의 흑마법사들과는 달리.

“으아아… 떨린다.”

“긴장할 것 없어. 우리는 배운 대로만 하면 돼.”

“그렇긴 하지만… 이제 진짜 전쟁터로 나가는 거잖아.”

학생들은 낯선 상황에 잔뜩 긴장하여 몸을 움츠러뜨렸다.

그러던 그때.

“저기 봐! 나가란 탑주님이셔!”

“와아… 수뇌부들은 전부 다 나와 계시네.”

전방에 배치되어 있던 높다란 단상 위로 모습을 드러낸 중진을 보며.

학생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여! 대륙의 모든 왕국을 정벌하기 전까지 우리의 정복 전쟁은 멈추지 않을 것을 이 자리에서 엄숙히 선언하는 바이다!”

이윽고 나가란 탑주의 연설이 끝날 무렵.

한 학생이 동료들을 보며 묻는다.

“근데 우리는 어디 소속이야?”

“글쎄……. 각 병단들이야 부탑주님들이 통제하실 거고, 듣기로 우리는 흑남님의 산하라고 했는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학생들이 연신 속삭임을 이어 나가던 그때.

저벅, 저벅-

비어 있던 단상 위로 누군가가 올라온다.

“저것 봐! 흑남님이셔!”

나이가 지긋한 수뇌부들과 달리 젊은 남자가 단상에 올라서자.

학생들은 눈을 빛내며 그를 주시했다.

“드디어 베논께서 약속하신 오늘이 도래했다! 전쟁은 분명 쉽지 않을 것이다. 두려울 것이고, 또 무서울 것이다. 하지만 베논께서는 우리에게 승리를 약속하셨다! 베논 님을 의지하며 전진하고 전진하면 결국 대륙은 우리의 손에 굴복할 것이다!”

화아아아아악-

흑남의 머리 위로 찬란한 베논의 표식이 생겼다가 사그라지자.

와아아아아아아아아-

군중과 병단의 마법사들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전군! 출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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