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화
“저, 전쟁이라뇨?! 학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말 그대로다. 약 반년 뒤, 너희는 흑카데미를 떠나 전쟁터로 향하게 될 거다.”
볼드 학장의 말에 당혹한 학생들 사이로 수군거림이 퍼져 나간다.
“우리가 전쟁터로 간다고?”
“마, 말도 안 돼! 우린 아직 학생이잖아!”
수군거림이 점차 혼돈으로 변해 가던 그때.
한 여학생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한다.
“흥, 날 전쟁터로 끌고 가겠다고? 그 꼴을 우리 아빠가 보고 있을 것 같아? 우리 아빤 파멸병단의 단원이라고! 분명 나 하나쯤은 어떻게 해 주실 거야.”
“미네르! 호, 혹시 나도 어떻게 안 될까? 응?”
“으음, 글쎄?”
전쟁터로 가기 원치 않는 학생들이 여학생에게 붙어 애원하던 중.
볼드 학장이 계속 말을 이어 간다.
“또한 예외인 학생은 없다. 현재 흑카데미에 소속된 모든 학생이 전쟁터로 가게 될 거다.”
“모, 모든 학생이라고요? 거짓말이죠?”
나름대로 명가라 불리는 가문의 자제들과 입지가 뚜렷한 부모를 둔 학생들이 당혹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부모님이 가만히 계실 것 같아요? 분명 반대하실 거예요!”
“다시 말하지만 ‘예외’는 없다. 이는 지엄하신 흑탑주님께서 직접 내리신 명령이다.”
다시금 볼드 학장이 흑탑주의 명령이라는 말을 강조하자.
부모의 이름을 언급하던 학생들의 표정이 점차 새하얗게 질려 갔다.
“맙소사…….”
아무리 잘난 부모를 뒀다고 할지라도.
그 누구도 흑탑주보다 높은 직급을 가진 이가 없는 탓이었다.
“그, 그럼 우린… 반년 뒤에 죽게 되는 거야?”
“난 아직… 대륙에 그 어떤 족적도 못 남겼다고! 싫어! 싫다고!”
그 누구도 열외될 수 없다는 현실이 그들의 가슴을 옥죄기라도 한 걸까.
일부 학생들은 울먹이며 하소연하듯 소리쳤다.
“죽긴 뭘 죽어? 죽기 전에 죽이면 그만인 거잖아? 흑마법을 배운 것도 사람을 죽이려고 배운 거고. 차라리 잘됐어.”
“전쟁터가 우스워 보여?! 다 죽게 생겼는데 뭐가 잘됐다는 건데!”
옆에 있던 여학생이 표독스러운 눈으로 죽일 듯 노려보자.
남학생은 덤덤히 대답했다.
“분명 전쟁터는 위험해. 하지만 반대로 공훈을 쌓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잖아? 만약 거기서 크게 활약을 한다면 출세를 할 수도 있는 거고.”
“그건 그렇지. 지금 자리를 잡은 더치 가문이나 로랑드 가문도 성마전쟁에서 큰 공훈을 세워서 생겨난 거잖아?”
“그래, 위험하지만 분명 좋은 기회야.”
성공과 출세를 꿈꾸는 일부 남학생들이 오히려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자.
옆에 있던 여학생들이 혀를 내두르며 소리쳤다.
“나, 난 그렇게 못 해! 전쟁터에 나가면 씻지도 못하고 사람만 죽여야 되잖아? 내가 그러려고 흑마법사가 된 줄 알아?! 난 여기에 더 못 있겠어. 이깟 흑카데미? 안 다니면 그만이야!”
“그래! 나도 부모님의 성화가 아니었다면 이깟 곳엔 오지도 않았어!”
그러나 그녀의 외침을 들은 볼드 학장이 무심히 외친다.
“이미 재학 중인 학생들은 흑카데미를 벗어날 수 없다. 만약 이를 어길 경우, 해당 학생은 물론 그 가문 또한 엄중히 벌을 받게 될 거다.”
“아아…….”
너무 큰 충격을 받았는지 자리에 풀썩 주저앉는 학생이 속출했으나.
볼드 학장은 아랑곳 않고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따라서 다음 주부터 너희는 기본적인 수업 외에도 전투 실습을 하게 될 거다.”
“전투 실습은 구체적으로 뭘 하는 건가요?”
“기존에 치르던 실습을 더 강화하여, 매주 전투에 특화된 노예들과 함께 실전을 치르게 된다. 거기에 언데드를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방법과 야외에서 생활하는 법 등 다양한 실습이 추가로 진행될 거다.”
* * *
그날, 저녁.
‘분위기가 아주 개판이 났네.’
학생들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긴장감과 두려움이 나의 피부에까지 느껴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저놈은 얼굴은 울상인데도 매점에 갈 여유가 있나 보네.’
나는 죽을상을 한 채 폭탄 맛 쿠키를 들고 가는 학생을 보며 픽 실소를 흘렸다.
‘그래.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간식은 먹어야지.’
평소보다 더 붐비는 흑카지노와 매점을 보며 난 계속 생각했다.
‘반면 원생들은… 어려서 다행이라고 해야 되는 건지 모르겠네.’
흑카데미의 학생들이 이번 전쟁에 강제로 참여해야 하는 것과 달리.
흑립 유치원의 원생들은 이번 전쟁에 참전시키지 않기로 했다.
당연한 이유지만, 전쟁을 치르기엔 나이가 너무도 어리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보다… 부탁을 수락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어제, 회의가 끝나고 나서 나가란 탑주가 내게 한 가지 부탁을 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학생들을 상대로 대련을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여유가 있을 때 한 번씩 봐 달라고는 했지만, 학생들의 대련 상대로는 전투 노예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굳이 내가 학생들과 대련할 필요가 있나?’
솔직히 한 귀로 흘려듣고 넘겨도 될 정도로 가벼운 사안이긴 했지만.
한편으론 괜히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다른 놈들이 죽는 거야 알 바 아닌데, 학생들이 전쟁터에서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괜히 거슬리네.’
차라리 졸업생이나 흑탑의 흑마법사가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었다면 크게 신경조차 쓰지 않았겠으나.
저들은 아직 학생들이었다.
‘음… 어쩐다.’
마침 베논이 나선 탓에 포교 활동도 잠시 중단한 상태라 시간적 여유는 충분한 상황이었다.
‘조금만 손을 봐 줄까?’
내가 학생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을 이어 가던 그때.
매점에서 나온 학생들 몇이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저… 흑남님.”
대표로 나선 남학생이 조심스레 말을 건네 왔다.
“무슨 일이지?”
“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 청을 드려도 될까요?”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까딱였다.
“말해 봐.”
“저…….”
한참을 망설이던 학생은 로브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나의 앞에 내밀었다.
‘이건… 단검이잖아?’
무기 자랑이라도 하려는 걸까?
이걸 왜 내게 내보인단 말인가?
“이 귀도는 제 가문에서도 귀하게 취급받던 물건이에요. 저희 아버지께서 제게 선물로 주신 거죠.”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내보이는 거지?”
“저… 혹시 이걸 받으시고 저희를 흑카데미에서 빼 주실 수는 없을까요?”
‘…뭐?’
남학생의 물음에 나는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이러는 건가? 근데 내가 이걸 받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진짜로?’
천금, 만금을 구해 와도 나의 눈썹 한 움큼조차 꿈틀거리게 하지 못할 판국에 고작 단검으로 나를 회유하려 하다니.
“이 단도, 오리하르콘인가?”
“…예?”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진 거냐고.”
나의 물음에 단도의 주인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 그건 아닙니다. 대신 이프리트의 불꽃과…….”
“그래. 아닌 것 같아서 물어봤다. 그건 그렇고… 나를 매수하려고?”
“아, 아닙니다! 저는 그저…….”
남학생이 말꼬리를 흐리자.
나는 스산한 눈빛으로 학생을 응시하며 말했다.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청탁을 하려거든 상대를 봐 가면서 해야지.’
현실을 뒤집을 수 있는 힘이 없으니, 현실에서 살아갈 방법을 떠올린 건 칭찬할 만한 일이었다.
하나 그 방법과 선택한 대상이 잘못돼도 너무 잘못되지 않았는가?
“학생들이 전쟁터로 가는 건 이미 흑탑에서 결정한 사안이다. 그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그, 그래서 이걸…….”
“넌 내가 이걸 받을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나?”
“어… 으…….”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흑마법 이외의 교육을 받지 않은 탓일까.
세상 물정 모르는 학생을 보고 있자니 화조차 나질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너, 이름이 뭐지?”
“…예?”
“이름이 뭐냐고.”
나의 물음에 안절부절못하던 남학생이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됐고, 이름이랑 학년을 말해.”
“그게…….”
울상이 된 남학생이 힘겹게 입을 연다.
“그게… 탄타예요. 파멸학파 2학년이고요.”
남학생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탄타? 좋아. 너는 내가 특별히 더 정신머리를 바꿔 주마.”
“…네?”
* * *
다음 날, 아침.
간만에 나는 정갈한 예복과 로브를 걸치곤 거울을 살폈다.
‘옷차림은 이만하면 됐겠지.’
내가 옷매무새를 다시금 고치던 중.
“흑남님, 밖으로 나가시는 건가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안나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해 왔다.
“밖으로 나가는 건 아니고, 정신머리 없는 놈들의 머릿속을 좀 바꿔 주려고.”
“정신머리 없는 놈들이요?”
안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멀리 가는 건 아니고, 저녁때는 다시 돌아올 거야.”
“네! 다녀오세요!”
안나의 인사를 받으며 흑립 유치원을 나간 나는 큼지막한 검은 성을 보며 생각했다.
‘옆에 두고도 들어가는 건 오랜만이네.’
흑카데미에 들어서는 게 도대체 얼마 만인지.
나는 올라갔던 입꼬리를 가라앉히곤 천천히 흑카데미로 들어섰다.
그러자.
“…어? 저것 봐! 흑남님이시잖아?”
“그러게? 흑남님이 이곳엔 어쩐 일이시래? 원장으로 부임하신 이후론 계속 흑립 유치원에만 계셨었잖아?”
“혹시 제자를 뽑으려고 오신 건 아닐까? 그 꼬맹이가 마음에 안 들어서 우리 중에 제자를 뽑으려고 하시는 거지! 어때? 그럴듯하지 않아?”
학생들의 수군거림이 도처에서 들려왔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볼드 학장의 집무실을 찾았다.
“볼드, 안에 있나?”
“예, 들어오셔도 됩니다.”
볼드 학장의 집무실로 들어서자.
여전히 머리숱 한 가닥 없는 볼드 학장이 나를 맞이했다.
“앉으시지요.”
“아니, 길게 대화할 게 아니니 됐어.”
“마음의 결정을 하신 모양입니다.”
볼드 학장의 물음에 난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보다, 내 마음대로 할 건데 괜찮겠어?”
“물론입니다. 탑주님께서도 흑남님의 가르침에 어떠한 개입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흑남님께서 편하실 대로 하시면 됩니다.”
“그래?”
그에 나는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이며 말을 이어 갔다.
“3개월. 딱 3개월만 가르칠 거다. 그 뒤에는 알아서 해.”
“알겠습니다. 그럼 수업 일정은 어떻게 편성할까요?”
“하루에 한 학년씩 가르치는 걸로 할까. 시간대는… 점심을 먹기 전이 좋겠어.”
나의 대답에 볼드 학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편성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바로 이동할까. 아, 그 전에… 파멸학파 2학년생들이 지금 무슨 수업을 듣고 있지?”
게슴츠레한 눈으로 시간표를 훑는 볼드 학장.
“알루디 교수의 신체 파괴 마법을 듣고 있을 겁니다.”
‘알루디 교수? 새로 들어온 교수인가?’
“좋아. 안내해.”
볼드 학장을 따라 나는 2층의 한 교실 앞에 도착했다.
“…그러니 가장 효과적인 건 일단 팔을 분쇄하는 일이다! 검사라면 검을 다루지 못할 거고, 마법사라면 지팡이를 들지 못하겠지. 팔이 어렵다면 다리도 괜…….”
안에선 알루디 교수의 것이라 생각되는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그럼…….”
드르륵-
볼드 학장이 먼저 교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나도 그의 뒤를 따라 교실로 들어섰다.
“…어?”
그러자 나를 보곤 당혹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중년의 남자를 비롯하여.
얼굴에 물음표가 걸린 학생들이 멍하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흐, 흑남님 아냐?”
“흑남님이 교실에는 왜 오신 거지?”
정신을 차린 학생들이 하나둘 의문을 표하던 중.
“그럼 전…….”
볼드 학장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알루디 교수가 허겁지겁 교실을 빠져나갔고.
볼드 학장은 내게 단상을 내어 주었다.
‘이건 또 뭔가 느낌이 새롭긴 하네.’
항상 핏자국과 시체 찌꺼기나 치우며 뒷정리를 하기 바빴던 옛 기억을 떠올리다가.
난 학생들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반갑다. 앞으로 세 달간 너희를 가르칠 생존 전문 교수 랄프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