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화
[보이는 족족… 말입니까?]
‘언제고 벌어질 일이긴 했다만 시기가 좀 빠른 것 같은데……. 그만큼 주신교의 성장세가 빠르다고 봐야 하는 걸까.’
[놈들은 세상의 규율을 어지럽히고 혼란을 가속화하는 이단이다. 능히 처리를 해야만 한다.]
베논의 말에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대륙을 멸망시키려는 네놈들만 할까?’
[베논 님의 말씀은 잘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따르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존재합니다.]
[감히 지금 나의 말을 거역하겠다는 거냐.]
한기가 느껴지다 못해 얼음장 같은 베논의 목소리에도.
나는 큰 감정의 동요 없이 말을 이어 갔다.
[거역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저희의 상황을 헤아려 달라는 것이지요. 지금 저희는 베논께서 말씀하셨던 약속의 날에 맞춰 군세를 준비하고 있고, 준비하는 데 많은 인력을 투입하는 중입니다.]
[계속 말해라.]
[하지만 만약 주신이라는 이단을 잡는 데 인력을 소모한다면, 약속의 날까지 원하는 만큼의 군세를 만들지 못할 가능성이 다분해집니다.]
‘대륙 멸망의 날을 미루든가, 아니면 주신의 세력을 때려잡는 걸 늦추든가. 그것도 아니면 둘 다 잡으려다 전부 망하거나.’
베논이 어떠한 결정을 하건 난 거기에 적당히 장단 맞추는 척만 하면 될 터.
[약속의 날은 그 어떠한 일보다 중요한 날이다. 그날을 미룰 수는 없지.]
[그럼…….]
[됐다. 너희는 곧 다가올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군세를 양성해라. 주신에 대한 일은 다른 종에게 맡기도록 하겠다.]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베논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뭐야… 의외로 쉽게 물러났네. 뭐, 어찌 보면 당연한 건가.’
어차피 신들이 노리는 건 대륙의 멸망이었고.
대륙이 멸망하는 과정 속에서 주신교도 자연스레 사라질 것이라 생각했을 터.
‘아무튼 적어도 내 손으로 신도들을 건들 일은 없어서 다행이네.’
이미 신도들에게 환란이 찾아올 것이라고 경고도 했으니.
대비를 할 놈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대비를 했을 것이다.
‘믿을 놈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믿음을 지킬 거고, 아닌 놈은 금세 믿음을 저버리겠지.’
신도들이 어떠한 결정을 하건 그건 자신들이 택할 일이었다.
‘이제 약속의 날이 도래하기 전까진 내가 할 일들을 해야지.’
나는 회의에 몰두해 있는 좌중을 보며 생각에 잠겨 갔다.
* * *
한 달 뒤.
[주신님… 이게 주신께서 말씀하셨던 환란입니까. 날이면 날마다 성기사들이 마을을 수색하고 있습니다. 두렵습니다…….]
[주신, 랄프시여. 어제는 제가 주신님을 믿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부덕한 저를 용서해 주세요…….]
‘끙…….’
수많은 사람의 기도 소리가 머릿속을 앵앵 울리는 탓에.
나는 잠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본격적인 탄압이 시작된 건가. 근데 좀 의외네.’
신도들의 기도 소리가 가장 많이 들려온 곳이 다름 아닌 레바논 왕국이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레바논에도 신자들이 제법 늘어난 모양이다만…….’
지금은 탄압과 고난을 견뎌야만 하는 시기였다.
‘너희가 선택한 신이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이미 잠을 자기엔 글렀기에 난 촛대를 들고 자그마한 거실로 나갔는데.
‘…음?’
거실이라고 하기도 뭐한 작은 공간에는 이미 작은 선객이 자리하고 있었다.
“잘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 안 자니?”
내가 열심히 책을 읽고 있던 안나의 뒤로 다가가 묻자.
“아, 흑남님!”
안나가 눈을 부비적거리며 책을 가리켜 보였다.
“이것만 다 보고 자려고요!”
“내용이 재밌나 보구나.”
나는 안나가 읽고 있던 책을 슬며시 살펴봤는데.
그녀가 보고 있던 책은 성마전쟁을 기록한 책이었다.
“전쟁에 관심이 동한 거니?”
“전쟁도 전쟁이지만 레바논과 흑탑이 팽팽하게 맞서 싸웠다는 게 너무 신기해요! 책에는 레바논이 땅도 엄청 넓고 병사도 엄청나게 많았다고 적혀 있는데, 흑마법사들은 어떻게 레바논을 상대할 수 있었던 걸까요?”
안나의 물음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흑마법사는 숫자가 부족하지. 그래서 부족한 병력의 수를 채우기 위해 언데드와 계약한 악마들을 전장에 투입하는 거란다. 스켈레톤들은 훈련받은 병사에 비해 부족한 감이 있긴 해도 빠르게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도 하고.”
“헤에… 그럼 만약 또 성마전쟁이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요? 그때도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전쟁이 마무리될까요?”
“음… 글쎄…….”
지금 레바논의 상황은 그야말로 개판 5분 전이라고 들었다.
‘나한테 밀정도 못 보낼 정도인 걸 보면, 나한테 신경 쓸 여력조차 없을 정도로 혼란스럽다는 거겠지.’
만약 이러한 상황에서 흑마법사들의 대륙 정벌 작전이 시작되면.
분명 레바논은 두 가지 중 하나의 결과를 택할 것이다.
‘사분오열한 채로 흑마법사들에게 정복당하거나, 흑마법사들에 맞서기 위해 일시적으로 손을 잡거나. 아마도 후자가 더 가능성이 높아 보이기는 한데…….’
사람의 마음과 또 선택이라는 게 워낙 변수가 많다 보니.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단정 짓긴 어려웠다.
“만약 레바논이 지금처럼 자기들끼리 싸운다면 흑마법사들이 승리하지 않을까 싶구나.”
“그, 그럼 그땐 어떻게 되는 건가요? 레바논이 있던 자리에 흑마법사들이 들어가서 사는 건가요?”
안나가 눈을 빛내며 왕성한 호기심을 보이자.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아마도 대륙의 역사가 개편되겠지. 예를 들어 대륙에 사는 대다수의 사람이 흑마법을 추종하거나, 아니면 흑마법사가 사람들이 가장 되고 싶어 하는 직업이 된다거나.”
“와아… 그렇게 되면 정말 신기할 것 같아요! 그럼 레바논이 이기면요?”
“그럼 지금과 같은 상태가 유지되거나, 역으로 검은 대지가 대륙의 손에 떨어질 수도 있겠지. 그리고…….”
나는 그렇게 안나가 나의 무릎을 베개 삼아 잠들 때까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해 줬다.
* * *
다음 날.
흑탑의 회장.
나가란 탑주가 모여든 수뇌부를 보며 입을 뗐다.
“이제 베논께서 말씀하신 약속의 날도 어느덧 반년가량이 남은 상태군. 레논, 언데드 제작은 얼마나 진행된 상태지?”
“현재까지 약 7만의 스켈레톤과 1만의 누더기 골렘 그리고 데스나이트 1천 기가 완성된 상태입니다.”
“흐음… 그럼 페른에 보냈던 병력에 기존 병력까지 합치면 약 30만 정도 모인 셈이군.”
나가란의 계산을 들은 레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거기다가 남은 반년간 추가로 언데드 제작에 박차를 가한다면, 능히 40만까지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40만이라…….”
나가란이 턱을 쓸어내리는 사이.
흥분한 수뇌부 중 일부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 정도 군세라면 대륙 따위는 쉽게 정복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과거, 놈들은 20만 군세에도 쩔쩔맸으니 말이지요!”
“하하하하하하! 이미 대륙은 우리의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 아니랍니까?”
좌중이 아름다운 미래를 상상하며 신나서 떠들던 가운데.
나는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만한 언데드를 통솔하기엔 흑마법사들이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갓 흑카데미를 졸업한 학생이 많게는 100구 정도의 스켈레톤을 정교하게 운용 가능하다고 봤을 때.
그와 비슷한 흑마법사가 적어도 4천은 필요할 터.
“흑남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한 명이 너무 많은 언데드를 통제하면 효율이 너무 떨어집니다.”
“레논, 40만의 언데드를 완벽히 운용하려면 인원이 몇이나 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나가란의 물음에 곰곰이 생각하던 레논이 입을 열었다.
“최소한… 5천 명 정도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전장에선 목숨을 잃는 경우가 다반사일 테니까요.”
“허어… 5천이라……. 각 학파의 병단에서 흑마법사들을 차출하면 해결할 수 있겠나?”
나가란의 물음에 수뇌부의 대다수가 화들짝 놀라 반대 의사를 표한다.
“병단마다 용도와 쓰임새가 있는데 겨우 언데드 운용 따위에 병단을 쪼개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차라리 운용할 언데드의 숫자를 줄이더라도, 병단의 분리는 있어선 안 됩니다!”
“아니, 그럼 기껏 만든 언데드들을 제대로 활용도 않고 소모품처럼 쓰다 버리겠다는 겁니까?!”
좌중이 해당 안건을 놓고 입씨름을 벌이던 중.
나가란이 좌중에게 한 가지 질문을 툭 던졌다.
“흑카데미의 학생들을 전장에 투입하는 건 어떤가?”
“…학생들을 말입니까?”
“그렇네. 학생들에게 실전을 경험하게 할 겸, 언데드들을 운용하는 흑마법사로 사용하는 걸세. 아무리 학생의 신분이라고 해도 언데드를 통솔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나?”
나가란의 의견에 레논이 굳은 표정으로 우려를 표한다.
“하지만 학생들을 투입하는 건 섣불리 결정할 수 없는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학생들의 부모들이 허락할지 확신조차 없는 상황입니다.”
“레논, 이번 전쟁은 그깟 가정사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닐세.”
나가란이 싸늘히 말을 이어 갔다.
“흑탑, 나아가 검은 대지의 흥망을 좌우하는 커다란 전투가 되겠지. 그러니 각 가문의 가주들도 응당 전쟁에 참여해야 할 것이고, 학생들 또한 마찬가지일세.”
“그, 그건 맞습니다만…….”
“애당초 흑카데미를 설립한 목적이 뭔가? 체계적인 과정을 통해 뛰어난 흑마법사를 육성하여 흑탑의 성세를 이끌어 가게 하기 위함이 아니던가?”
‘학생들을 전쟁에 동원한다는 건 그렇지만… 나가란의 말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야.’
그런 탓일까.
레논은 별다른 반박 의견을 내지 못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쯤 하지. 더 이상의 반박은 받지 않겠네.”
나가란 탑주가 수뇌부를 응시하며 무심히 한마디를 내뱉는다.
“약속의 날, 위대한 전쟁이 시작되는 그날을 위하여 학생들 또한 전쟁에 참전하는 것으로 하지.”
* * *
3일 뒤.
흑카데미의 중앙 복도에 설치된 게시판 앞에서.
수많은 학생이 서성이며 저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로 이렇게 몰려든 거야? 벌써 시험 공지가 뜨기라도 한 거야?”
“나도 잘 몰라. 볼드 학장님이 이곳으로 오라고 하셔서 온 거야. 일단 이야기를 듣고 학생들에게 전달하라고 하셨어.”
“…그래? 엄청 급한 일인가?”
학생들이 게시판 앞을 서성이며 의문을 표하던 그때.
그들 앞에 볼드 학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촤르르륵-
무심한 표정으로 양피지를 펼치는 볼드 학장.
“흑탑에서 공문이 내려왔다.”
“흐, 흑탑에서요?!”
흑탑이라는 말에 특히 졸업을 앞둔 학생들의 눈이 번뜩거렸다.
“혹시 흑탑에 들어갈 수 있는 학생의 숫자를 더 늘리겠다고 하는 것 아냐?”
“아니면 이번에 페른에 정식 지부가 생겼잖아! 거기의 인원이 부족해서 우리 중에서 더 뽑아 가려고 하는 걸지도 몰라!”
얼마 전, 전대 졸업생들 중 대다수가 페른의 지부로 발령이 난 탓일까.
학생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눈으로 볼드 학장의 입을 바라봤다.
“약 반년 뒤, 우리 흑마법사들은 위대한 대업을 이룩하기 위하여 대륙으로 진출할 것이다. 하나! 지금 우리는 인력의 부족으로 고충을 겪고 있다. 따라서!”
볼드 학장이 학생들을 쓱 훑으며 마저 양피지를 읽어 내린다.
“본 흑탑주 나가란은 학생들의 참전을 요구하는 바이다. 또한 이는 요청이 아닌 명령이다.”
마침내 볼드 학장의 연설이 끝나자.
“…….”
학생들은 우두커니 서서 멍하니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