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회의에서도 나온 적이 없는 안건인데. 어디서 저런 소문을 들은 거지?’
“아, 당신도 잘 모르는 걸 봐선 아무래도 그냥 헛소문이었던 모양이네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제이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흔들어 보이곤.
날 보며 말을 이어 갔다.
“그건 그렇고, 이제 신도들도 늘어났으니 슬슬 교단을 개편하는 건 어떨까요?”
“교단을 개편하다니?”
“신관을 육성한다든가 신전을 지어서 신도들을 더 끌어모으는 일 있잖아요. 지금 레바논에서 하고 있는 것들 말이에요.”
그녀의 대답에 나는 그제야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근데 그냥 놔둬도 상관없는 것 아냐?”
“그래도 상관은 없죠. 하지만 본격적으로 신도를 늘리려면 필요한 작업이긴 해요.”
‘음… 그건 그렇긴 하지. 그렇긴 한데…….’
그러면 반드시 맞닥뜨리게 될 문제가 있었다.
‘만약 교단을 개편해서 주신교의 성세가 급속도로 커져 나가면, 분명 레바논과 베논의 견제가 들어오겠지.’
어디 그뿐일까?
‘바알의 세력을 제거하라고 했던 것처럼 나한테 주신교를 멸절하라는 명령을 내리겠지.’
만약 두 신이 그런 명령을 내린다면 솔직히 이쪽은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분명 거절했다간 두 신이 날 의심할 게 뻔해. 그러면 일이 더 귀찮아질 수 있어.’
문제는 두 신의 견제는 결코 피할 수 없는 화살과도 같다는 것이었다.
‘주신교가 확장하는 이상, 반드시 겪어야 할 진통 같은 거니까. 음…….’
내가 언젠간 반드시 벌어질 일을 두고 깊이 생각에 잠겨 가던 중.
“뭘 그리 걱정하시는 건가요? 혹시 두 신이 주신교를 이단 취급 할까 봐 그러시는 건가요?”
“그래. 주신교가 바알처럼 이단 취급을 당하며 사람들의 지탄을 받는 상황은 반드시 찾아오겠지.”
나의 말에 제이나가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그렇긴 해요. 하지만 베논은 어떨지 몰라도 레바논은 섣불리 못 움직이지 않을까요?”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어깨를 으쓱이는 제이나.
“그야 얼마 전에 교황이 죽었잖아요? 거기다가 야심차게 일으킨 전쟁에서도 패배했고요. 그 탓에 지금 레바논은 완전 혼란한 상태잖아요.”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해 봐.”
그에 제이나는 레바논 왕국이 처한 현실을 간략히 언급해 줬다.
‘그러니까 파벌이 다른 대신관들끼리 개처럼 싸우고 있는 탓에, 대신관이랑 같은 라인을 타고 있던 성기사들이랑 신관들도 이권 다툼 중이다, 이 소리네.’
“음… 어느 정도 혼란을 겪을 거라 생각은 했었는데, 그 정도였다고? 이해가 안 되는데. 그냥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면 되는 거잖아?”
“교황은 성녀처럼 레바논이 선정하는 게 아니라 대신관들 사이에서 선출해요. 그러니 저렇게 서로 교황의 자리에 앉겠다고 싸우는 거죠.”
“그럼 내란까지 벌어질 가능성도 있겠네.”
나의 말에 제이나가 정답이라는 듯 손뼉을 친다.
“맞아요. 그래서 보통은 교황이 죽기 전에 미리 차기 교황을 선정하는 게 일반적인데, 아무래도 이번에는 별 유언도 못 남기고 죽은 것 같네요.”
“좋아. 그건 이해했어. 하지만 레바논 왕국의 상황과는 별개로 레바논이 나한테 명령을 내릴 수도 있는 거잖아?”
아무리 레바논 왕국이 혼란에 빠졌다 한들.
레바논이 혼란에 빠진 것은 아니잖은가?
“음… 그것도 그러네요. 주신교가 이단 취급 당하지 않을 방법이라…….”
제이나가 한참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더니 슬며시 질문을 던졌다.
“아니면 이단 취급을 당하기 전에 주신교를 엄청나게 키워 버리는 건 어떨까요? 두 신이 이단으로 몰아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크게 성장시키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면 좋겠지. 하지만 그걸 두 신이 보고만 있을까? 분명 그 전에 나설걸?”
나의 반박에 제이나는 다시 고민에 잠겨 갔고.
‘신들의 견제를 피할 방법… 주신교가 성장하면서도 이단 취급을 받지 않을 방법… 정말 없는 걸까?’
나 또한 고민의 늪에 빠져 들어 갔다.
그러던 그때.
‘가만… 어차피 주신교가 성장하면… 두 신의 견제를 피하는 게 어렵다면… 차라리 그걸 이용하는 건 어떨까?’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나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래… 그게 좋겠어.’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신들의 견제를 이용하는 건 어떨까.”
“신들의 탄압을… 이용한다고요?”
“그래.”
나는 담담히 말을 이어 갔다.
“두 신이 주신교를 탄압하는 걸 도리어 이용해서 신도들을 한번 솎아 내는 거지.”
그에 제이나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떠 보였다.
“신도들을 솎아 낸다는 게… 무슨 말인가요?”
“지금 나를, 주신교를 믿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지. 하지만 그들 중 몇이나 나를 진심으로 믿고 또 섬기고 있을까?”
“그건…….”
쉽사리 답하지 못하는 제이나를 보며 난 계속 말을 이어 갔다.
“목 끝에 칼이 들어와도, 가족이 순교를 당할 위기에 놓였다고 해도 나를 향한 믿음을 끝까지 지킬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 것 같아?”
“…적어도 몇천 명은 되지 않을까요?”
‘몇천? 내 생각이랑은 좀 많이 다른데?’
위기가 닥치거든 누구보다 생존 본능을 따르는 게 사람이다.
하물며 눈앞에 있지도 않은 주신을 위해 믿음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 몇천 명이나 된다?
“몇천이라… 그럼 나는 오백 명이 안 된다는 데 걸지.”
“그럼… 어떻게든 방안을 마련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신도들이 줄어서 좋을 게 없잖아요?”
“아니. 차라리 잘됐어.”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했다.
“어차피 신들의 견제가 끝나면 신도들은 금세 늘어날 거야. 그러니 탄압을 이겨 내고 나를 끝까지 믿는 자들에게는 그만한 상을 줘야겠지.”
“그럼… 신도들에게 경고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래야지. 머지않아 고난과 역경의 시기가 찾아올 테니까, 그 전까지 충분한 식량과 은신처를 마련해 두라고 말이야.”
나의 말에 제이나는 조심스럽게 우려를 표했다.
“다들 진심으로 그 말을 믿었으면 좋겠네요.”
* * *
한 달 뒤.
페른 왕국에 자리한 한 선술집에선.
두 남자가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거참. 내가 살다 살다 그런 일을 다 겪게 될 줄은 몰랐는데…….”
“무슨 일을 겪었는데 그렇게 뜸을 들이나?”
“자네는… 신을 믿나?”
친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묻자.
맞은편에 앉았던 남자가 손을 내두르며 답한다.
“난 아무도 안 믿어. 나 스스로를 믿고 살아야지 누굴 의지해서 뭐 해?”
“나도 얼마 전까지는 그리 생각했었네. 하지만 말이야… 주신을 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한테 한 가지 신기한 일이 벌어졌어!”
“…신기한 일?”
친우의 물음에 남자는 의자를 바짝 당기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니, 글쎄, 바로 엊그제 말이야. 내가 꿈을 꿨는데 그 꿈이 너무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더군.”
“무슨 꿈인데?”
그에 남자는 그때 당시를 떠올리는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곤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찬란한 광채에 덮인 남자가 이런 말을 했었지. 곧 환란의 시대가 도래할 거라고, 그러니 환란을 대비하라고 말이야.”
“…개꿈이라도 꾼 건가? 전쟁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환란은 얼어죽을 환란이야?”
“아니, 진짜라니까? 하도 신기해서 알아보니까 나만 그런 꿈을 꾼 게 아니었어!”
“그럼 자네 말고도 똑같은 꿈을 꾼 사람들이 있다는 건가?”
그에 남자가 술잔을 탁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그래! 주신을 믿는 사람들은 모두 나와 같은 꿈을 꿨거나, 환란을 대비하라는 목소리를 들었다더라.”
“허 참…….”
* * *
세 달 뒤.
커다란 광야.
“레바논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돌격!”
“놈들은 이단이다! 우리야말로 진정한 적통이다! 돌격!”
새하얀 갑주를 입은 기사들이 서로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격돌했고.
“신이시여!”
하늘을 수놓는 찬란한 성마법들이 서로의 진영으로 쏘아져 갔다.
히히히히히힝-
은혜로웠던 땅이 기사와 사제들의 피로 붉게 물들어 갈 무렵.
그 모습을 한가히 내려다보고 있던 베논이 슬며시 옆을 보며 입을 열었다.
[왕국의 꼴이 아주 가관이군. 저대로 놔둬도 괜찮은 건가?]
[뭐가요?]
레바논이 굉장히 언짢아 하며 대답하자.
베논은 먼 산의 불 보듯 무심히 말을 이어 갔다.
[그저 저 상황이 재미있다고 느껴졌을 뿐이다. 교황의 부재로 저런 결과가 생길 줄이야.]
[그래서 어쩌라고요? 박수라도 칠까요? 우리가 원하는 방향대로 가고 있으니까요?]
[왜 화를 내는 거지?]
베논의 물음에 레바논은 가감 없이 감정을 드러냈다.
[그럼 기뻐해야 하나요? 그러잖아도 저 사달이 나고 나서 신도들이 더 줄어들어서 짜증 나는데, 그쯤 해요.]
[어차피 사라질 목숨들이다.]
[그렇긴 한데, 얼마 전까지 날 믿던 놈들이 주신인지 뭔지 하는 잡신을 믿는 꼴을 보는 게 얼마나 역한 줄은 알아요?]
레바논이 좀처럼 분노를 가라앉히지 않자.
베논이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주신교를 이단으로 선포하고 없애면 그만 아닌가?]
[왕국 꼴을 봐요. 저 정도면 제가 신탁을 내린다고 해도 들어 처먹지도 않을걸요?]
[음… 그럼 내가 나서지.]
베논의 대답에 레바논은 의외라는 듯 그를 바라봤다.
[날 도와주겠다는 건가요?]
[그럴 리가. 다만 검은 대지와 페른에 있는 주신의 세력 정도는 내가 정리해 줄 수 있지.]
[거참 퍽이나 도움이 되겠네요. 그냥 주신교가 눈에 거슬렸다고 솔직하게 말해요.]
[어차피 대륙을 멸망시키면 사라질 놈을 신경 쓴들 의미가 있나?]
하지만 그리 말하는 것과 달리.
베논의 시선은 저 멀리 자리하고 있는 흑탑으로 향했다.
* * *
한편, 같은 시각.
흑탑의 회장.
“이제 다음 달이면 지부 건설이 끝난다고 합니다.”
“벌써 완성이 눈앞인 건가. 시간도 참 빠르군.”
“그럼 슬슬 지부로 보낼 사람들을 뽑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부에는 이번에 흑카데미를 졸업할 졸업생들을 대거 투입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분명 젊은이들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겁니다.”
중진들이 얼마 뒤 완성될 흑탑 지부를 놓고 대화를 나누는 것과 달리.
나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름대로 경고는 확실하게 했고. 이제 두 신이 어떻게 나올지가 관건인데.’
내 생각과 달리 아직까지도 두 신에게선 어떠한 조짐도 보이질 않았다.
‘아니면 설마 어차피 대륙을 멸망시킬 거니까 그냥 놔둔다거나 그럴 생각인 건가?’
내가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에 잠겨 있던 중.
“…남님. 흑남님!”
누군가가 나를 부르자 나는 생각을 멈추곤 고개를 쳐들었다.
“아, 예.”
“고민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하하, 아닙니다. 그보다 어쩐 일이십니까?”
나의 물음에 늙은 노마법사가 말한다.
“지부가 완성되거든 그래도 고위 인사 한두 분께서는 지부에 방문해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보면 역사적인 흑탑의 첫 정식 지부이니 말이지요.”
“뭐, 그렇지요?”
“그래서 페른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신 흑남께서 지부에 방문하시는 건 어떨지 의중을 물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축하 사절단 신분으로 지부에 방문해서 적당히 박수나 쳐 주고 돌아오라는 거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
“제가 가는 것도 좋지만, 페른과의 관계를 만들길 원하는 분을 보내는 게 여러모로 더 낫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그렇습니다만… 아무래도 지부장이 제른인지라 다들 꺼려 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아아… 다들 제른이랑 서먹서먹하니까 그냥 내가 갔다 와라? 뭐, 까짓것 한번 다녀오지 뭐.’
내가 고개를 끄덕이려던 그때.
[흑남은 들어라.]
돌연 근엄한 베논의 목소리가 나의 머릿속에 작렬했다.
[하명하시죠.]
[약속된 날이 머지않았다. 전쟁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해라.]
[물론입니다. 최선을 다해 준비 중입니다.]
실제로 이제 대륙 정벌까지 1년도 채 남지 않았기에.
흑마법사들은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는 상태였다.
[또한 최근 들어 점점 대륙에서 주신이라는 잡신을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 검은 대지에서도 말이다.]
[…그렇습니까?]
내가 아무렇지 않게 묻자.
다시금 베논의 거친 목소리가 나의 머릿속을 울렸다.
[검은 대지를 좀먹는 이단을 찾아내서 전부 처단해라. 특히 주신의 신도들은 보이는 족족 죽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