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결혼이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무래도 페른과 흑탑의 관계를 더 공고히 하고자 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흠… 설마 페른에서 정략결혼을 제안해 올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이번 전쟁으로 흑마법사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
페른에서 저런 제안을 한 걸까?
‘뭐, 따지고 보면 페른의 멸망을 막는 데 흑마법사가 큰 일조를 한 것도 사실이긴 하니까.’
나는 생각을 정리하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일단 카밀라 공주를 만나 보면 알겠지.”
* * *
나는 곧장 별관에 머무르고 있는 카밀라 공주를 찾았다.
‘다행히 자리에 있네.’
꺾어 온 꽃들을 다듬고 있는 공주가 보이자.
난 슬쩍 헛기침을 하여 인기척을 냈다.
“어머, 흑남님?”
그에 카밀라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연락도 없이 찾아온 점은 사과하지.”
“아니에요. 괜찮아요! 마침 차를 끓이고 있던 참인데 잘 오셨어요. 앉으셔요.”
나는 공주의 권유를 따라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여러모로 많이 바쁘신 분께서 이곳엔 어쩐 일로 오신 건가요?”
“서로 간에 대화가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야.”
“대화요?”
알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묻는 카밀라를 보며 난 웃음을 삼켰다.
“결혼 말이다.”
“아아, 그 일 때문이셨군요. 벌써 흑남님한테도 정보가 들어간 모양이네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이 안건으로 오래 시간을 끌고 싶진 않았기에.
나는 딱 잘라 단호히 말했다.
“난 너와 결혼을 할 생각이 없다.”
나의 대답이 끝나자.
잔에 차를 따르던 카밀라의 손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쪼르륵-
카밀라는 찻잔을 내 앞에 쓱 내밀곤 천천히 입을 뗐다.
“그건 좀… 많이 아쉽네요.”
“아쉽다고 하는 것치곤 별로 아쉬워하는 표정은 아닌 것 같은데.”
내 말에 카밀라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젓는다.
“그럴 리가요? 크게 기대를 하지 않았을 뿐이지 엄청 아쉬워하는 중이에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고?”
저 말인즉슨 그냥 한번 떠보듯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던져 봤다는 것 아닌가?
“네. 흑남님의 화려한 여성 편력에 대해서 들었었거든요. 그래서 공주 된 입장으로선 결혼이 성사되지 않은 게 아쉽지만, 한 명의 여자로선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내 여성 편력을 들었다고?”
“네. 이종족을 포함하여 무수히 많은 여성들을 만나고 그 뒤엔 모두 매몰차게 버린 희대의 난봉… 바람둥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던걸요?”
‘내가… 희대의 난봉꾼이라는 소문이 났다고?’
자고로 난봉꾼이란 여러 여자를 후리고 다니는 남자에게 붙는 수식어이건만.
어째서 그 단어가 내게 붙었단 말인가?
“왜 그런 소문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왜곡된 부분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럼 여러 여자를 만났다는 소문이 잘못됐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러 여성을 만나 본 건 분명한 사실이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서로를 알아 가는 과정만 거쳤을 뿐이지, 네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관계는 갖지 않았다.”
“그 관계라면…….”
“당연히 후계자를 만드는 행위지.”
내가 대수롭지 않게 말한 것과 달리.
카밀라 공주의 얼굴은 점점 새빨갛게 물들어 갔다.
“그, 그런 파렴치한…….”
“어쨌건 네가 생각했던 그런 난봉꾼스러운 일은 없었다는 거다.”
나의 대꾸에 얼굴을 붉혔던 카밀라도 차츰 안정을 되찾아 갔다.
“어, 어쨌건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여하튼 저와 결혼을 할 생각은 없으시다는 거잖아요?”
‘그렇기야 한데… 저런 식으로 나오니까 괜히 골리고 싶어지네.’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혹시 나와의 결혼을 기대하기라도 했나?”
“그건…….”
긍정하자니 자존심이 상할 것이고, 부정하자니 나를 욕하는 상황이 될 것 같아 안절부절못하는 그녀를 보며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하! 걱정 마. 그럴 일은 없을 테니까.”
“…….”
농담이라는 걸 안 카밀라 공주가 살며시 날 흘겨봤다.
“…어쨌건 흑남님의 생각은 잘 알았어요. 그래서 말이죠. 전 페른을 대신하여 흑탑에 한 가지 요청을 하려고 해요.”
“요청?”
‘무슨 부탁을 하려고 저렇게 진지한 표정을 짓는 거야?’
전쟁으로 엉망이 된 농토 복구를 위해 스켈레톤이라도 파견해 달라고 하려는 걸까?
‘잡부로 쓰기에 스켈레톤이 제격이긴 하니까.’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하던 중.
공주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우리 페른에 흑탑 지부를 세워 주셨으면 해요.”
“…지부를 세워 달라고? 지부는 이미 있을 텐데?”
애당초 페른을 지원한 것도 지부의 포털을 이용하여 한 것이건만, 지부를 세워 달라니?
“우리가 원하는 건 그런 은밀한 지부가 아니에요. 백탑을 예로 들자면, 백탑에 비하면 크기가 작긴 해도 백탑의 지부들도 탑이 있잖아요?”
‘잠깐. 그 말은…….’
내가 놀라움 감추지 못하자.
카밀라가 힘껏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맞아요. 우리는 흑탑이 페른에 정식 지부를 세워 주길 원해요.”
‘허… 페른에다가 흑탑을 지어 달라고?’
이건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요구였다.
“페른에 흑탑을 지어 달라는 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는 알고 있겠지?”
“이미 우리는 한배를 탄 사이잖아요? 저와 결혼하는 게 싫으시다면 지부 정도는 지어 줄 수 있지 않을까요?”
‘지부를 지어 페른과 흑탑과의 결속력을 더욱 다진다? 솔직히 나쁘지는 않아. 나쁘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이 건은 나 혼자 결정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근데 그건 그렇고… 사실 결혼은 그냥 던져 본 거고 지부를 건립하는 게 주목적이었던 건가.’
나는 실소를 흘리며 입을 뗐다.
“애당초 내가 결혼을 거절할 거라고 예상했던 모양이네.”
“설마요? 전 혼약을 거절당해서 굉장히 가슴이 아프답니다.”
카밀라는 한없이 슬픈 기색을 보였으나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연기가 아주 그냥 수준급이네, 수준급이야.’
내막을 모르는 이가 봤다면 그녀가 정말 슬퍼하는 중이라 생각할 정도로 말이다.
‘솔직히 이용당한 감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지부 설립은 꽤 괜찮은 생각 같은데?’
만약 페른에 흑탑이 들어선다면 페른의 친흑마법사화도 가속화될 것이고.
나아가 흑마법사에 대한 인식도 더 긍정적으로 바꿔 놓을 수 있을 터.
‘그럴 가능성은 낮긴 하지만 정벌하러 가는 곳마다 백기를 들 수도 있는 것 아냐?’
그럼 구태여 전쟁을 할 것도 없이 대륙 정복도 가능할 것이고.
대륙의 멸망을 원하는 신들의 행보에 커다란 방해가 될 게 분명했다.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곤 입을 열었다.
“어쨌건 페른의 입장은 잘 알았다. 하지만 그건 나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야. 회의를 한 뒤에 결과를 이야기해 주지.”
“알겠어요. 흑남님의 배려에 감사드려요.”
* * *
이틀 뒤, 점심.
나는 다시 별관을 찾아가 카밀라 공주와 대면했다.
“회의 결과를 알려 주러 왔다.”
“네. 말씀하세요.”
나는 잔뜩 긴장한 카밀라를 보며 계속 말했다.
“일단 지부를 설치하는 것에 대해선 전원 이견이 없었다.”
“정말요?! 정말 다행이네요.”
“다만 지부를 짓게 되면 페른에서 몇 가지, 해야 할 일들이 있다.”
내 말에 카밀라가 고개를 끄덕인다.
“말씀하세요.”
“일단 왕국 내에서 출중한 인재들을 찾아내어 흑마법사 육성에 심혈을 기울일 것. 그게 첫 번째 일이다.”
“그건 당연히 해야죠!”
단호히 말하는 카밀라를 보며 나는 피식 미소를 흘렸다.
“그리고 두 번째. 알다시피 흑마법사는 사람을 주 재료로 사용한다. 즉, 시체 수급이 원활해야 한다는 거지.”
나는 카밀라를 보며 나지막이 물었다.
“그것도 감당할 수 있겠어?”
“…죄수들을 이용하면 되지 않을까요?”
“왕국에 죄수들이 범람하지 않는 한, 죄수들만 갖곤 시체를 수급하긴 어려울 텐데? 결국 사람을 납치하거나 전쟁을 해야 원하는 만큼의 시체를 얻을 수 있겠지.”
점점 낯빛이 어두워지는 카밀라 공주.
“페른은 그만한 각오가 되어 있나? 주저 않고 다른 왕국의 백성을 납치하거나 필요하다면 전쟁도 할 수 있겠어?”
“…….”
카밀라는 한참이고 말이 없다가.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사그라질 때쯤이 돼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도 적으로 돌린 마당에 뭘 망설이겠어요? 뭘 받아들이건 그에 따라올 대가를 지불할 용기가 없었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우리 페른은… 그 어떤 것이라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어요.”
그녀의 눈동자에 서려 있는 결의를 본 나는 무심히 말을 이어 갔다.
“그만하면 됐다. 다음 달쯤, 이쪽의 인력들이 페른으로 넘어갈 거니까 미리 준비해 둬.”
“알겠어요. 그런데 지부장은 누가 되는 건가요? 혹시… 흑남님이 하시는 건가요?”
‘하겠냐?’
“그럴 리가? 당연히 난 아니고, 지부장 자리에 적합한 인물을 보내기로 결정한 상태다.”
“누군가요?”
“너도 잘 아는 사람이야. 이번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던 제른을 보내기로 했다.”
* * *
나는 카밀라와 지부 설립 일정 조율 등, 지부에 관한 세부 사항들을 논한 뒤.
저녁이 되어서야 집무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페른에 흑탑이 들어선다라……. 내 참, 예전이었다면 진짜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을 텐데.’
대륙의 지탄을 받던 흑탑이 이제는 대륙에 보라는 듯 떡하니 지부를 세운다니.
‘세상사 참 재밌어.’
내가 속으로 웃음을 흘리던 중.
“흑남님! 흑남님!”
안나가 날 부르며 허겁지겁 내 앞으로 달려온다.
“무슨 일이야?”
“이것 좀 보세요! 제가 흑마법을 사용했어요!”
안나가 자랑스럽게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썩은 내가 진동하는 쥐의 사체였다.
“호오… 어디 한 군데 치우친 곳 없이 골고루 잘 썩은 걸 봐선, 부패 저주가 잘 걸린 것 같네. 이걸 정말 네가 한 거니?”
“네! 제가 한 거예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안나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허 참… 설마 벌써 부패 저주를 사용할 줄은 몰랐는데. 안나의 성장세가 내 생각 이상으로 빠른 것 같은데.’
적어도 흑마법에 대해 인지하고, 적응하는 데 몇 개월은 족히 소요될 것이라 생각했건만.
안나는 그 이상의 것을 내게 보여 주었다.
‘이거 아무래도 안나의 몸을 좀 살펴봐야겠는데.’
“안나야, 잠시 너의 상태를 좀 확인해 보자.”
“네!”
나는 안나의 등에 손을 올리곤 천천히, 또 신중히 그녀의 몸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나의 기운이 그녀의 심장에 이르자.
‘호오… 이것 봐라.’
나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갖고 있는 두 개의 심장 중.
왼쪽 심장에 검은 고리 하나가 뚜렷이 자리하고 있는 게 아닌가?
“혼자서 한 거니? 아니면 다른 교수들이 도와준 거니?”
“저 혼자 한 거예요!”
‘아직 수업도 많이 안 들었을 텐데 자력으로 서클을 만들어 냈다고?’
아무래도 안나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의 재능을 갖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내가 괴물을 주워 온 건 아니겠지?’
나는 놀라움을 숨기곤 최대한 덤덤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설마 벌써 1서클의 경지에 올랐을 줄이야……. 굉장하구나. 역시 그분께서 선택하신 사도답다.”
“헤헤.”
나의 칭찬이 그리도 좋았던 건지.
안나는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거기서 안주하지 말고 더욱 정진해야 된다. 흑마법의 길은 끝이 없으니 말이다.”
“네, 사도님!”
나는 힘차게 답하는 안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옐리치는 어디로 갔는지 아니?”
“아마 도서관에서 책을 보고 있을 거예요!”
“그래?”
‘원하는 걸 찾으라고 했더니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는 모양이네.’
내가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덜컥-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열곤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다.
“저 왔어요.”
“언니!”
어딘가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제이나를 본 안나가 서둘러 달려가 그녀의 품에 안긴다.
“어머, 안나구나. 기운도 좋네.”
처음에는 어색한 기류가 흘렀던 두 사람이었건만.
지금은 누나와 조카 사이처럼 가까워진 모양이다.
“마침 잘 왔네. 이쪽에 앉아.”
“안나야, 잠시 흑남님이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책은 다음에 읽어 줄게. 알았지?”
“네!”
안나가 옆구리에 낀 책을 아쉽게 바라보며 방으로 들어가자.
“안나랑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자리에 앉은 제이나가 넌지시 질문을 던져 왔다.
“딱히 별 이야긴 안 했지.”
“그래요? 안나의 표정이 유독 밝아 보여서 뭔가 했는데……. 아 참,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흑탑에서 이야기 하나를 들었는데 당신이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요.”
“물어봐.”
내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자.
제이나는 의자를 바짝 끌어당기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흑탑이 혈탑과 시련의 탑을 흡수해 하나의 탑으로 만든다는 소문이 돌던데… 진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