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41화 (141/200)

◈ 141화

[페른을 배신하게 하라고?]

[그래요. 그럼 모든 게 깔끔해지지 않겠어요.]

레바논의 말에 생각에 잠겨 있던 베논이 무심히 그녀를 쳐다본다.

[그렇기는 하지. 그런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뭐라고요?]

[이미 이번 전쟁으로 인해 멸망의 기틀은 충분히 마련됐다. 저길 봐라.]

베논은 저 멀리, 인간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새하얀 탑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 갔다.

[이번 전쟁으로 긴장감을 느꼈는지, 마법사들도 본격적으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또한 드루이드, 정령사들 또한 이 전쟁으로 느낀 바가 있는지 전쟁을 준비 중이다.]

[…그래서요?]

[일이 이렇게 되면 이제 굳이 우리가 손을 쓰지 않더라도 알아서 전쟁들을 벌일 거다. 하지만 페른이 완전히 멸망해 버린다면 도리어 페른의 멸망을 발판 삼아 평화의 기틀을 다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렇기야 하죠. 하지만 계획대로 페른을 멸망시켜야 내 자존심이 살 것 같아요. 자꾸 잡신이랑 비교하는 것도 기분 나쁘다고요.]

레바논의 대답에 실소를 흘리는 베논.

[내가 신경 쓸 때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더니 정작 자신이 잡신과 비교당하니 기분이 언짢은 모양이지?]

[그건……. 그럼 정말로 연합군이 퇴각하는 걸 놔둘 건가요? 이대로 전쟁을 마무리할 거냐고요!]

[이미 이곳에서 시작된 전란의 불씨는 각 왕국으로 퍼져 나갔다. 비록 결과는 우리가 원하던 결과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땐 오히려 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었으니 이쯤에서 마무리를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 * *

5일 뒤.

공성 병기에 곳곳이 박살이 난 에스더성의 성벽 위.

화톳불 주변에 모여든 병사들이 성 밑에 즐비한 시체들을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군 놈들, 어째 오늘도 조용하네.”

“그러게 말이야.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하는 것 아냐? 또다시 산맥을 넘어오려고 한다든가…….”

“언데드들한테 그렇게 쓴맛을 보고도 또 산맥을 넘어오려고 하겠어? 저쪽 지휘관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결정을 내리진 않을걸?”

“적일 땐 참 끔찍한 존재들이었는데 아군이 되니까 믿음직스럽긴 하네.”

병사들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연합군을 놓고 온갖 의견을 꺼내 놓던 그때.

“이, 이봐! 저것 봐! 저기를 좀 보라고!”

성의 망루에 자리하고 있던 병사가 소리를 지르며 연합군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연합군이 물러나고 있다! 연합군이 물러나고 있어!”

“…뭐라고?!”

감시병의 외침에 성벽을 지키던 병사들은 목을 쭉 내빼고 저 멀리 전방을 응시했다.

“허… 지, 진짜네?”

감시병의 말대로 막사를 철거하고 차례차례 회군하는 연합군의 뒷모습이 그들의 시야에 어렴풋이 들어오자.

벙찐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병사들이 하나둘, 팔을 번쩍 쳐들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우, 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이겼어! 우리가 에스더성을 지켜 냈다!”

“백스 자작님 만세!”

“와아아아아아아! 정말로 주신께서 에스더성을! 우리를 지키셨다!”

약 1년.

페른을 완전히 짓밟고자 했던 연합군은 결국 에스더성이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물러나야만 했고.

병사들 사이에서 은은히 퍼져 나갔던 주신, 랄프의 이름은 회군한 병사들에 의해 조금씩, 조금씩 대륙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 * *

한 달 뒤.

히히히히힝-

‘이 땅을 다시 밟는 것도 거의 1년 만인가.’

다시금 밟는 이 검은 대지의 감촉과 저 멀리 보이는 흑탑이 묘하게 반가웠다.

“이제 곧 도착이군요.”

내 옆에서 함께 말을 몰던 제른이 넌지시 말을 건네 오자.

나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돌아왔네.”

“페른에서의 대접이 워낙 훌륭해 만족스러웠지만, 역시 전 이곳이 편한 것 같습니다.”

“그래? 전쟁터가 더 좋았다고 할 줄 알았더니 의외네.”

나의 말에 제른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는다.

“전쟁은 시작하기가 어려울 뿐입니다. 도화선에 불이 붙은 이상, 이제 곧 대륙 곳곳에서 전쟁이 시작될 거라 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겠지. 거기다가 베논 님께서 약조한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뭐, 여하튼 근 1년간 수고 많았다.”

최전방에서, 것도 험준한 산맥을 지키며 에스더성을 지킨 제른의 공훈은 다른 어떤 장수와도 비교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제른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전 흑남께서 뒤에서 힘써 주신 게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백스 자작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

“만약 백스 자작이 사형을 당했다면 에스더성의 운명도 장담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래서 전 백스 자작의 목숨을 살린 흑남님의 판단과 결정이 이 전쟁의 운명을 뒤바꿔 놓았다고 생각합니다.”

‘으음… 그거야 그렇지. 물론 그 뒤로는 거의 포교 활동에만 전념했지만.’

구태여 이 기분 좋은 날, 그런 사실을 언급할 필요는 없었기에.

나는 미소로 대신 답했다.

이윽고 우리가 흑탑 언저리에 도착하자.

“흑남님의 귀환을 환영합니다!”

“제른 님 만세! 흑남님 만세!”

수많은 군중이 좌우로 늘어선 채 우리를 향해 꽃을 던지며 환호성을 질렀다.

‘이런 환영은 또 처음이네.’

낯선 상황에 난 덤덤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 보였다.

“흐, 흑남님께서 이쪽을 봐 주셨어!”

“이 얼간이가 뭐라는 거야?! 네가 아니라 날 보셨다고!”

우리가 꽃이 깔린 길을 지나 흑탑 앞에 도착하자.

“참으로 잘들 해 줬네. 자네들의 노고 덕에 흑탑의 위상이 더 드높아졌네.”

많은 흑마법사들을 위시하여 나가란 탑주가 활짝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페른을… 페른을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정말로요.”

또한 페른에서 왔던 카밀라 공주 또한 눈물을 머금곤 우리를 환대하자.

나는 슬며시 그녀의 옆으로 말을 이동시키곤 작게 속삭였다.

“나는 내가 한 약속을 지켰다. 그러니 이제는 네 차례다. 약조를 잊지 마라.”

내 속삭임에 카밀라 공주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에요! 제가 고국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주신교를 페른의 국교로 만들어 보이겠어요!”

“좋아.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는 걸로 하자고.”

흑탑으로 복귀한 뒤.

난 정말 숨 돌릴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어우… 연회는 무슨 놈의 연회야.’

말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연회에 참여하여.

나와 안면을 트고자 하는 가주들과 가문의 여식을 상대하는 건 정말이지 너무 지치는 일이었다.

* * *

준비된 연회가 끝나고 밤이 찾아오고서야.

나는 마침내 나의 침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거의 1년이나 자리를 비웠는데도 깔끔하네. 제이나가 관리한 건가?’

어디 한 군데 먼지 쌓인 곳이 없는 걸 봐선.

아마 내가 페른에 가 있는 동안 누군가가 계속 관리를 해 준 모양이다.

‘내일도, 내일모레도 연회에 참석해야 하는 게 귀찮긴 하지만… 별수 없지.’

연회의 주인공이 연회에 참여하지 않으면.

연회를 준비한 나가란 탑주에게 굉장한 실례가 되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저…….”

내가 생각을 이어 가던 중.

나를 따라왔던 예비 사도 3호 옐리치가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로, 롤프 사도님께서는 흑마법사셨던 겁니까?”

“그래. 그런 신분 또한 갖고 있긴 하지.”

“흑마법사는 굉장히 무서운 사람들 아닌가요?”

사도 2호, 안나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물어 오자.

나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

“대륙에 퍼진 인식이 그렇긴 하지. 하지만 안나야, 빛이 있으니 그림자가 있잖니?”

“그렇죠?”

“흑마법사도 마찬가지란다. 주신께서 아무런 이유도 없이 흑마법사들을 만드셨을까? 빛도, 그림자도 저마다의 쓰임새가 있단다.”

나의 대답을 들은 안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한다.

“그럼 흑마법사도 필요한 존재라는 건가요?”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또한 너희가 주신의 사도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해야 될 게 하나 있지.”

“그게 뭔가요?”

“훌륭한 흑마법사가 되는 것.”

나의 말에 두 사람의 얼굴에 물음표가 걸렸다.

“후, 훌륭한 흑마법사요?”

“그래. 특히 안나, 너는 사도 중의 사도가 될 자질을 갖고 있다. 그러니 일단 흑마법을 먼저 배우고, 그 뒤에는 성마법 또한 익히게 할 거야.”

나의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한 건지.

옐리치가 조심스레 질문을 던져 온다.

“그 말씀은… 안나가 신관도 되고 흑마법사도 된다는 것입니까?”

“그래. 주신께선 백과 흑, 모든 걸 포용하시는 분이다. 그러니 그분의 사도가 될 안나 또한 두 힘을 모두 섭렵할 필요가 있는 거지.”

“저, 저도 가능한 겁니까?”

옐리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애석하게도 주신께서 네게는 한 가지의 선택지만을 허락하셨다.”

‘물론 인공 심장이라는 변수를 주면 되긴 하겠다만… 불완전한 실험을 옐리치에게 하고 싶진 않아. 뭐, 옐리치는 흑마법사의 끝을 보게 하면 되겠지.’

나는 생각을 끝마치곤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네게도 그분의 사도가 될 기회가 열려 있다.”

“저는…….”

고민에 잠겨 있던 옐리치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제게 주신님의 사도가 될 자격이 부족하다면, 저보다 더 나은 사람이 주신의 사도가 되는 게 옳다고 봅니다. 저는 그저 옆에서 안나를 보좌하는 걸로 만족합니다.”

“으음… 그래? 네 뜻이 그렇다면야……. 다만 그렇게 되면 안나와 떨어지는 시간이 길어질 수도 있을 텐데, 괜찮겠어?”

“저는 롤프 님의 결정을 믿습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수락하는 옐리치를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좋다. 그분의 제1사도로서 안나를 위대한 주신의 사도로 만들 것을 약속하마.”

“감사합니다!”

하나 옐리치를 가만히 놀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기에 나는 그에게 한 가지 숙제를 내 주기로 했다.

“하지만 너 또한 뭐든 좋으니 관심이 가는 걸 찾도록 해. 그리고 발견하거든 내게 이야기를 하고. 뭐가 됐건 지원해 주마.”

“알겠습니다!”

“일단 사도에 대해선 이쯤 하고…….”

나는 무게를 잡곤 계속 말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중요한 이야기요? 그게 뭔가요?”

“너희가 지금 머물고 있는 이곳이 어디지?”

내 물음에 안나가 오른팔을 번쩍 쳐든다.

“흑탑이랑 흑카데미요!”

“그래. 그럼 한 가지 더 질문할까? 흑마법사들이 믿는 신은 누굴까?”

“으음…….”

한참을 깊이 고민하던 안나의 표정이 울상으로 변했다.

“…모르겠어요.”

“마신, 베논. 그게 흑마법사들이 섬기는 신의 이름이야.”

“베논… 베논…….”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듯 베논의 이름을 되뇌는 안나를 보며.

나는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래, 베논. 이 검은 대지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베논을 믿고 또 섬기고 있지. 그런데 만약 우리가 주신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게 되면 어떻게 될까?”

“음… 어… 큰일 나요!”

“그렇겠지?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

그에 안나는 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대며 작게 속삭였다.

“조용히 해야 돼요.”

“그래. 우리가 주신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은 철저하게 숨겨야 돼.”

“그, 그럼 계속 숨겨야 하는 겁니까?”

옐리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적어도 내가 괜찮다고 하기 전까진 철저하게 비밀을 지킬 필요가 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네!”

“며, 명심하겠습니다!”

* * *

다음 날, 아침.

“자, 이제 가 볼까? 기분은 어떠니?”

시녀의 손을 거쳐 예쁘장하게 차려입은 안나에게 나는 손을 내밀며 물었다.

“기, 긴장돼요. 괜찮을까요?”

자그마한 손에서 진동이 느껴지자.

나는 입 밖으로 나오려는 실소를 참으며 덤덤히 답했다.

“걱정할 것 없어. 그저 너와 비슷한 나이대의 친구들과 함께 공부를 한다고 생각하면 돼.”

“아, 알겠어요! 사도님! 저, 열심히 할게요!”

애써 전의를 다져 보이는 안나.

“좋아. 그럼 이만 이동해 볼까?”

나는 안나를 데리고 바로 밑층에 자리하고 있는 흑립 유치원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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