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주신? 랄프? 그건 또 누군가?”
“나도 자세히는 몰라. 페른에서 믿는 신인 것 같은데 뭔가 소문이 꽤나 그럴싸하단 말이지?”
병사의 말에 동료들은 슬며시 호기심을 드러냈다.
“무슨 소문인데 그래?”
“얼마 전에 잡혀 온 포로한테서 들은 건데, 주신의 사도가 페른 곳곳에서 병자들을 치유하고 다녔다더라고.”
“뭐야. 그 정도야 신관들도 할 수 있는 거잖아?”
동료의 반박에 병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그렇지만도 않아. 듣자 하니 장님의 눈도 뜨게 해 주고, 귀머거리는 들을 수 있도록 고쳐 줬다더라.”
“엉?! 아무리 소문이라고 해도 그렇지… 날고 기는 신관들도 장님은 못 고치는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동료가 비웃듯 말하자 주신을 언급했던 병사가 단호히 말한다.
“아, 정말이라니까 그러네. 나라고 그런 소문을 쉽게 믿었을 것 같아? 포로 한 명만 그런 게 아니라 대부분이 다 그런 소리를 해 댔으니까 그런 거지!”
“뭐, 그렇다고 해도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페른에서 믿는 신을 우리가 믿을 이유도 없는 데다가, 흑마법사들이랑 손잡은 놈들의 신이면 더더욱 믿어선 안 되는 것 아냐?”
“그렇긴 하지. 근데 솔직히 흑마법사고 신관이고 높은 놈들 이권 다툼 따위 알 게 뭐야? 거기다가 믿어서 나쁠 것도 없잖아? 혹시 알아? 주신을 믿은 덕에 우리가 이 전쟁에서 무사히 살아서 돌아갈지?”
“음…….”
동료들이 섣불리 대답하지 못하자, 병사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거기다가 막말로 이 전쟁을 일으킨 건 레바논 왕국이잖아? 과연 레바논이 막무가내로 전쟁을 일으켰을까? 분명 신탁을 받아 가지고 움직였겠지.”
“그야 그렇지…….”
“그럼 전쟁을 하라고 명령한 레바논을 믿을 바엔 차라리 사람들을 치유해 주고 다니는 주신을 믿는 게 낫지.”
병사의 말이 끝나자 일부는 그의 설득에 넘어갔는지 별 대답이 없었고.
“그것도 그렇긴 하지만…….”
“난 됐다. 난 애당초 신을 안 믿어.”
무신론자와 망설임이 많은 병사들은 선뜻 병사의 말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하나.
한 달, 두 달…….
네 달.
들판에 우거져 있던 꽃들 위로 시체가 쌓이면 쌓일수록, 연합군과 페른군과의 대치가 길어질수록.
주신 랄프의 이름은 점점 연합군 내로 스며들어 갔다.
“도대체 주신 랄프가 뭔데 병사들이 믿는 것이냐?!”
이러한 소문을 놔둘 수 없었던 건지, 이번 전쟁을 총지휘하던 대신관 엔더가 수뇌부를 보며 크게 일갈했다.
“그게… 페른에서 믿는 신들 중 하나인 것 같은데… 아무래도 포로를 통해 유입이 된 모양입니다. 또한 이미 일부 병사는 주신을 신봉하는 것 같습니다.”
“…뭐라고? 감히 레바논 님을 두고 잡신을 섬기려고 해? 이것들이 정녕 미친 게 분명하구나! 지금 이 시간 이후로 주신인지 뭔지 하는 걸 믿는 놈들은 엄벌에 처하겠다고 전해라!”
대신관의 엄포에 기사들을 비롯하여 장수들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던 그때.
성기사 한 명이 황급히 막사 안으로 들어온다.
“대신관님! 보, 본국에서 급보가 왔습니다.”
“급보? 무슨 급보가 왔다는 건가?”
“그게…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기엔 조금…….”
“그냥 말해!”
이미 주신 랄프 소동으로 인해 기분이 언짢았던 걸까.
대신관이 격노하자 성기사는 할 수 없다는 듯 힘겹게 입을 뗐다.
“그것이… 교황님께서 위독한 상태라고 합니다.”
“…뭐라고?”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좌중의 눈치를 보는 엔더 신관.
묘하게 뒤바뀐 수뇌부의 표정을 본 그는 한숨을 토하며 말했다.
“교황님께서 왜 위독하시다는 거지? 누가 암살이라도 시도한 건가?”
“그건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나이가 있으셔서 그런 모양입니다.”
“허어… 하필 이 시국에…….”
교황이 사경을 헤맬 정도로 위중하다는 급보가 온 그날.
주신, 랄프를 믿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는 명령이 연합군 전원에게 떨어졌다.
* * *
주신 랄프를 믿는 걸 금지하는 명령이 연합군 내에 떨어진 지도 몇 달이 흘렀다.
푸르렀던 산맥과 들판은 어느덧 노랗게 물들어 갔고, 에스더성은 좀처럼 함락되지 않던 가운데.
하나의 소식이 벼락같이 빠르게 연합군 내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보게들! 들었나!?”
“듣긴 뭘 들어? 도미닉 왕국의 제3기사단이 개박살 난 거라면 듣긴 했네만…….”
“아니! 그보다 더 엄청난 소식이라고!”
잔뜩 흥분한 병사의 외침에 동료들은 의구심을 보였다.
“무슨 소식인데 그래? 에스더성이 무너지기라도 했대?”
“지금 레바논 왕국에서 아주 그냥 난리가 났다고 하더군!”
“아, 씨… 도대체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동료들이 짜증을 부리자 소식을 들고 온 병사가 어깨를 바짝 세운 채 소리쳤다.
“교황이 죽었대!”
병사의 말에 다른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교황이… 죽었다고? 교황은 영원히 사는 것 아니었어?”
“영원히 살기는 무슨……. 그보다, 어쩐지 신관들이랑 성기사들의 표정이 울상이더라니… 그 이유 때문이었구나.”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이 전쟁… 계속하는 거야?”
“글쎄… 레바논의 우두머리가 죽었으니 철수하지 않겠어?”
병사들이 소문을 두고 바삐 논쟁을 벌이던 중 누군가의 질문이 그들의 귓전을 울렸다.
“근데 교황은 왜 죽은 거래?”
“글쎄… 그건 잘 모르겠는데. 지병이라도 앓고 있었던 것 아냐?”
“아니면 주신의 저주를 받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저 에스더성이 무너지지 않는 것도 전부 주신 때문이라던데?”
한 병사의 말에 옆에 있던 동료가 묻는다.
“그럼… 우리가 공격하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것 아냐? 신이 지키는 성을 우리가 무슨 수로 뚫어?”
“그러게 말이야. 솔직히 이제는 흑마법사고 나발이고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애당초 이 전쟁도 레바논 왕국만 아니었으면 굳이 할 전쟁도 아니었잖아?”
“근데… 이렇게 공격해도 안 뚫리는 걸 보면 레바논보다 주신이 더 상위 신인 것 아냐? 주신이 더 상위 신이라 레바논이 공격을 해도 소용이 없는 거지. 교황도 진짜 주신의 저주 때문에 죽은 거고.”
“…그런가?”
몇 달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어도 좀처럼 에스더성을 함락하지 못한 데다가 교황까지 사망한 탓일까.
병사들 사이에서 회의적인 분위기가 만연해져 가자.
“도대체 이곳에서 몇 달째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거랍니까?!”
“교황님의 서거 소식까지 퍼져 버려 병사들의 사기가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대책 마련이 절실합니다!”
연합군 수뇌부의 발등에도 커다란 불덩이가 떨어졌다.
“하나 놈들의 저항이 너무 드셉니다! 거기다가 어떻게든 성을 정복하려고 해도 지형 때문에 그마저도 쉽지가 않고요.”
“양옆의 산맥이라도 차지하면 차라리 길이 험준하더라도 에스더성을 돌아서 가면 되는데, 이놈의 언데드 새끼들이 잠도 안 자고 계속 산맥을 지키는 통에…….”
기사들과 귀족들의 입에서 연달아 암울한 소리만 흘러나오자, 엔더 대신관은 깊게 한숨을 토하며 물었다.
“정녕 다른 방도는 없답니까? 차라리 에스더성 공략을 포기하고 서부나 동부 지역을 뚫고 가는 건 어떻습니까?”
“이보시오! 엔더 대신관! 우린 이미 이곳에서 수많은 피와 군량을 소모했소! 그런데 이제 와서 전략을 바꾸면 지금껏 소모한 것 그 이상을 소모해야 한다는 걸 모른단 말이오!”
“그럼 이대로 물러나기라도 하자는 겁니까?!”
엔더 대신관의 일갈에 페이크 왕국의 장수들 중 한 명이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지. 그리고 지금 그쪽이 전쟁에 신경 쓸 여유가 있긴 한지도 모르겠는데?”
“…그게 무슨 말이지?”
“교황이 죽었는데 이 전쟁을 지속해도 되는 거냐고 묻고 있는 거다.”
장수가 빈정거리듯 말하자 엔더 대신관의 미간에 굵은 혈관이 잡혔다.
“그건 그쪽이 신경 쓸 게 아니다.”
“오오, 그래? 물론 나도 상관할 건 아니지. 근데 만약에 네 반대 파벌이 교황이 없는 사이에 자리를 먹어 치우면 어쩌나 해서.”
그의 한마디가 답답하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히자, 엔더 대신관의 얼굴은 점차 딱딱하게 굳어 갔다.
“그 또한… 네가 신경 쓸 게 아니다.”
“오, 그래? 그럼 계속 전쟁을 지속하든가. 우리야 받기로 한 땅은 점령했으니 상관없어. 그건 다른 왕국들도 마찬가지일 거고 말이야.”
페이크 왕국의 장수가 한껏 빈정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
“참 아쉽게 됐어. 애당초 신이나 찾던 무능한 놈이 병사들을 통제하지 않았다면 진작 에스더성을 뚫었을 텐데 말이야. 그렇지 않습니까?”
그가 다른 기사들의 동의를 구하듯 묻자, 참다못한 엔더 대신관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고함을 친다.
“이 무엄한 새끼가! 감히 일개 장수 따위가 지금 날 모욕하는 거냐?!”
“내가 틀린 말을 하기라도 했나? 몇 달이 지나도록 별다른 성과도 없었는데?”
“이 새끼가!”
“대신관님! 군터 장군! 두 분 다 흥분하셨습니다! 진정들 하십쇼!”
사령부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험악해지는 중에도, 군터 장군은 빈정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일각에선 레바논이 주신보다 하위 신이라는 소문이 돌던데. 겨우 성 하나도 못 뚫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네.”
“감히… 감히 레바논 님을 모욕해!”
대신관이 포효하며 지팡이를 겨누자, 군터도 검을 들며 비웃음을 던졌다.
“그럼 그 잘난 레바논과 같이 계속 전쟁을 하든가. 우리 페이크는 여기서 물러날 테니 알아서들 잘해 봐.”
“…군터 백작,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미닉 왕국 측 귀족의 물음에 군터는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델만 백작은 이 전쟁을 계속하는 게 의미가 있다고 봅니까? 몇 달이 지나도록 에스더성은 점령도 못 하고 피해만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습니다. 정말 주신의 가호가 저 성에 임하고 있는 건진 몰라도, 이대로 가다간 도리어 페른 왕국의 역공을 맞고 전멸을 할지도 모르죠. 그러니 그 전에 우리 페이크 왕국은 발을 뺄 겁니다.”
“군터 백작…….”
“델만 백작도 잘 생각하시죠. 그럼…….”
그 말을 끝으로 군터 백작을 비롯하여 페이크 왕국의 수뇌부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 밖으로 나가 버리자.
“너희는 파문이다! 파문이라고! 너희 페이크도 흑마법사들과 다를 게 없다!”
엔더 대신관은 길길이 날뛰며 입구에 대고 삿대질을 해 댔다.
“후우…….”
한참 고함을 지르고서야 겨우 안정을 되찾은 엔더 대신관.
그는 남아 있는 도미닉 왕국의 귀족들과 장수들을 보며 물었다.
“당신들도 이 신성한 전쟁에서 발을 뺄 생각인 건 아니겠지?”
“우리는… 페이크 왕국이 발을 뺀 이상, 우리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뭐라고?”
도미닉 왕국을 대변하여 델만 백작이 침착하게 말을 이어 간다.
“군터 백작이 말을 거칠게 해서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번 전쟁은 신속함이 가장 큰 관건이었습니다. 페른이 정비를 끝마치기 전에 수도를 점령했어야만 했죠.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고 전선은 고착화되어 버렸습니다.”
델만 백작이 차분히 말을 이어 간다.
“더욱이 만약 우리가 이곳에서 큰 전력 손실을 입는다면, 크라켄 왕국이 자국에 쳐들어올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니 저 역시 이쯤에서 물러나는 것이 옳은 선택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엔더 대신관께서도 부디 현명한 선택을 내리시길…….”
“크윽…….”
그에 엔더 대신관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콰자작-
책상을 내려치며 소리쳤다.
“빌어먹을!”
* * *
한편, 같은 시각.
허공에서 연합군이 분열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레바논이 혀를 찬다.
[이것 참… 상황이 이렇게 될 줄 몰랐네요.]
[백스 자작이라고 했던가? 생각 이상으로 유능한 인간이었다. 그 공세를 기어코 막아 낼 줄은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어머, 그뿐만이겠어요? 언데드 군단이 없었으면 진작 공성전이 끝났을걸요?]
[…지금 내 탓을 하는 건가?]
베논이 싸늘한 목소리로 묻자 레바논은 어깨를 으쓱여 보인다.
[누가 당신 탓이래요? 그냥 그렇다는 거죠. 그보다 저대로 놔뒀다간 그대로 찢어져서 각국으로 돌아갈 것 같은데. 어쩔 생각이에요?]
[…….]
베논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자꾸 제 신도들이 이 전쟁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물어 오잖아요. 아이 씨… 시끄러워 죽겠네.]
레바논은 귀를 후비적거리며 짜증을 낸다.
[아무래도 페른의 멸망은… 뒤로 미뤄야 할 것 같군.]
[그럼 이대로 병력을 물리자고요?]
[그래. 지휘관의 차이가 예상 밖의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걸 확인했으면 됐다. 이제 내 종들이 대륙을 멸망시키기 전까지 유능한 지휘관들을 최대한 제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으면 되지 않겠나?]
베논의 말에 레바논은 불쾌함을 드러내 보인다.
[그럼 나는 뭐가 되는데요? 전쟁에서 패배한 신으로 낙인찍히는 거잖아요! 그러잖아도 병사들 사이에서 주신인지 뭔지 하는 놈이 자꾸 언급되던데. 전 그렇게는 못 해요!]
[그럼 어쩌자는 거지?]
[일단 페른은 확실하게 멸망을 시켜야겠어요.]
레바논이 단호히 대답하자, 베논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뭔가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 보지?]
[좋은 방법이 하나 있긴 하죠.]
그녀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베논을 응시하며 말한다.
[당신이 흑남에게 한마디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요? 지금 당장 페른을 배신하고 에스더성을 치라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