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미친 소리를 하는군. 당연히 별개로 취급해야지.]
[모두 멸망시킨다고 해서 한번 물어봤네요. 뭘 그리 성질을 내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니 그런 거다.]
베논이 불쾌감을 드러내 보이자 레바논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다.
[당연히 농담이죠. 그런데 정말 페른이 이기기라도 하는 것 아니에요? 그럼 우리 계획에도 차질이 생길 텐데요.]
[전에도 말했듯 달라지는 건 없다. 또한 만약 페른이 승리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괜찮을 수도 있다.]
[…괜찮다고요?]
레바논의 질문에 베논은 무심히 말을 이어 간다.
[이번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과연 페른이 그대로 가만히 있을까? 당연히 침공한 왕국들에 원한을 품고 전쟁을 준비하겠지. 그렇게 벌어지는 연속적인 전쟁은 대륙의 힘을 좀먹고 나아가 멸망의 기틀이 될 거다.]
그럴듯한 베논의 논리에 레바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것도 그러네요.]
[그건 그렇고… 혹시 주신이라고 들어 봤나?]
뜬금없는 베논의 질문에 그녀의 얼굴에 물음표가 걸린다.
[주신이요?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인데… 그건 또 뭔가요?]
[모르면 됐다.]
[뭔데 그래요? 혹시 알아요? 설명해 주면 알지도 모르죠.]
레바논의 설득에 베논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뗐다.
[요즘 내 영역에서 잡신을 섬기는 녀석들이 늘어나는 것 같더군. 네년도 사정이 비슷한가 싶어 물어봤다.]
[뭐라고요? 난 또 뭔가 했더니… 그냥 흔하디흔한 잡신 중 하나겠죠.]
피식 웃으며 입꼬리를 올린 레바논이 귀엽다는 듯 베논을 바라본다.
[잡신에게 그리 신경 쓰는 걸 보니 요즘 많이 예민해진 모양이네요. 아니면 잡신에게 신도들을 다 뺏길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건 아니겠죠?]
[…닥쳐라.]
[그게 편하다면 그렇게 할까요? 어머, 이제 공성전을 시작했네요.]
레바논이 대수롭지 않아 하며 고함과 비명이 오가는 전쟁터를 즐겁게 내려다보자.
그런 그녀를 슥 째려봤다가 그 또한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이주일 뒤.
“급보입니다! 연합군이… 연합군이 닐슨성을 함락했다고 합니다!”
전령이 들고 온 하나의 소식이 페른 왕성을 크게 요동치게 했다.
“허어… 적어도 한 달은 버텨 주길 바랐건만, 예상보다 더 빨리 무너졌군.”
“적이 입은 피해는 어느 정도지?”
“약 1만 정도의 병사를 죽였다고 합니다만… 그래도 20만이 넘는 대군이 에스더성으로 진격 중이라 합니다. 지금과 같은 행군 속도면 약 일주일 뒤에 에스더성에 연합군이 도착할 것으로 보입니다!”
전령의 보고에 왕좌에 앉아 있던 안드레이아 3세가 무거운 한숨을 내쉰다.
“에스더성마저 무너지면… 이 페른 왕실도 나의 대에서 끝나게 되겠군.”
“와, 왕이시여! 염려하실 필요 없습니다! 분명 백스 자작이 성공적으로 적의 침공을 막아 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에스더성은 산맥을 끼고 있어 적들도 쉽사리 공략할 수 없을 겁니다!”
“또한 백스 자작의 지휘 능력이라면 능히 적을 격퇴할 수 있겠지요!”
신하들이 목청을 높여 왕을 안심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안드레이아 3세는 못내 불안했는지 비스겔 장군을 보며 입을 뗐다.
“징집병은 얼마나 모였나?”
“3만을 추가로 징집하긴 했습니다만, 한 달 정도는 훈련을 해야 최소한의 몫을 할 수 있을 거라 판단됩니다.”
“한 달이라…….”
지친 듯 미간을 손으로 짚으며 말을 이어 가는 안드레이아 3세.
“흑마법사는? 언데드 군단 쪽의 상황은 어떻지?”
이번 전쟁은 페른만 잘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약 7만가량의 언데드 군세, 그들의 활약이 절실했다.
“에스더성 옆의 산맥에 군세 배치를 완료했다고 합니다.”
“…그런가? 명령 체계에 혼란이 있었을 텐데 처리가 굉장히 빠르군.”
“그쪽의 총사령관은 제른이라는 자인데, 제법 능력이 출중한 것 같습니다.”
신하의 보고에 안드레이아 3세는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였는지.
한결 편안한 표정으로 신하들을 보며 말했다.
“7만의 언데드 군세와 8만의 병사라면 능히 에스더성을 지켜 낼 수 있겠어. 흑탑의 지원이 참으로 도움이 됐군.”
“하나, 왕이시여! 아직 안도하기에는 이릅니다! 연합군이 물러가는 그날까지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데르콘, 자네의 말이 맞네. 아직 안도하기엔 이르지. 그런데 말이네…….”
늙은 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신하의 면면을 훑던 중.
갑자기 한 가지 의문을 내비친다.
“상황이 이리도 급박한데 어째서 흑남은 보이질 않는 거지?”
“그것이… 전쟁으로 불안감에 떨고 있을 백성들을 위로하겠다고 잠시 왕도 바깥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신하의 보고에 지쳐 있던 안드레이아 3세의 눈동자가 크게 트였다.
“흑마법사가… 백성들을 위로한다고?”
어이가 없었는지 피식 실소를 흘리는 안드레이아 3세.
“칭찬하마. 올해 들은 농담 중 가장 괜찮은 농담이었다.”
“하, 하지만 정말입니다!”
“…당장 흑남을 불러들여라.”
왕의 싸늘한 명령이 회장을 울리던 중.
데르콘 재무대신이 조심스럽게 입을 뗀다.
“흑남의 말에 의하면, 전쟁의 구도와 전략을 짜는 것은 페른의 몫이지 자신의 몫이 아니라 했습니다. 하여 그를 불러들인다고 해도 큰 도움은 안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군대는 빌려주되 개입하지는 않겠다, 이 뜻인가?”
안드레이아 3세가 실소를 흘리자.
데르콘은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했다.
“솔직히 저는… 흑남의 결정에 깊이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감사라니? 연합군을 물리칠 전략은 안 짜고 밖으로 나돌고 있는 놈에게 뭐가 감사하다는 건가?!”
분노를 표출하는 왕을 보며 데르콘은 덤덤히 말을 이어 갔다.
“흑남은 우리를 위해 의도적으로 자리를 비켜 준 것입니다.”
“그 행동이 의도적이었다고?”
“그렇습니다. 만약 흑남이 언데드 군세를 데리고 왔다는 명목하에 페른의 실정에 개입하려고 했다면 굉장히 골치가 아팠을 것입니다.”
데르콘의 의견이 꽤나 그럴듯하게 들렸던 건지.
안드레이아 3세는 계속 이야기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가 독단적으로 언데드 군세를 운용한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그걸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없습니다. 하나 그는 페른의 판단력과 간절함을 믿고 지휘권을 넘겨줬습니다. 저는 흑남이 그리한 이유가 수뇌부의 의견이 하나로 합치되길 바랐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으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흑남은 나의 생각 이상으로 속이 깊은 인물이라는 것이로군.”
그에 데르콘이 힘껏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흑남의 의견을 존중하여 최상의 계책을 짜야 할 필요가 있다 생각합니다!”
“…좋다. 그럼 곧 있을 에스더 공성전에 앞서 전략을 수립하도록 하지. 또한 흑남에게 말하여 필요한 게 있거든 최대한 지원하도록 해라.”
“명을 따르겠습니다!”
* * *
한편, 같은 시각.
왕성에서 남쪽으로 하루 남짓 걸리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아만성 내부.
“두려워할 것 없다! 염려할 것 없다! 우리의 신이신 주신, 랄프 님을 믿는다면 너희는 그분의 세계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광장에 몰려든 군중을 바라보며 주신교의 이념을 설파했다.
“그분의 세계는 평화롭나요?”
“그렇다! 그곳은 다툼도, 전쟁도 없는 영원한 안식과 평화만이 있을 뿐이다.”
내가 질문하는 군중에게 하나하나 답하며 설교를 이어 가던 그때.
턱, 턱-
돌연 목발을 짚고 있는 절름발이 남자가 내 앞으로 나와 소리쳤다.
“신의 사도시여… 저는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평생을 절름발이로 살아왔습니다. 이런 저도… 주신님의 은혜를, 치유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네가 진심으로, 진심으로 나의 아버지 랄프 님을 믿느냐?”
“예! 예! 믿습니다!”
절름발이 남자의 외침에 나는 다시 물었다.
“네가 진심으로 그분께서 널 치유해 주실 것을 믿느냐!”
“믿습니다!”
남자의 간절한 외침이 광장을 쩌렁쩌렁하게 울리자.
나는 왼손을 남자의 머리 위에 올리고 창조와 소생의 힘을 불어넣었다.
스스스슥-
백색의 광채가 나의 손에서 현현자.
“오오오… 주신의 뜻이 사도님께 강림했다!”
“주신이시여… 랄프 님이시여…….”
군중은 크게 감탄하고 또 탄복하여 멍하니 내 쪽을 바라봤다.
‘음… 이만하면 된 것 같은데.’
나는 남자의 머리에서 손을 떼곤 그를 보며 똑바로 말했다.
“목발을 버리고 편히 너의 집으로 걸어가거라.”
나의 명령에 남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목발을 던져 버리곤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오오오… 주신님의 기적이 그에게 임했어!”
“어떻게 이런 일이…….”
이 모습을 모두 지켜본 군중이 웅성대기 시작하자.
나는 그런 군중을 보며 소리쳤다.
“병든 자들이여, 모두 내게로 오라. 수고한 자들이여, 내게로 오라.”
내가 절름발이 외에도 장님과 귀머거리까지 치료해 주자.
“오오! 주신이시여!”
“제가 주신을 믿습니다!”
어떤 이는 두 손을 번쩍 쳐들고 나의 이름을 열창하기까지 했다.
‘근데… 이거, 생각보다 병자들이 많네?’
이 작은 성에 무슨 놈의 환자들이 이리도 많은지.
병자들이 줄을 지어 내 앞으로 나아오자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다 치유해 주고 내 신도들로 만들면 남는 장사긴 하지.’
실제로도 기적을 보여 줄수록 나의 힘 또한 실시간으로 강해지고 있는 중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아만성에서 벌어진 기적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소문이 되어.
페른 전역에 흘러 나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바알의 힘으로 모습을 감췄다고 해도 두 신에게도 이 소문이 흘러들어 가겠지.’
그리된다면 두 신이 나를 불러 추궁을 할 가능성 또한 존재했다.
‘물론 내가 한 게 아니라 롤프가 한 거라고 발뺌을 할 수는 있지만 신들의 의심을 피하긴 어려울 거야.’
또한 그러한 상황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들은 날 쉽사리 건들 수 없겠지. 어쨌건 아직 난 열쇠로써의 활용도가 있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남쪽 방향을 지그시 응시하며 생각했다.
‘신들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을 포교하면 될 뿐이야.’
어차피 지금 신들의 관심사는 페른과 연합군의 전쟁이지.
나의 포교 활동이 아닐 터.
‘이제 단시간 내로 신도를 급속도로 늘릴 수 있는 방법을 쓸 차례가 됐나.’
애당초 내가 페른에 온 이유도 그 방법을 사용하기 위해서였으니 말이다.
누군가가 지금 대륙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모일 곳이 어디냐 묻거든.
나는 고개를 들어 에스더성을 보라고 할 것이다.
‘좋아. 천천히 남쪽으로 포교를 하면서 이동해 볼까.’
피와 시체로 얼룩질 대지를 향해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세 달 뒤.
“빌어먹을… 저놈의 성은 도무지 함락될 생각을 않네.”
“그러게 말이다. 함락하는 게 가능하긴 한 걸까?”
“이 전쟁… 길어지는 건 아니겠지?”
화롯불 주변에 앉아 있던 병사들이 탄식하며 대화를 이어 간다.
“난 벌써 집에 두고 온 아내를 보고 싶어 죽겠어.”
“어떻게 성을 저딴 곳에 지어 놓은 건지…….”
“그러고 보니 별동대는 어떻게 됐어?”
한 병사의 물음에 다른 병사가 코웃음을 친다.
“어떻게 되긴? 1만 명, 전부 전멸했다더라.”
“…전부? 놈들에게 산맥에까지 병사를 배치할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고?”
“언데드들에게 싹 전멸했다던데. 생존자가 말하기론 산 위에서 사람 가죽을 입은 괴물이 거대한 돌을 굴려 대는데, 올라갈 엄두도 안 난다더라. 살아 돌아온 게 용할 노릇이지.”
“망할…….”
희소식보단 암울한 소식만이 들려오는 탓일까.
병사들의 얼굴은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던 중, 한 병사가 동료들에게 넌지시 말한다.
“아니면 너희도 신이나 믿어 보든가?”
“신? 갑자기 그게 무슨 헛소리야? 레바논을 믿으라고?”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어 가는 병사.
“작은 상처 하나 치료해 주는 데도 돈을 뜯어 가는 악마 같은 신관 놈들이 섬기는 신을 믿느니 진짜 악마를 믿고 말지.”
“아니. 누가 레바논을 믿으라고 했어?”
“그럼 누굴 믿으라고?”
동료의 물음에 화두를 던졌던 병사가 넌지시 말한다.
“주신, 랄프라고 들어 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