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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카데미의 노예가 살아남는 법-134화 (134/200)

◈ 134화

나는 쪽지를 천천히 살펴보곤 생각에 잠겨 들었다.

‘이런 상황도 어느 정도 생각은 하고 있었다만, 정말 페른 왕국 내에 친레바논 세력이 있긴 한 모양이네.’

나는 다시금 쪽지를 쓱 훑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흑남께서 페른을 돕는다고 하신들, 결국 페른은 망국의 길로 접어들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 득이 되고 실이 될진 그 누구보다 흑남께서 잘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손해밖에 없는 선택지를 택하기보단 역시 실리를 챙기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만약 생각이 있으시다면 저 백스를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뭐, 어떻게 보면 이게 현명한 선택인 걸 수도 있지.’

지금의 페른은 침몰하는 배에 가까웠다.

그러니 침몰하는 배와 함께 죽음을 기다리기보단.

적군의 배라도 얻어 타는 것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다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귀족이라는 것들이 제 살길만 도모하는 모습이 썩 좋아 보이지만은 않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하물며 국가 운영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호의호식했을 놈들이 가장 먼저 발을 빼려고 하는데 이걸 어찌 좋게 볼 수 있겠는가?

‘귀족들은 죄다 이런 건지 원…….’

난 속으로 혀를 차며 생각을 이어 갔다.

‘어쨌건 간에 그건 그거고, 내가 저들이랑 손을 잡았을 때 얻을 수 있는 것도 생각은 해 봐야지.’

그저 나의 기분에 판단을 맡길 것이 아니라.

어떤 게 득이 되고 실이 될지 면밀한 판단이 필요했다.

‘이득… 저들과 손을 잡았을 때 얻을 수 있는 이득…….’

잠시간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하던 나는 곧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득이라 해 봐야 페른이 보유하고 있는 영토의 일부를 좀 받는다든가, 아니면 막대한 돈을 받는 정도일 텐데. 솔직히 그딴 것들은 필요가 없어.’

작은 영토 정도는 받아 봐야 골칫거리만 될 것이오.

돈은 이쪽도 충분히 많았다.

‘그래. 놈들이랑 손을 잡아 봐야 뭐 하겠어? 거기다가 이런 놈들이 볼일이 다 끝나면 제일 먼저 뒤통수 칠 놈들이지.’

나는 쪽지를 힘껏 구기려다가.

문뜩 한 가지 생각이 떠올라 다시 쪽지를 폈다.

‘그런데 이걸 보낸 놈이 겨우 자작이라고? 그래도 백작급은 되어야 하는 것 아냐? 아니면 자작은 꼬리일 뿐이고 뒤에 누군가가 있는 건가? 씁… 한번 파 봐?’

아무리 자르기 쉬운 꼬리를 내세웠다고 해도.

나는 꼬리의 주인을 찾아낼 자신이 있었다.

‘어디… 백스 자작의 이름도 적혀 있나 한번 볼까.’

나는 카밀라 공주가 줬던 귀족들의 명단을 꺼내어 이름들을 하나씩 훑었다.

‘백스 자작의 이름은 없네. 공주의 눈에는 띄지 않았던 건가? 음… 에라이, 아무렴 어때? 굳이 일을 번거롭게 만들 필요는 없잖아?’

어디까지나 난 신도를 늘리러 온 거지 페른의 국정에 깊이 간섭하러 온 게 아니었다.

‘그래. 굳이 내가 먼저 나서서 접근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쪽지를 가방에 넣곤 조용히 찻잔을 잡았다.

* * *

다음 날.

“어제는 편히 쉬셨습니까?”

별관을 찾아온 올밀이 불편한 점은 없었는지 물어 오자.

나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불편한 걸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편했다.”

“그렇다고 하시니 참 다행입니다.”

우리가 서로 간단한 안부를 주고받던 중.

내 눈치를 보던 올밀이 슬며시 질문을 던져 왔다.

“그보다… 많은 귀족들이 흑남님을 뵙길 원하는데, 어쩌시겠습니까? 만나 보실 용의가 있으신지요?”

‘많은 귀족들이라……. 귀찮게시리. 다 만나면 내가 쓸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 테니 고위급 귀족 한둘 정도만 만나자.’

“성밖으로도 나가 보고 싶으니 주요 인사 몇 명 정도만 만나 보지. 내가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나?”

“그럼 데르콘 재무대신과 비스겔 장군을 만나 보는 건 어떠십니까?”

‘데르콘과 비스겔이라……. 카밀라의 양피지에 따르면 둘 다 친왕 세력이었지.’

특히 데르콘은 나한테 시비 털었던 노인이었기에 더 기억이 났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데르콘은 날 혐오하는 수준인 것 같았는데, 좀 의외네.’

“좋다. 그 둘을 만나 보지.”

“알겠습니다. 그럼 흑남님의 의사를 두 분께 전달하겠습니다.”

올밀이 별관을 나선 지 얼마나 흘렀을까.

마침내 꼬장꼬장한 노인과 중년의 남자가 별관에 찾아왔다.

“이렇게 독대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비스겔입니다.”

“…데르콘일세.”

그래도 정중히 인사하는 비스겔과 달리 데르콘은 어딘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흑남, 랄프다. 다들 자리에 앉지.”

간단한 인사를 끝내고 우리가 자리에 착석하자.

어제 나에게 쪽지를 건넸던 시녀가 다가와 차를 따라 주고 방 한쪽 끝으로 이동했다.

“너는 물러나도 된다.”

내가 축객령을 내리자.

“아… 네…….”

시녀는 머쓱한 표정으로 거실에서 사라져 갔다.

‘어딜 엿들으려고.’

시녀가 완전히 사라지자 난 그제야 손님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페른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 내게 무슨 볼일이 있어 찾아온 거지?”

“차후 있을 전투에 대해 함께 논의를 하려고 왔습니다. 일단 이걸 보시겠습니까?”

비스겔이 먼저 나서서 지도를 꺼내어 내 앞에 내보이자.

나는 지도를 보곤 조금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호오… 이건 제법 중요한 지도 같네.’

지도에는 요새와 성들의 위치는 물론이고.

저마다 배치되어 있는 군사들의 숫자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전략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지도처럼 보이는데.”

“그렇습니다. 장군급만이 갖고 다닐 수 있는 지도이지요. 적에게 넘어가면 꽤나 골치가 아파질 물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걸 나한테 보여 주는 이유가 뭐지?”

내 물음에 비스겔이 진중하게 답한다.

“2주 뒤, 그 안에 연합군이 도착을 할 테니 그 전까지 대비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길 보시지요.”

비스겔은 페른 왕국 최남단에 위치한 성 하나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 갔다.

“연합군은 이곳 닐슨성을 시작으로 이렇게 길을 타고 올라와 우리의 수도로 향할 것입니다.”

“그렇겠지. 어디까지나 놈들의 목적은 페른의 몰락과 안드레이아 3세의 목일 테니까 말이야.”

“이, 이 무례한……!”

내 말에 데르콘이 발끈하려 하자.

비스겔이 얼른 그를 진정시킨다.

“우리는 지금 흑남의 협조를 구하러 온 거지 싸우러 온 게 아니잖습니까? 조금만 흥분을 가라앉히시지요.”

“끙… 알겠네.”

데르콘이 한발 물러나자 비스겔은 다시 나를 보며 입을 뗐다.

“여하튼 이 상황을 냉정히 보면, 닐슨성만으로는 연합군을 저지할 수 없을 겁니다. 정말 길어야 일주일을 채 넘기지 못하고 함락되겠죠.”

“냉정한 판단이군.”

“병사들과 성주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번 전쟁은 희생 없이는 결코 승리할 수 없는 전쟁입니다. 당연히 발생할 수밖에 없는 희생이라면, 그 희생조차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비스겔이 무거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자.

나는 그의 의견에 동의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희생 없는 전쟁은 있을 수 없지.”

“저 또한 그리 생각합니다. 하여 닐슨성이 함락되고 나면 놈들은 계속 북쪽으로 전진할 것이고, 여러 작은 성들을 통과한 뒤에는 분명 이곳에 도착할 겁니다.”

비스겔은 페른의 중부에 위치한 커다란 점 같은 성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 보였다.

“그리고 바로 이곳이! 우리가 모든 걸 희생해서라도 지켜야 하는 성, 에스더성입니다.”

“흐음…….”

‘확실히 중요한 곳 같긴 하네.’

지도로 봤을 때 에스더성이 뚫리면 수도까지 직통으로 향할 수 있는 데다가.

무엇보다 연합군이 서부나 동부로도 이동할 수가 있게 된다.

“저곳을 확실하게 지킬 수 있다면 연합군의 기세도 한풀 꺾일 수 있겠네.”

“정확히 보셨습니다. 하지만 만약 에스더성이 무너지게 된다면… 페른의 운명은 장담하기 어려워질지도 모릅니다.”

“그럼 언데드들을 저곳에 보내길 원하는 건가?”

나의 물음에 비스겔이 고개를 끄덕인다.

“정확히는 이곳을 흑남께서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

비스겔이 에스더성 옆에 위치한 산맥을 가리키며 나를 응시하자.

나는 의아함을 내비쳤다.

“지도에 표기된 걸 봐선 산맥이 제법 험준한 것 같은데.”

“맞습니다. 하나, 아무리 산맥이 험준하다고 하지만 놈들이 산맥을 우회하여 에스더성을 넘어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요. 저는 그 가능성을 흑남께서 차단해 주셨으면 합니다.”

‘변수를 원천 차단 하겠다는 건가. 생긴 건 산적 같은데 병력을 운용하는 건 굉장히 보수적이네. 뭐… 그만큼 절박하다는 거겠다만.’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만 한 가지만 더 묻지. 지금 에스더성을 관리하는 귀족은 누구지?”

어떤 귀족이 에스더성을 통치하고 있는가.

이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다.

‘만약 친레바논파 귀족이 에스더성을 관리하고 있었다면…….’

에스더성에는 금세 백기가 걸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그건 내가 답하지.”

이제껏 침묵을 고수하던 데르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해당 지역을 관리하는 영주는 백스 자작일세.”

‘음? 백스 자작이라면… 나한테 쪽지 보낸 놈이잖아? 거참…….’

나라를 팔아먹을 생각만 하는 놈이 전략적 요충지를 관리하는 귀족이었다니.

‘씁… 벌써 페른의 미래가 보이는 것 같은데.’

나는 묘한 눈빛으로 데르콘을 바라보며 대화를 이어 갔다.

“당연히 나라의 국운을 맡길 만한 자겠지?”

“물론이네! 예전에 도미닉 왕국의 침공을 훌륭하게 막아 내어 왕께서 철벽이라는 이명도 하사하셨지. 믿을 만한 자야.”

‘흐음… 이 노인네가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건가. 아니면 백스 자작이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커다란 꼬리라 사람들이 눈치를 못 챈 건가. 그것도 아니면…….’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다가 불현듯 한 가지 가정을 떠올렸다.

‘아니면 이 노인네 말대로 사실 백스 자작은 충성심이 뛰어난 인물인데, 누군가가 날 이용해서 백스 자작을 견제하려고 계략을 꾸민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들자 괜히 머릿속이 혼란해졌으나.

이 사안은 내가 개입할 게 아니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걸 다 떠나서 페른 왕국이 최대한 오래 버텨야 내가 포교할 시간도 늘어날 텐데. 끙… 일단 백스 자작에 대한 걸 확실하게 처리하고 넘어가야 되나.’

잠시 고민에 잠겨 있던 난 마침내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리곤 입을 열었다.

“일단 너희의 뜻은 잘 알았다. 그런데 말이야. 아무래도 한 가지는 확실히 확인을 하고 가야겠어.”

“어떤 걸 말입니까?”

“보면 알아.”

나는 내보냈던 시녀를 다시 거실로 불러들였다.

“무슨 일이신지…….”

조금 긴장한 것 같은 시녀가 나를 보며 조심스레 말하던 중.

콱-

나는 그녀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의 얼굴을 붙잡곤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마인드 브레이커.”

“아아… 아아아아…….”

시녀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오자.

“자네! 미쳤나?!”

“뭐, 뭘 하시는 겁니까?!”

당황한 데르콘과 비스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기다려 봐. 지켜보면 알게 될 테니까.”

나는 그런 그들에게 단호히 대답하곤 시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확실하게 걸려든 것 같네.’

어딘가 몽롱한 눈빛으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시녀를 보며.

나는 덤덤히 질문을 던졌다.

“어제 나한테 줬던 페른을 배신하고 연합군에 붙으라는 내용이 담겨 있던 쪽지, 누가 보내라고 시켰지?”

“아아… 으아… 으아아…….”

그에 시녀는 잠시간 몸을 벌벌 떨다가 힘겹게 입을 열어 나의 질문에 답한다.

“배, 백스 자작이 시켰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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