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공주가 우리한테 용건이 있나?’
“어쩌시겠습니까?”
레논이 나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목소리를 낮추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궁금하긴 하군요. 한번 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이곳은 보는 눈이 많으니 제 집무실로 가시지요.”
난 빠르게 레논과 의사를 교환하곤 카밀라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시죠. 저희를 따라오시겠습니까?”
“네.”
우리는 카밀라와 함께 레논의 집무실로 이동했다.
“이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무슨 용건으로 저희를 부르신 겁니까?”
나의 물음에 카밀라가 애원하는 눈빛으로 우리를 응시한다.
“저는… 어떻게든 페른에 지원병을 데리고 돌아가야만 해요. 부디 우리를 도와주세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이미 회의에서 결정이 난 사안을 저희가 뒤집을 수는 없습니다.”
레논이 단호하게 딱 잘라 말했지만.
카밀라는 좀처럼 포기를 하지 않는 눈치였다.
“아까 분명 탑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제가 흑탑이 혹할 만한 제안을 내놓는다면 생각을 바꿀지도 모른다고 말이에요.”
“분명 그렇게 말씀하시긴 하셨지요. 하나 공주께선 그런 제안을 내놓지 못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나의 대답에 카밀라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었죠. 그래도… 당신들은 다를 수도 있잖아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신들은 원하는 게 없나요?”
‘이 여자 봐라?’
카밀라의 말에 나는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탑주를 공략하는 게 어려울 것 같으니까 주변 사람들을 포섭해서 의견을 돌려 보겠다는 건가? 뭐, 나라의 운명을 생각하면 저렇게 하는 것도 이해는 가.’
물론 그녀의 이러한 행동이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았으나.
포섭을 당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이쪽이 원하는 걸 알아서 파악하고 제안을 해야지. 그렇게 틱 물어보면 가르쳐 줄 줄 아나?’
나는 카밀라를 보며 슬며시 입을 뗐다.
“지금 저희를 포섭하려고 하시는 겁니까?”
“제 심복이 제게 했던 조언이 있어요. 흑탑을 이끄는 세 명의 부탑주 그리고 흑남. 이 넷 중, 과반수의 환심을 살 수만 있다면 흑탑을 동맹으로 끌어들이는 것도 아주 불가능하진 않을 거라고요.”
‘아부가… 제법인데?’
그녀의 말에 나는 멋쩍은 미소 지었다.
“하하, 저를 그렇게 평가하신 건 기쁩니다만, 흑탑을 이끌어 가시는 분들은 탑주님과 부탑주님들이지 제가 아닙니다. 그러니 여기 계신 레논 님의 환심을 사시는 게 더 좋을 것 같군요.”
내 말에 레논이 화들짝 놀라 손사래를 친다.
“무슨 그런 말씀을?! 랄프 님이야말로 흑탑의 미래 그 자체 아니십니까?!”
하하하-
나와 레논이 서로를 추켜세우며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하던 중.
카밀라가 조심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쨌건 전 당신들의 도움이 필요해요. 반드시요! 그러니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지 좋으니 제게 말씀을 해 주셨으면 해요.”
“원하는 거라…….”
“일단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앉으시지요. 차를 내오겠습니다.”
* * *
그날 저녁.
끼이이익-
키말라와의 회담을 끝마친 뒤.
나는 집무실로 돌아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이건 조금 의외네. 설마 그녀가 그런 제안을 해 올 줄은 몰랐는데.’
몇 시간 전.
카밀라는 나를 포섭하기 위해 내게 한 가지 제안을 해 왔었다.
‘페른에 병력을 파병하도록 도와준다면 브람스가가 소유하고 있는 오리하르콘 광산의 채굴권을 주겠다라…….’
물론 아직 그녀의 제안을 수락한 것은 아니었으나.
마음이 동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보다 카밀라가 그 사실을 직접 언급한 걸 보면, 광산이 진짜 있긴 한가 보네.’
나는 그 사안을 반쯤은 허무맹랑한 소문 정도로 치부하고 있었기에.
공주의 제안은 소문을 확신으로 만드는 보증표가 된 셈이었다.
‘다만 내가 원하는 걸 저렇게 상세히 알고 있는 걸 보면 카밀라도 제법 정보를 많이 수집하긴 한 모양이야.’
내가 원하는 걸 카밀라가 알고 있다고 하여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다만 이쪽이 원하는 걸 면밀히 조사했을 저들의 노고에 박수를 보낼 뿐.
‘하지만… 채굴권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단 말이지.’
나는 티스푼으로 찻잔을 휘휘 저으며 생각을 이어 갔다.
‘오리하르콘을 채굴하는 건 당연하고, 거기에다가 뭔가를 좀 더 얻어 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나 광산의 채굴권 그 이상은 줄 수 없다던 카밀라의 말이 떠올라.
나는 쓴 미소를 지었다.
‘왕국의 운명이 걸렸으니 간이고 쓸개고 다 내놓을 줄 알았는데, 참 아쉽게 됐어.’
카밀라에게서 더 얻어 낼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렇다면 페른 왕국에서 뽑아낼 건 없을까?
달그락-
내가 티스푼을 들어 찻잔의 테두리 부분을 툭툭 건들던 그때.
[주신님! 주신님!]
‘…음?’
갑자기 머릿속에서 제이나의 음성이 울려오는 것 아닌가?
‘씁… 이건 몇 번이고 들어도 적응이 안 되네.’
신도의 기도가 머릿속을 울리는 이 상황을 몇 번이고 경험하긴 했었으나.
아직은 이 묘한 상황이 낯선 것도 사실이었다.
[얼마 전까지는 이름으로 부르더니 왜 갑자기 낯간지럽게 주신이라고 불러?]
[랄프 님이라고 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시잖아요?]
[…그래. 그냥 편한 걸로 불러라. 그보다 무슨 일이야?]
나의 물음에 다시금 제이나 쪽에서 음성이 들려온다.
[아, 별건 아니고 잘 도착해서 포교 중이라고 말씀을 드리려고 했죠.]
[그래? 상황은 좀 어때? 잘되는 것 같아?]
[그게… 이제 시작이긴 하지만 다크 엘프들이 믿는 토착신 때문에 생각보다 쉽지가 않긴 하네요.]
제이나의 하소연에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지. 갑자기 생판 모르는 신을 믿으라고 하면 누가 믿겠어?]
[그것도 그렇죠. 그래도 계속 포교를 하다 보면 언제고 소득이 있지 않겠어요?]
[느긋하게 해. 괜히 또 급하게 추진하면 될 일도 안 되니까.]
[알았어요. 상황이 좋아지거든 또 기도를 드릴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제이나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다.
‘토착신이라……. 하긴, 생각해 보면 다크 엘프들이나 다른 이종족들도 저마다 믿는 신이 있을 수 있겠지.’
제이나는 그러한 장벽을 뛰어넘어 주신이라는 새로운 신의 이름을 전파하고 있을 터.
‘만약에 다크 엘프들이나 다른 이종족이 아무런 신도 믿지 않았다면 포교를 하는 것도 한결 수월… 가만…….’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나는 티스푼을 내려놓고 깊이 생각에 잠겼다.
‘가만있자……. 이거… 오리하르콘 광산의 채굴권 말고도 페른에서 더 얻을 수 있는 게 있겠는데?’
지금 페른은 레바논 왕국의 선전포고로 인해 전 대륙의 군세를 상대하게 됐다.
‘그렇단 건 레바논을 섬기던 페른 왕국의 국민들이 대부분 레바논에게서 등을 돌렸을 거고, 페른 왕국이 공식적으로 섬기는 신은 없는 게 되는 거잖아? 그렇다면…….’
나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페른에 가서 포교 활동을 하는 건 어떨까?’
설령 페른 왕국이 연합군의 공세를 이기지 못하고 멸망한다고 해도.
사라지는 건 페른 왕국이라는 이름 뿐, 그곳에 살던 국민들은 그대로 남아 있을 터.
‘일단은 페른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가서, 포교 활동을 하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이거… 나가란 탑주와 한번 이야기를 해 봐야겠어.’
* * *
며칠 뒤.
다시금 회의가 열린 회장에는 무거운 적막만이 흘렀다.
“…….”
카밀라 공주가 열리지 않는 나가란 탑주의 입만 애처롭게 바라보던 중.
마침내 나가란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다.
“카밀라 공주, 이 며칠간 난 참으로 많은 고민을 했네.”
“제 제안이 부족했던 건가요?”
“으허허허, 그 때문만은 아니네.”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나가란이 말을 이어 간다.
“다만 우리가 페른 왕국을 돕는다고 해서 승산을 장담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더군.”
“…그렇죠.”
패색이 짙은 왕국에 파병을 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는 걸 공주 또한 알고 있던 탓인지.
카밀라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져 갔다.
“하지만 레바논의 저 괘씸한 작태를 눈 감고 지켜볼 수도 없지 않겠나?”
“네… 네?”
화들짝 놀란 카밀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 그 말씀은… 우리 페른을 도와주시겠다는 건가요?”
“단! 자네를 도와주는 건 5만의 언데드 군단과 저기에 있는 흑남뿐일세.”
“…네?”
어째 묘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카밀라를 보며.
나가란 탑주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별로 마음에 차지 않는 모양이군?”
“아, 아니요. 그럴 리가요? 그것만으로도 너무 감사드려요.”
카밀라가 허리를 살짝 숙여 감사를 표하던 그때.
“한데 흑남을 파견하는 게 맞는 일입니까?”
갑자기 보라카 부탑주가 의문을 표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보라카, 무슨 문제가 있나?”
“당연히 문제가 있지요! 만약에 흑남이 페른에 갔다가 무슨 변고라도 당한다면 어떡합니까?!”
보라카가 깊은 우려를 표하자.
“하하, 부탑주님. 너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 부분은 이미 탑주님과 이야기를 끝냈으니까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보라카 부탑주를 안심시켰다.
“뭔가 안전장치라도 있는 겝니까?”
“안전장치라고 할 건 없지만 너무 걱정하실 것도 없습니다. 상황을 보고 영 아니다 싶으면 몸을 뺄 거니까요.”
“그래도 그렇지요! 무엇보다 흑남은 전쟁터에 대한 경험이 없잖습니까?! 흑남을 홀로 페른에 보내겠다고 한다면 전 반대하겠습니다!”
하나 내 설득에도 불구하고 보라카가 계속 염려를 표하던 그때.
덜컥-
“걱정할 것 없다. 내가 함께 갈 거니까.”
활짝 열린 회장 문으로 누군가가 당당히 걸어 들어왔다.
“네, 네놈은!”
“제른! 이곳이 감히 어딘 줄 알고 발을 들이는 것이냐!”
예전에 흑탑에서 축출됐던 제른의 귀환에 회장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네, 네놈이 어떻게 살아 있는 게냐?!”
보라카 또한 제른이 살아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못 했는지.
제른에게 삿대질을 하며 지팡이를 잡았다.
“어떻게 살아 있긴? 흑남이 자비를 베푼 덕에 살아남았지.”
“…뭐라고?!”
보라카 부탑주가 경악하여 나를 바라보자.
“보라카, 그리 놀랄 것 없네. 이미 나와 이야기가 된 사안이었네.”
나가란이 나서서 그를 진정시켰다.
“그럼 탑주님께서도 제른을 살리는 걸 동의하셨다는 말씀입니까?”
“그가 큰 잘못을 저지른 건 분명한 사실이지. 그러나 나와 흑남은 그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고자 했네.”
“허어… 하지만 그는… 흑탑을 배신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배신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인 만큼.
보라카 부탑주는 제른의 귀환을 도무지 납득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걱정할 것 없네. 제른이 결코 흑탑의 요직에 앉는 일은 없을 걸세.”
나가란이 재차 보라카를 설득하자.
“…일단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허 참…….”
보라카는 어딘가 불편한 표정을 한 채 한발 물러나는 태도를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른이라니?”
“저놈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살려 둔 건지…….”
그러나 좌중에게서 흘러나오는 술렁거림이 좀처럼 잦아들질 않자.
쾅-
나가란이 의자 손잡이를 내리쳐 좌중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어쨌건 카밀라 공주, 이 정도 지원이면 페른도 만족할 거라 생각하는데. 공주의 생각은 어떤가?”
“물론이에요. 이로써 페른도 한시름 놓을 수 있겠어요. 감사드려요.”
“대신 우리와 한 약속이 완벽히 성사되기 전까지 공주는 검은 대지에 남아 주셔야겠네.”
약속이 성사될 때까지 볼모로 삼겠다는 탑주의 말에.
카밀라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죠.”
“자, 그럼 이만 회의를 파하도록 하지. 랄프와 제른, 두 사람은 출정 날 전까지 모든 채비를 끝마칠 수 있도록 하게!”
“예!”
‘후우… 이제 시작인가. 앞으로 일이 더 바빠지겠구나.’
* * *
며칠 뒤.
“속도를 더 높여! 다음 주가 출정 날이다! 그 전까지 스켈레톤 5천 구는 더 제작해야 된다!”
“허업… 예!”
언데드 공방은 밤낮 할 것 없이 분주히 돌아갔지만.
그럼에도 나는 공방의 흑마법사들을 독촉했다.
‘언데드 병사 5만. 솔직히 적은 숫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많은 숫자도 아니란 말이지.’
집결한 연합군의 숫자만 20만이 넘는다고 하니.
20만이라는 숫자 앞에서 5만은 다소 초라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뭐, 중요한 건 전쟁이 아니라 포교긴 하지만 그래도 확실히 구색은 갖춰서 가야 하니까.’
내가 완성되어 가는 누더기 골렘을 보며 생각을 이어 가던 그때.
“이제 머지않았군요. 오직 이런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제른이 눈을 번뜩이며 나를 응시했다.